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현대 미술계 탄압사건의 정점 ‘세월오월’ 홍성담 화백

   
▲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직접 겪은 5·18민주화운동 판화 70점으로 표현
간첩으로 몰려 복역...고문관 몽타주 그리기도

야스쿠니 그림 통해 우리 안의 군국주의 반성
풍자 아닌 직설적 그림...있는 그대로 그릴 뿐

블랙리스트는 역사상 가장 큰 문화예술계 탄압
김기춘에는 적나라한 풍자그림으로 대답할 것

【투데이신문 최소미 기자】 예술가 9400여명의 이름이 담긴 이른바 ‘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됐다.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여당이 아닌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예술가들은 지원금을 배제당하는 등 각종 불이익을 당했다.

물론 문화예술계 탄압이 존재한다는 소문은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가 발견되고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지시 내용이 빼곡히 적힌 고(故) 김영한 전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공개된 후 탄압은 더 이상 의혹에 불과한 이야기로만 남지 않았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탄압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그리고 여기, 김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에 무려 14차례나 이름이 등장한 화가가 있다. 2012년작 <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골든타임), 2014년작 <세월오월> 등으로 박 대통령을 끊임없이 공격해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비망록 이전에도 그의 삶은 이미 우여곡절로 가득했다. 그는 몸소 겪은 5·18민주화운동을 수많은 판화들과 그림들로 제작했고, 일본에서의 테러를 불사하고 야스쿠니를 그렸다. 남북 미술교류를 진행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붓과 목소리를 무기 삼아 움직이는 예술가들, 그리고 ‘풍자’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림을 그렸을 뿐이라는 홍성담 화백.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안산에 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나는 풍자를 그리지 않는다, 직설일 뿐

Q. 본인에 대해 소개한다면.
설 쇠면 63살이 된다. 할아버지다. 내 평생에 한 거라곤 그림 그린 것밖에 없다. 아무 탈 없이 화가 본연의 임무와 의무를 다하고 끝까지 일개 화가로서 인생을 잘 마치는 게 목표다. 전공은 그림이지만 부전공으로 소설이나 만화대본도 쓰고 있다. 또 풍수지리를 어렸을 때부터 죽 해왔다. 최근엔 그림 그리는 일이 바빠 그쪽에서 떠난 지 오래됐지만, 한 70살쯤 그림을 마치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좋은 풍수를 찾아 기록하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풍경 속에서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 있도록 답사를 많이 할 예정이다.

Q.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좌파’나 ‘빨갱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할 것 같은데.
아주 명예롭게 생각한다. 더러운 보수 우익들이 나를 자기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고맙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좌파고 빨갱이라 한다면 나는 그 이름을 정말 명예스럽게 받아들이겠다.

Q. 안산에 근거지를 마련한 계기는 무엇인지.
예술가는 너무 한 자리에 오래 붙어있으면 그 지역에서 일정하게 예술권력을 갖게 되고 기본적인 임무나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된다. 그래서 예술가는 끊임없이 떠돌아야 한다. 1992년 감옥에서 출소한 후 광주에서 5년 더 활동하다 서울 상계동으로 자리를 옮겨 3년 작업했다. 그러다 휴전선이 눈앞에 보이는 일산 파주에서 4년 정도 작업했고, 안산에 온건 13년째다. 처음엔 이주노동자문화운동을 하기 위해 음악, 다큐멘터리, 문학하는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2004년 안산에 왔다. 함께 생활하며 5~6년 정도 아주 재밌게 일을 했는데 그림 그리는 일이 과중하게 밀려와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6~7년 전 후배들에게 전부 물려주고 필드에서 떠났다. 그리고 이 작업실에 박혀서 이렇게 그림만 그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Q. 본인의 그림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내 그림의 모든 양식적 구조, 그리고 현실을 예술적으로 변환하는 융합 질서. 이 모든 것들은 샤머니즘으로부터 비롯된다. 전통적 맥을 잇는 문화인 샤머니즘을 그림을 통해 이어가는 것이다.

