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최근 ‘융복합 연구’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되고 있듯이, 앞으로 가면 갈수록 어떤 분야이건 한 분야의 연구만 가지고 거두어들일 수 있는 성과가 적어질 것이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명백하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의 학술 연구체제에 별 문제를 느끼지 못할지 모르지만, 뭔가 시도해보려는 사람들이 느끼는 한계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학술연구의 핵심적 존재인 ‘전문가’의 이율배반적 모습과 연결된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 분야를 깊이 연구해 온 집단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이는 자신들이 다루어 온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분야 사람들이 뭐라 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지만, 반대로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수준 이하가 되기 쉽다는 뜻도 된다. 이런 경향이 극단으로 치달리면, 자기 분야에서 만들어낸 편견을 가지고 전공이라는 벽을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면 이런 상황에서 내놓는 연구라는 것도, 선배들이 내려놓은 결론에 한두 마디 보태는 수준 이상이 되기 어려워진다. 이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내놓는 연구 대부분은, 요즘처럼 변화와 경쟁이 심해지는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기 쉽다.

이러한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하나가, 성향이 다른 분야와의 교류이다. 이를 통해 자기 분야가 빠져 있던 편견에서 벗어나면서, 이를 통해 차원이 다른 성과를 얻어 보자는 것이 융복합 연구의 취지라 할 수 있다. 필자 역시 건축학자 등 다른 분야 연구자와의 교류와 공동연구를 하며, 그동안 알고 있던 정보의 오류를 알게 되고 새로운 차원의 성과를 낼 수 있게 된 경험이 있다. 이를 통해 그 상승효과가 얼마가 큰지 뼈저리게 느껴보았다.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 본 컨텐츠는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것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지금도 다른 분야와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융복합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필자와 친분이 있는 우실하 교수 역시 강조를 넘어 한탄까지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상고시대 ‘문명’에 관한 연구라 하면 역사학이나 고고학의 전문 분야인 것처럼 여기는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지구촌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벌써 30여년 전부터 중국에서 발견돼 최근 주목을 받게 된 ‘요하문명’ 연구의 경우부터가 그렇다. 이 분야 관련 학술회의에 참여해 보면, 고고학 분야는 소수에 불과하고 미술·종교 등 여러 문야의 연구자가 다양하게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다른 전공이 이런 연구에 나서면 ‘쓸데없이 나선다’는 식의 쑥덕공론에 시달리기 십상이다.

이렇기 때문에 융복합 연구의 필요성이 더 강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융복합 연구가 강조되는 현상 자체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학술연구에 관한 한, 제대로 방향을 잡아 추진해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우리 사회에 당연한 명분 뒤에 기생충처럼 숨어서 사리사욕 채우는 경우에 대해 여러 번 보여드린 바 있다. 융복합 연구라는 명분을 악용하는 방법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악용’이라는 말까지 쓰는 이유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융복합 연구의 취지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취지는 분명하다. 한 분야만 가지고 도저히 이루기 어려운 성과를, 인접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여 이루어내자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분야가 협력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성과를 내야 융복합 연구를 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럴 정도로 다른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지 않으면 융복합 연구의 의미가 없다는 뜻도 된다.

이런 측면을 확인해가면서 우리 사회의 융복합 연구라는 것을 보면, 뭔가 문제인지 쉽게 드러난다. 그만큼 다른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지 않으면서도, 대충 눈가림으로 갖다 붙여 놓고 포장해 내놓는 것이 우리 사회의 사이비 융복한 연구라는 얘기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융복합 연구는 ‘전공 다른 친구들끼리 모여 친목 도모할 자금이나 타내는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이런 일에 세금 쓰는 정부기관이 앞장서면 짜증으로 끝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최근 그런 사례가 정부출연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융복합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3개로 나눠 있던 연구센터를 한국학융합연구센터로 통합했다. 여기까지야 당연해 보이는 수순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놓고 하는 일이다. 그 방향을 가늠하게 해줄 첫 국내학술회의가 ‘한국 인문학의 성찰 : 논리, 상상력과 진실’이라는 주제다. 알송달송한 제목만 가지고는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겠지만, 발표 내용을 보면 뒷목이 당긴다.

첫 번째 발표인 ‘대붕괴: 현생인류의 소멸과 인문학의 변화’라는 내용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꼭 재난 영화 같은 제목에 어려운 말을 갖다 붙여 썼지만, 내용은 별 것이 없다. 인공지능 같은 기술발전으로 현재의 인문학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는 얘기다. 필자도 2주 전 칼럼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던 바, 이렇게 뻔한 얘기에 다른 분야의 지식과 정보가 필수적일 이유가 없다.

두 번째 발표인 ‘한국합리주의의 정수 : 개성상인의 사개송도치부법 논리 상상력 그리고 진실’이라는 주제도 마찬가지다. 이 역시 ‘회계’라는 체제가 가지는 의미를 주욱 소개해놓은 다음 개성상인의 회계 체계를 중심으로 전통 회계에 대해 설명해놓은 것이다. 철학·경제학·역사학에 천문학 용어까지 어지럽게 늘어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융복합연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세 번째 발표는 제목부터가 ‘중남미 문학을 통해 본 인문학적 상상력’이다. 아예 가르시아 마르께스라는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건 융복합은 고사하고, ‘왜 이런 내용이 한국학을 연구하라고 세워놓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표되느냐’는 의혹을 살 내용이다. 물론 그런 소리 의식해서 그가 한국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얘기를 붙여 놓았으나, 이것이 한국학에서 비중을 두어 다뤄야 한다는 명분이 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융복합 연구가 필요할 내용은 아니다.

네 번째 발표는 더 노골적이다. ‘인문학과 과학기술 융합을 통한 한국학의 가능성’이 제목이다. 제목만 보아도 내용이 뭔지 알기 어렵지 않다. 실제 내용도 앞으로 한국학 연구에 과학기술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거야 한두명이 강조한 내용이니, 좀 민망할 정도일 것이고. 보태진 게 있다면, 발표자가 소속돼어 있던 한국화학창의재단이 이런 일에 노력했다는 정도다. 이거야 연구인지 홍보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니, 융복합 연구라고 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첫 학술회의를 이런 내용으로 채운 한국학융합연구센터의 수장이, 최근 화려하게 보직에 복귀한 권희영 교수라는 점이다. 감투 쓰자마자 벌이는 이와 같은 행보에 기대를 해 보는 것 자체가 바보짓이겠지만, 세금이 들어갔다는 점은 화가 난다. 이런 일에 세금을 쓰면서 재정 바닥났다고 더 거두어들이려 난리치는 꼴을 보면, 왜 총선에서 집권당이 참패해야 했는지 알 것도 같건만… 하긴 그런다고 바로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면 애초부터 이런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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