▲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최근 인공지능 ‘알파고’가 세계 최정상급 기사인 이세돌 9단을 압도적으로 이기면서 던져준 충격이 제법 크다. 내막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승부의 의미가 단순히 바둑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 것이다. 사실 단순한 바둑 대결이었다면, 평소에는 그렇게까지 주목을 끌지 못했던 바둑에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되었을 리가 없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승부의 여파는 바둑 이외의 분야에까지 미칠 것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요즘은 바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듯하니, 왜 하필 바둑을 놓고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을 주목하는 지 잠깐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사실 20년 전 즈음에 슈퍼컴퓨터를 동원한 인공지능에 체스 세계 챔피언이 패배한 바 있었다.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20년 전에 인간이 인공지능에 패배한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둑이라는 또 하나의 분야에서 진 것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느끼는 충격은 다르다. 체스에서 패배했을 때 던져준 충격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 만큼은 아니었다. 필자부터도 ‘체스 정도는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나보다’ 이상의 느낌은 없었으니까. 그러면 왜 바둑에 있어서의 충격이 더 클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바둑이라는 게임의 생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을 두루 섭렵해보면, 인간이 고안해 낸 게임 중 가장 복잡 미묘한 것으로 바둑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게 된다. 이는 게임의 복잡성으로 인한 깊이와 관련된다. 보통 게임의 수명은 길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좀 하다 보면 더 연구할 필요도 없이 확실하게 이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래서 흥미가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십년 넘게 인기를 유지하는 게임이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런 게임에 비해 바둑은 수천 년 동안 두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업으로 하는 프로기사들조차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다. 그래도 ‘연구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이 바둑’이라는 고백(?)이 프로바둑기사들의 입에서 나온다. 그럴 만큼 바둑은 무한한 가능성을 안고 있으며, 그 차원은 다른 게임이 넘볼 수 없는 경지다.

그런 경지를 보여주는 사례 하나만 들어 보자. 웬만한 게임 뿐 아니라 일상적인 일 대부분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딱 부러지게 구별된다. 그래서 이것만 알아두면 그 분야에서 어지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어림도 없다. 예를 들어 바둑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들에게는 ‘빈삼각은 두지 마라’고 가르친다. 대부분의 분야에서라면 ‘빈삼각은 나쁜 것이니 절대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고수들의 바둑에서는 다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사들의 대국에서 가끔 빈 삼각이 나온다. 그리고 이를 본 해설자들이 ‘역시 고수가 되려면 빈삼각도 둘 줄 알아야 한다’며 감탄한다.

웬만한 분야에서라면 궤변 취급을 받을 이런 논리가, 바둑에서는 반드시 의식해야 할 원리다. 이러한 상대성과 ‘이율배반’을 이해하지 못하면, 바둑에서는 고수 근처에도 못 간다. 이러한 원리가 동양사상의 특징과도 연결되기 때문에, 근대적 합리성에 젖어 있는 서양적 사고방식으로는 적응이 안 된다. 세계 대회를 열면 한·중·일의 기사들만 보이는 이유도 다름 아니다. 서양에서는 현대 물리학을 연구하면서 겨우 이런 원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수준이다. 그래서 아인쉬타인의 유명한 ‘상대성 이론’도 처음에는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니 동양철학의 총아인 바둑만큼은 근대적 합리성의 상징인 컴퓨터 인공지능이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봤왔던 것이다. 그만큼 바둑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분야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바로 이런 바둑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꺾어버린 것이다. 이는 곧 인공지능이 인간만 할 수 있었던 분야를 침범해 온다는 뜻이 된다.

외국어 번역이 그런 분야 중 하나라 하면 그 충격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현재로서는 외국어를 번역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뿐이기 때문에, 교육과정 중 외국어 교육이 막강한 비중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조만간 이런 능력이 별 소용없는 시대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바둑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는 알고리즘을 짤 수 있다면, 외국어 번역 역시 시간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도 간단한 대화 같은 내용은 스마트 폰 앱만 가지고도 가능하다. 그런데 더 발달된 번역용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정확하면서도 훨씬 빠른 번역이 가능해진다. 번역이나 외국어 교육으로 먹고사는 직업도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힘들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외국어를 배우는 일 자체가 바보짓이 된다. 지금 한참 외국어에 막대한 비중을 둔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아가 일자리를 찾게 될 시점에서 어떤 타격을 받게 될 지는 불 보듯 뻔하다. 외국어 뿐 아니라, 앞으로 인공지능 덕분에 없어질 직업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아직도 학교에서는 바로 이런 분야를 가르치느라고 힘을 빼고 있다. 결국 학생들만 사회에 진출할 때 쓸모가 없어질 지식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꼴이 된다. 청년 실업이 왜 늘어나는 지 쓸데없이 따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알파고와의 승부가 끝난 지 제법 되었건만, 우리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후폭풍에 대비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의 반응을 감안해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 이유 자체가 불편한 진실이다. 나중에야 어찌되건, 당장 자기들 밥줄 끊길 것을 더 우려하는 경향 때문일 테니까.

우스갯소리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진지하게, 번역용 인공지능 같은 것은 개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반응도 있다. 이런 태도가 우리사회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당장은 번역용 인공지능을 개발하지 않는 것이 학교와 학원 등에서 외국어를 가르쳐 먹고사는 집단의 밥줄을 보장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즘 같은 무한경쟁 시대에서 외국에서도 이런 경향에 협조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한·일 번역 프로그램을 우리가 개발하지 않고 있을 때, 일본에서 먼저 개발해버리면 어찌될까. 저렴한 가격에 훨씬 빠르고 정확한 번역이 보장되는데, 굳이 인공지능 아닌 번역가를 찾아 맡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엄청나게 확대될 막대한 액수의 한일 번역시장의 대부분이 일본에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어차피 일본어 같은 외국어로 먹고살던 사람들이 일거리 잃게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피해는 외국어 교사 같은 일부 직종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받게 된다. 근대화 과정에서처럼 손 안의 기득권 유지에 집착하다, 나라 전체가 넘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 기득권층인 ‘꼰대’들에게는 이런 상황이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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