Q. 작품의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12세 이전의 기억이 모든 걸 결정한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아주 귀중한 진리다. 나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두어 시간 들어가야 있는 하의도라는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예술적 형식이나 내용은 모두 그 기억들로부터 물 긷듯 퍼올리는 것 같다.

Q. 작품 제작 기간은 얼마나 걸리는가.
때로는 그날 스케치해서 몇 시간 만에 완성하기도 하고 일주일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려놓고 도저히 그림이 풀리지 않아 2~3년 묵혀둘 때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그림을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나도 모르게 주어지면 그 그림을 다시 꺼내 완성하기도 한다. 굉장히 속필에 속한다. 그림을 한 번 잡으면 일주일 이상 넘기지 않겠다는 게 그림 그리는 방법 중의 하나기도 하고 내 의지이기도 하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Q. 많은 예술가들이 저작권 침해를 우려해 본인의 작품들을 보호하는데 홍 화백은 홈페이지에서도 자유롭게 이미지를 볼 수 있더라.
우리나라의 문화적 두께가 많이 성숙돼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내 작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상업적 목적에 쓰지 않는 한 최대한 개방하고 싶다. 홈페이지도 바빠서 1년간 통 관리를 못하고 있지만.

Q. 풍자 화가라고 많이 불리는데.
박근혜 정권 들어서 ‘풍자 화가’나 ‘리얼리즘 화가’라고 많이 부르는데 나는 그런 화가 아니다. 물론 민중미술을 했지만 나는 굉장히 탐미적인 사람이다. 어쩌다 시대를 잘못 만나 리얼리즘 화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게 개인적으로 좀 안타깝다. 내 작품들 중 특히 리얼리즘 미술이 논란이 되고 사건을 만드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 작품들만 기억해서 나를 항상 그런 그림만 그리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수많은 작업들 중에서 리얼리즘 미술은 1/10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풍자를 하지 않는다. 직설이다.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르더라. 그래서 내가 미술평론가들을 우습게 본다. 그렇다고 매번 풍자가 아니라 직설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어서 그냥 내버려둔다.

   
▲ 지난해 11월 416기억전시관에서 그림을 설명하는 홍성담 화백ⓒ투데이신문

직접 경험한 5·18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의 탄생

Q. 민중미술 1세대로서 민중미술에 대해 설명한다면.
한국 민중미술의 단초는 1977년부터 어렴풋이 보였고, 1980년 5·18민주화운동 이후 조직화된 게 본격적인 민중미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술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리얼리즘 미술이라고 얘기하는 게 더 적합할 것이다. 미술의 여러 가지 역할 중에서도 사회적 역할에 집중하는 게 리얼리즘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미술의 다양한 기법 중 풍자나 해학이 깃든 것도 있어 만평과도 비슷해보일 수 있다.

Q. 5월판화 <새벽>을 그리게 된 계기는.
연극, 마당극,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문화선전팀’의 한 사람으로 5월 광주를 보냈다. 현장에서 플래카드, 피켓이나 대자보도 제작했다. 이후 신부님들, 수녀님들, 목사님들이 외국에 가서 5월 광주 이야기를 꺼낼 때 사진이 없었던 탓에 내가 경험한 걸 간단하게 스케치해서 드렸다. 그런데 그분들이 외국에 가실 때마다 똑같은 그림을 그려드려야 했다. 그래서 우연히 판화를 생각해냈다. 판화를 조각도로 한 점 파면 원하는 대로 찍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광주항쟁과 관련된 판화들이 70여점에 달했다. 이후 광주항쟁 진행시기별로 50점을 선정해 <새벽>이라는 이름의 광주민중항쟁 5월판화 전시를 열었다.

