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 몇 년 전부터 한국사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역사 콘텐츠 제작도 활성화되는 것 같다. 그 이전부터 인기가 있었던 사극 제작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역사 콘텐츠의 역사왜곡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한국고대사학회 하계세미나 등 역사학계에서 이런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등의 관심을 기울였던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역사 콘텐츠에 한국사 전문가를 붙여 실제 역사와 비교해주면서 해설을 붙이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자체는 나름대로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사실 역사 콘텐츠를 제작하면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기 어렵다는 점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점차 늘어가면서, 허구로 만들어낸 역사와 실제 역사를 비교해서 알고 싶어 하는 수요도 커진다. 그러니 한국사 전문가가 해설을 해주는 현상이 나쁠 것은 없다. 일부 방송에서 이런 일을 하면서, 인기를 얻는 한국사 강사도 생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렇게 바람직한 시도에 대해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 자주 출연하는 인기 강사 하나가, 드라마보다 더 황당한 내용을 해설이라고 해주는 꼴을 자꾸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는 발랄하고 재미있게 역사를 해설해준다며 인기를 얻는 모양이지만, 해설 내용 중 ‘한국사 전문 강사’라는 자격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이 제법 눈에 띄었다.

물론 아무리 유능한 강사라 하더라도, 모든 시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어폐 하나 없는 해설을 해주기는 무리다. 따라서 일부 틀리는 내용을 가지고 책임지라고 몰아갈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역사가 ‘현실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점까지 무시하자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된다. 뒤집어 말하면, 역사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면 관련된 현실의 일에까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적어도 이런 차원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황당한 해설을 해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방영되기 시작한 드라마 미리보기 영상을 제작하면서 들어간 이 인기강사의 해설에 바로 그런 내용이 나와 버렸다. 드라마의 내용은 21세기 대한민국 아가씨 하나가 고려시대로 타임 슬립 해가면서 벌어지는 일종의 판타지라, 드라마 자체에서 역사적 사실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문제는 배경이 된 고려 건국시기의 시대상황을 현재 대한민국과 비교한 데에서 나왔다.

그 발단은 고려라는 나라가 ‘개방적이고 자유로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뒷받침해주기 위해 ‘성(性)적으로 개방된 풍조’를 강조하면서, 왕족도 아닌 여주인공이 왕자(황자)에게까지 반말하며 대들고 욕하며 때리기까지 할 수 있는 분위기였음을 보여줬다. 그러면서 ‘조선이라면 용납이 안 되었겠지만, 고려에서는 왕자들조차 그저 독특한 아가씨라는 정도로 받아들였다’는 식의 해설이 덧붙여졌다. 고려시대에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사회였기 때문에 그런 여주인공의 돌발행동이 이상할 것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의 시대상황이 이렇게 21세기 대한민국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에, 현대의 아가씨가 타임 슬립을 해서 고려시대로 간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고 해설했다. 그러면서 자주적 개방적이고 보다 평등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선에 비해 가려져 있던 찬란한 고려를 조명해보는 시간을 갖자는 당부까지 보태졌다.

요즘처럼 우리 역사에 대해 무식하다는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이런 해설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런 내용이 지상파를 타고 퍼진 악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것은 시대상황에 대한 오해가, 우리시대를 지켜왔던 가치관에 대한 혼란으로까지 연결된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어렵게 얻어진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들면,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라는 체제까지 우습게 여겨지기 십상이다. 드라마 같은 콘텐츠에서 하도 정치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바람에, 마음씨 좋은 지도자 만나면 달라고 하지도 않은 자유와 평등을 알아서 보장해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하긴 전근대 지도자가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 나온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이런 낭만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사실 역사 속에서 별다른 압력을 받지도 않은 기득권층이, 자유와 평등을 인심 좋게 하사해 주는 상황을 본 기억은 없다. 고려시대라고 다르지는 않다. 고려시대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시했던 극히 일부 역사를 제외하고는, 근대 이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등 개념 자체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도,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사라져 버린 자유·평등·민주주의 개념을 되살리는데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역사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겉으로 민주주의 체제를 내세운다 해도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지는 우리 현대사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런데도 그 인기 강사는 이런 희생을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고려 건국 시기에도 평등의 개념이 서 있었던 것처럼 해설한 셈이다. 인기 강사의 몇 마디 헛소리 때문에 상당수의 국민들이 왜곡된 역사인식을 갖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 좋을 일은 없다. 그러니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고려시대도 명백한 신분제 사회다. 최소한 국왕을 중심으로 한 체제에서, 왕족이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상위신분층인 귀족보다도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니 당시 살던 사람이 왕족의 몸에 손을 대고도 ‘독특한 사람’이라며 넘어가 줄 것이라는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황당한 것이다. 더 황당한 점은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거나 성적으로 개방되어 있던 사회분위기를 ‘평등’했다는 근거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역사에 대한 개념을 기본이라도 안다면, 이런 현상이 신분 구별 없는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하다못해 해당 드라마 작가조차도 고려시대는 신분사회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여주인공이 왕자를 때린 일에 대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알고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원칙적으로는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왕자가 왕에게 사정해서 용서를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점을 보면 한국사 인기 강사라는 사람이 드라마 작가보다도 역사에 대한 기본 개념이 잡혀 있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사소한 실수로 여기고 넘어가기 싫어지는 이유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에 비춰 보면 황당한 메시지가, 반복해서 주입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지도자 하나 잘 만나면, 알아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려니 하는 식의 대중적 환상에 야합하려는 측면도 없지 않겠다. 하지만 지겨울 만큼 반복되다 못해, 작가가 아닌 한국사 전문가라는 사람까지 이런 환상 심기에 가세하는 꼴을 보면 쓸데없이 의구심이 생긴다.

사실 이런 메시지는 민주주의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퍼뜨리려는 경향이 있다. 대중들이 이렇게 믿을수록, 힘들게 노력을 기울여 자유와 평등 같은 가치를 지키려 하기 보다 번지르르 한 말이나 늘어놓는 정치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 할 테니까. 헛소리를 하고 난 다음에 묻는 책임에도 차별이 있는 것 같으니, 의심만 늘어간다. 어떤 강사는 그림 그린 화가 하나 잘못 알았다고 맡고 있던 모든 방송에서 하차시키던데, 그 이상의 실수를 하는 이 인기강사에게는 압력이 별로 없는 듯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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