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집단주의 간 갈등으로 풀어본 꼰대 신드롬

   
▲ ⓒ투데이신문-김종현 일러스트레이터

자유주의-전체주의의 산물, 개인주의
이상사회 건설 위해 발달한 집단주의

한국, 수직-개인주의 성향 띄어
타인보다 우월하다 인정받기 원해

‘우리’라는 우리에 갇힌 한국인
경직된 사회에 ‘꼰대질’ 노출돼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모난 돌이 정 맞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 류의 속담들은 우리 사회에 공고히 뿌리내린 집단주의적 성향을 보여준다.

강력한 유교문화를 구축한 조선 시대와 군사정권, 냉전 시대 등을 거치며 견고히 자리 잡은 집단주의는 이후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개인주의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그간 유교적 가족 개념에서 이뤄졌던 윗세대의 훈계와 조언은 충돌 이전과 다른 ‘꼰대질’이 됐다.

이렇듯 ‘꼰대’는 ‘나’ 대신 ‘우리’가 있는 한국 사회의 집단주의적 성향에 대한 거부감이 발현된 논란이다. ‘내’가 없고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한국 사회. 그리고 이 한국 사회에 녹아있는 집단주의적 성향. 이런 한국사회의 특징은 그대로 이른바 ‘꼰대질’을 위한 기본 재료가 된다.

<투데이신문>이 기획한 개인주의-집단주의 간 갈등으로 풀어본 꼰대 신드롬, 그 두 번째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개념, 한국적 개인주의-집단주의와 꼰대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아보겠다.

자유주의-전체주의가 만든 개인주의

개인주의는 개인을 사회나 민족, 국가 등 다른 주체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 개념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로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1840)에서 최초로 사용됐다.

토크빌은 미국에서 일어난 독립전쟁(1775~1783) 이후 자리 잡은 대중 민주주의(보통 선거권을 기반으로 한 현대 민주주의)를 보면서 당시 프랑스대혁명(1789)을 거치며 절대왕정에서 막 벗어난 유럽의 귀족적이고 전제적인 사회와 다른 모든 평등의 개념을 요약해 개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개인주의에 대해 “새로운 생각에서 나온 새로운 표현으로 공동체의 구성원을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분리시키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독립하게 하는 성숙되고 평온한 감정으로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형성한 후에 스스로 사회를 존중할 수 있도록 이끈다”고 설명했다. 특히 토크빌은 개인주의가 민주주의를 이끄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여겼다.

이 같은 개인주의는 정부가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선 안 된다는 자유주의가 확장되며 탄생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후 1차 세계대전(1914~1918)과 대공황(1929)을 겪으면서 전체주의의 한 축이 되는 민족주의의 발현과 자유방임주의의 몰락이 이어지며 기존 야경국가에 머물렀던 국가의 힘이 보다 더 커지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변화 속에 개인주의는 그 탄생배경인 자유주의와 함께 힘을 잃었고 그 자리는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로 대표되는 전체주의가 차지했다. 비슷한 시기 독일과 일본에서 세를 불려 나가던 나치즘과 군국주의는 파시즘과 한뿌리 개념이다.

역사학자 로버트 팩스턴(Robert O. Paxton)은 저서 <파시즘-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에서 파시즘을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민족주의 과격파가 전통적 엘리트층과 손잡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고 윤리적, 법적 제약 없이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형태’라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 공동체와 집단에 대한 강조와 함께 개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등은 철저히 부정한 것이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다.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함께 파시즘의 끝을 지켜본 유럽인들은 비대해진 국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개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자발적 감시에 눈을 떴다. 이후 베트남 전쟁(1960~1975)에 대한 반발로 인해 일어난 68혁명(1968)을 비롯한 반전·반체제 운동, 표현의 자유, 소수 가치 보호 등을 통해 개인주의는 현재에 이르렀다.

이처럼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에서 발아되고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한 집단주의

집단주의는 집단을 개인보다 중시하는 사상으로, 개인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즉, 집단의 목적과 질서 유지를 위해 구성원 개개인이 가지는 자유와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본디 집단주의는 동양에서는 유교의 인(仁)을 바탕으로 한 개인 간의 조화로운 공동체를, 서양에서는 공동체에 기반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발전해왔다.

이 개념의 시작은 수십만 년 전 수렵·채집이 주를 이루던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시대에 인류는 생활과 생존을 위해 집단을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원시인류에게 집단이란 사냥, 채집 등 생존 활동부터 양육, 교육 등 생활 활동까지 포괄하는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집단주의는 인류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후 18세기 유럽에 자유주의 물결이 불어 닥치며 집단주의는 다소 약해지긴 했으나, 19세기 말부터 자유방임주의 경제의 폐단 등 문제점이 나타났고 이는 결국 대공황으로 이어지며 자유주의의 이상향인 야경국가에서 보다 비대해진 국가 권력이 자리 잡는 등 집단주의는 다시금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 극단적인 집단주의인 전체주의로 발현돼 극단적 권위주의와 민족주의를 내세운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이어 냉전을 거치면서 전통적 자유진영 국가가 아닌 한국 등 제 3세계 자유진영 국가에서는 반공주의와 국가주의가 혼합된 냉전 자유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서 집단주의는 그 명맥을 이어갔다.

