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 최근 대통령이 비선 실세에 의지해서 통치했던 행각이 드러나 전국이 떠들썩하다. 통치를 위해 정비해 둔 공조직이 아무 책임도 권리도 없는 한 개인에게 무시당하며 휘둘린 행각이, 명색이 OECD까지 가입한 현대국가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그런 행각을 벌인 대통령에게 물러나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과정에 대한 수사도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번 수사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나와야 할 인물들에 대해, 일부 언론인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주문을 쏟아내는 것 같다. 특히 전 민정수석으로서, 이번 사건에 누구보다 내막을 잘 알고 있을 우병우 등에 대해 ‘대통령이 이번 사태의 근원이라 밝혀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공정하게 국사를 처리해야 할 대통령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지했던 한 개인에 의해 입시비리·공금횡령 같은 부정이 이뤄졌다. 더욱이 이런 비리에 공조직 요인들이 비선 실세의 비위를 맞추며 앞장섰다 한다. 오히려 이에 저항하던 사람들의 목이 날아갔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의 기강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필자로서는, 특히나 이화여대 같은 속칭 ‘일류대학’에서 너무도 당당하게 입시부정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황당함을 금할 수 없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국내 굴지의 재벌회장께서 자기 힘으로 이루기 어려운 일 중 하나로 ‘자녀들 일류대학 보내기’를 꼽았단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는 자기 힘으로 출세길을 뚫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길 중 하나인 대학입학시험에서만큼은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라도 부정을 저지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대학 중 하나에, 비선 실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규정까지 바꾸어가며 편법 입학을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우리 사회의 기강이 어느 정도까지 무너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마 이렇게 일류대학의 권위가 떨어진 사태를 계기로 학력차별 없애자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당장 몸담고 있는 학교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꼴을 보아야 했던 이화여대 학생들의 분노는 이해가 간다. 대한민국에서 입시지옥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그 정도 학교를 가기 위해 얼마나 피를 말려야 하는지 모르지 않을 테니까. 그런 학교를 비선 실세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편법 입학을 했으니 말이다.

이런 사태를 앞장서서 막아야 할 대통령이, 오히려 친분 있는 사람을 비호하다가 조장까지 했으니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지는 엄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 관련된 인물들의 정확한 증언이 필요하다. 그래야 책임 소재를 제대로 가리고, 이후의 수습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이 어쨌건 대통령의 관련 사실을 감춰주라니 도대체 무슨 발상에서 이런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을까.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는 뜻인데, 이게 누구 좋으라고 만들어낸 논리일까. 이런 행위는 철저하게 기득권층 구조로 짜여진 질서를 미화하던 전근대적 발상에서나 아름답게 보일 뿐이다. 그러니 만인이 평등하다고 규정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을 위해 죄지은 사람을 감싸주라는 건지 모르겠다. 대한민국 같은 민주공화국에서, 공무원이 모셔야 할 주군은 국민이다. 그런 국민이 살아가야 할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렸다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라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당연히 대통령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수사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는 어떤 권력자라도 힘만 믿고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짓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잘못은 숨겨야 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슨 발상일까. ‘대통령이 이런 행각을 벌였다고 하면 참담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유랍시고 내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변명거리가 될까. 이런 사태가 벌어진 판에 개인적인 기분이 문제냐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이런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부터 인정하기 않겠다는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속여서라도 대통령을 비호하라는 주문을 신문·방송에서 공개적으로 촉구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언론계 요소요소에 박혀 있는 현실이 무엇을 의미할까. 미천한 백성들 주제에, 친한 사람에게 이권 좀 챙겨주었다고 들고 일어나 거룩하신 통치자를 끌어내리려 하는 상황이 못내 가슴 아팠나보다. 그래서 일단 ‘소나기 피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주변에서 잘 모시지 못했을 뿐 대통령은 잘 못 없다’는 식으로 몰아가자는 것이겠다.

하긴 이러니까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인 우병우 같은 이들을 수사하는 데만도 이해할 수 없을만큼 시간이 걸렸고, 수사를 하면서도 다른 피의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황제급’대우를 해 줄 것이다. 그러니 검찰에 출두할 때 ‘가족회사 자금 유용한 사실 인정하느냐’는 정도의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기자를 노려보고, 공손하게 두 손 모은 검사와 수사관들 앞에서 팔장끼고 웃으며 조사받을 수 있기도 했을 테고. 법을 집행한다는 검찰의 태도가 이 모양이니, 국민을 두고 개·돼지 취급하는 정부 관리가 나오는 사태도 이상할 것 없겠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가 대한민국을 지키겠단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도 국정화시키겠다며 결국 관철시켰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부터 대놓고 인정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지키겠다는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이 지키려 하는 것은 대한민국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 아닐까.

사실 요즘은 눈만 뜨면 대한민국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사리사욕 채우는 꼴을 보아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분명히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인데도, 그런 일을 막으려는 사람만 피해를 보는 것 같다. 당장 비선 실세 최순실 딸의 승마점수 조작에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던 문화체육부 국장의 목부터 달아났다고 하니, 이런 사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사태를 보면 흡혈귀가 기하급수적으로 번져, 인간이 감염자를 피해 도망다니는 미국 드라마 ‘스트레인’이 떠오른다. 우리의 현실에 그 끔찍한 공포물이 실현된다면 어찌될까. 뒤늦게라도 인간의 저항이 강해지는 모양이지만, 아직도 마음껏 사람의 피를 빨아먹도도 되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흡혈귀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박혀 있음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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