집단주의 사회의 특징은 개인이 그가 속한 내집단의 일부가 돼 그 집단으로부터 자신을 떼놓을 수 없다는 점이다. 즉, 개인은 개인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집단이 그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하고 구성원 그 반대급부로 집단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집단주의는 동서양에서 조화롭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써 발전해왔지만, 집단의 결속을 더욱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전체주의로 발전하는 등의 부작용과 모순도 함께 안고 있다.

한국의 개인주의, 그 몰이해의 기원을 찾아서

한국에서 개인주의는 그 뿌리인 자유주의의 미성숙으로 기반이 약하다. 냉전과 분단이라는 특수성으로 반공주의적 성격이 강한 냉전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대신 발달했기 때문이다.

또 이런 배경들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발달해온 집단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한국의 개인주의는 서구와는 다른 특수성으로 발달했다.

유럽은 상업 사회가 발달하면서 다양한 인간관계가 나타났다. 외지인들이 유입되고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조절하는 형태로 의사 결정 방법이 발달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의사 결정의 주체는 개인과 개인이 됐으며 서로 대립하는 개인 간의 이해관계 조절이 계약이라는 형태로 등장했다. 또한 중세의 쌍무적 계약관계에 의한 봉건주의 사회를 겪으며 발달한 계약 관계는 개인주의의 기반이 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전통적인 농경사회를 이루며 살아왔다. 자신의 땅이 있는 마을이 사회의 전부였다. 마을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간관계 역시 그 마을이 전부였다. 특히 농사라는 집단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회 구조상 마을이라는 집단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다소 맞지 않더라도 집단 의사로 결정된 일에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따르는 수직적이고 경직적인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개인성은 오히려 결속을 깨뜨리는 행위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한국의 개인주의 역시 ‘나’라는 주체보다는 집단 속의 ‘나’에 대해 더 초점이 맞춰졌다.

문화심리학자 해리 트라이언디스(Harry C. Triandis)가 제시한 문화 구분 모델에 따르면 개인주의-집단주의로 바라본 문화 구분은 크게 ▲수평-개인주의 성향 ▲수직-개인주의 성향 ▲수평-집단주의 성향 ▲수직-집단주의 성향 등 4가지로 나뉜다.

이 가운데 한국의 개인주의는 자신의 독특성과 개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인정을 받는 것에 관심이 큰 수직-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수평-개인주의 성향의 특징인 자신을 집단의 구성원보다는 자율적인 개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관계에서 자율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을 남보다 탁월한 존재로 여기거나 높은 지위를 지향하지는 않는다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수직-개인주의적 성향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고 그러한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문화유형을 갖게 된 것은 유교 문화와 군사 정권 등을 거치며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경직성과 수직성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역사학자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한국의 개인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일제강점기의 어용 사상에서 천황을 민족과 국가로 바꿔 만든 군사독재 하의 학교 교육과 함께 근대 한국 지성이 개인주의에 대해 취한 애매하고 불철저한 관심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양면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개인주의에 대한 정보와 의식은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초기 저서들을 통해 유럽적인 근대가 한국에 이입·이식되며 생겨났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유럽적인 근대에 대한 저서들을 낸 것은 ‘유럽 강국들처럼 해 우리도 그들과 같은 대열에 서겠다’는 근대국가 건설의 욕망 표출과 외국의 권위를 빙자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이런 언행 불일치는 그의 한국 제자들도 앓고 있던 불치병이었다. 1900년대의 자강론자들은 역시 이론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 없이 서구 열강과 겨룰 만한 근대국가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황실, 국가, 민족 등의 거대 집단을 중심으로 뭉치고 공을 위해서 사를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유행하던 이 같은 중국, 일본화된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강론자들은 1890년대의 신지식인보다 훨씬 더 국가주의로 기울어졌다는 설명이다.

이후 분단과 냉전을 거치며 반공주의와 국가주의가 혼합된 냉전 자유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서 개인주의의 뿌리인 자유주의는 발현될 토양을 잃었다.

이와 더불어 국가에 대한 개인의 희생과 충성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개정 이전 국기에 대한 맹세문 등 집단에서 벗어난 모난 개인을 갈고 닦아 집단의 일부로 만드는 계몽주의에 입각한 교육이 90년대 초반까지 이뤄지며 집단주의와 냉전 자유주의는 더욱 공고화됐다.

물론 자본주의의 발달 등에 따라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가 이후 빠르게 성장했지만, 교육과 사회 분위기는 이에 따라가질 못했고 이런 영향으로 한국의 개인주의는 수직적 개인주의로 자리 잡게 됐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오찬호 박사는 “지금 한국 젊은이들이 과거보다 개성을 더 중요시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과연 개성적인지는 의문”이라며 “실제로 취미, 외모의 기준도 획일화돼 있고 그런 의미에서 사실상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 개인주의는 전통이 없다”고 말했다.

‘나’ 대신 ‘우리’로 채워진 한국인

한국적 집단주의의 특징은 집단의 목표보다 그 구성원들 간의 관계를 더욱 중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의 개념이 나온다. 한국인들은 우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우리 집, 우리 회사, 우리 학교 등 서구적 관점에서 봤을 때 ‘나’의 개념이 들어갈 부분을 ‘우리’가 대신하고 있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 즉 특정한 집단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좋든 싫든 간에 다양한 우리 속에서 교집합을 이루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우리 안에서 나이를 기초로 한 서열이 나뉜다.

한국 사회에는 조선 시대의 철저한 유교 사회를 거치면서 자리 잡은 삼강오륜, 삼종칠거 등의 사회 기본적 윤리가 아직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 삼강오륜의 모든 덕목들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군사 독재 등을 거치며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의 크기, 나이, 성별 등으로 구분된 서열에 따른 수직적 관계에 한국인들은 길들여졌다.

여기에 아직까지 우리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군사문화가 더해진다. 냉전과 남북 분단으로 인한 긴장 상태, 군사독재를 거치며 권위와 상급자에 대한 복종 등 권위주의적이고 획일화된 집단주의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계급을 기반으로 철저한 상하 관계는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나눠진 상하 관계는 그 우리 안에서 권력이 되고 개인은 집단의 일부, 위계질서 속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나’는 없어지고 ‘우리’만 남는다.

고려대 사회학과 윤인진 교수는 “유교적 질서에서는 평등한 관계가 없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의 역할,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역할 등의 유교적 가치가 존재하며 거기에 군사문화가 더해져 이런 유교문화를 더욱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이런 것들이 지금 한국사람들의 의식이나 관계의 기본적 토대”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개인주의에 대한 인식은 조직심리학자 헤르트 홉스테드(Geert Hofstede)의 연구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홉스테드가 2005년 기준으로 전 세계 41개 국가의 개인주의 지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18점으로 35위에 머물렀다. 최하위권 국가 중 아이슬란드, 라트비아, 리히텐슈타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튀니지 등 5개 국가는 점수가 없어(no score) 실질적으로 인도네시아만 한국보다 개인주의 지수가 낮았다.

미국(91점), 오스트레일리아(90점), 영국(89점) 등이 상위권이었고 동아시아권인 일본은 46점으로 24위를 기록했다.

한국의 개인주의 지수가 이처럼 낮은 것은 학교 수업시간을 떠올려보면 더 쉽게 이해가 된다. 한국 학생들은 선생의 질문에 자기 생각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한국 학생들은 답이 명확한 개념에 대해서는 곧잘 대답하지만, 답이 없는 질문,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는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 홉스테드에 따르면 이런 대답 기피 현상은 집단주의가 강한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집단주의에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전체 의견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이런 사고의 연장으로 한국 학생들은 자기 생각이 드러나는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이 집단 전체의 의견을 대표할 수 있는가를 먼저 떠올린다.

다짜고짜 나이부터 묻고 서열을 세우는 ‘꼰대질’의 기초가 되는 한국식 나이 역시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의 상징 중 하나다. 한국인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먼저 나이를 따지는 경향이 있다. 누가 위고 아래인지를 판단해 이를 바탕으로 대상에게 취하는 행동이 달라지는 서열 중시 관습의 일환이다.

매년 논란이 되는 한국식 나이 세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태어날 때 이미 1살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인 부분이 아니라 1년이 지날 때마다 일률적으로 다 함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인들은 조선 시대와 군사 정권 등을 거치며 서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 군사 문화에 익숙해졌다. 이로 인해 누군가를 새로이 만날 때도 쉽게 서열을 줄 세울 수 있는 나이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는 집단주의가 강하게 각인돼 있다. 또한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경직성과 수직성으로 개인주의 역시 수직-개인주의로 발달했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주체는 사라지고 ‘집단’과 ‘타인’, ‘우리’에서 바라보는 ‘나’에 대해 보다 민감해졌다. 그리고 이런 토대로 ‘꼰대’들은 집단에 속한 ‘나’에게 꼰대질을 시작한 것이다.

다음 화에서는 꼰대 논란에서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에 서로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 살펴보고 이 갈등의 해결방안은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참고 자료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파시즘, 스탈린주의, 군국주의, 68운동, 변질된 유교적 전통>(나무위키)

<개인주의-집단주의>(이장주, 심리학용어사전, 2014)

<박노자의 한국사 탐험-한국적 근대 만들기Ⅲ:한국 근대에서 ‘나’의 계보-개인주의 정착의 숱한 어려움>(박노자, 월간 인물과 사상, 2002)

<아시아적 가치관-한국의 개인주의, 개인주의-집단주의, 한국적 집단주의>(한림학사,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한국 사회의 배타성-차별과 배제의 사회심리학:한국적 집단주의의 실체>(최준식, 계간사회비평,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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