Q. 5·18민주화운동을 직접 경험하고 변화가 있었다면.
5월 27일 새벽에 공수부대, 탱크, 헬기,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서 5월 항쟁은 좌절로 끝났다. 당시 시민군 본부로 쓰였던 전남도청이 폐침을 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끌려가고. 그 이후로 한국사회는 ‘5월 광주’ 하면 죽음, 피바다, 좌절, 실패, 슬픔, 비극, 학살 등의 단어들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우리는 5월 27일 그 총소리와 함께 새벽 여명이 밝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게 희망이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5월에 우리 광주가 생명공동체를 만들어서 광주를 지켜냈던 대동세상의 기억. 그 기억만으로도 우린 행복하다. 내일 죽는다 해도 행복하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울고 그랬지만 지금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 생각이 더 진해진다.

   
▲ 사람의 시간, 2015년작

최초의 바람직한 남북 미술교류, 그리고 간첩

Q. <민족해방운동사>를 그리게 된 계기는.
5월 광주민중항쟁은 한반도 현대사 속에 숨겨져 있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 역사상 가장 큰 위치를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올바른 현대사의 진실이 1980년 5월부터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이후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많은 학자들과 학생, 활동가들에 의해 현대사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북한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북한바로알기운동’이 생긴 것도 이때다. 이렇게 현대사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그동안 시대의 부조리와 부정한 권력 및 외압에 항거했던 항쟁의 역사, 우리민족을 해방시키려 했던 끊임없는 운동사를 정리해보고자 각 지역에서 150명 정도의 화가들이 달라붙어 그림을 그렸다. 부산은 4·19혁명, 대구는 해방공간, 또 어떤 지역은 3·1운동, 다른 지역은 동학농민혁명, 또 다른 지역은 통일운동 등 11개 파트로 나눴다. 그림 한 점당 높이가 2m20cm, 길이가 7m였다. 11점을 모두 합쳐 77m의 걸개그림이 완성됐다. 전국에 순회전시를 하게 됐고 그 순회의 마지막은 평양이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그림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평양 청년학생화가들에게 11장의 슬라이드와 함께 편지를 보냈다. ‘너희들이 이 슬라이드를 복원해서 전시하고, 북한의 역사는 너희들이 그려서 옆에 붙여라’라고.

Q. 결국 <민족해방운동사>는 북한에서 완성됐는지.
결국 북한 청년화가들이 그걸 복원했고 남한의 역사 옆에 자신들의 역사를 그려 붙였다. 북한 4개 도시에서 순회전시를 열었다. 최초의 바람직한 남북 미술교류가 이뤄진 거다.

Q. 이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려 3년간 복역했다. 당시 고문도 받았다는데.
25주간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조사를 마치고 서울구치소로 송치됐다. 고문 받았을 때 상처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었다. 증거보존신청을 했다. 당시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규명했던 법의학자들이 나를 진단하고 재판부에 소견서를 냈다. 사실 판사는 소견서를 받고도 얼마든지 고문에 의한 상처가 아니라고 판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내 재판을 맡았던 임채균 판사는 직후에 옷을 벗으면서까지 내 상처들이 고문에 의한 것이라는 판결을 내려줬다. 그렇지만 이번엔 고문한 안기부 수사관을 특정해서 고소해야 했다. 그들의 이름은 당연히 숨겨져 있었으니 알 수가 없었다.

Q. 그래서 당시 고문한 사람들의 몽타주를 그렸다는데.
내 변호사가 재판정에 문의했다. “이 사람이 화가인데 고문 수사관의 얼굴을 그리면 그를 특정할 수 있겠느냐”고. 재판정의 판사가 “국가가 하는 전람회에 입상경력이 있어야 그를 인정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내 변호사는 내가 항상 직설적인 그림만 그리니까 입선경력이 없을 줄 알았나보더라.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우리 학교에서 나 혼자 입상됐던 경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아래 입선한 거라 창피해서 밝히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고문 수사관들을 몰래 스케치했다. 잘못 그리면 안 되니까 정말 목숨을 걸었다. 그때 내가 그림이 많이 늘었던 것 같다. 몰래 담요 뒤집어쓰고. 그리고 변호사가 접견 왔을 때 몰래 그림을 빼돌렸고, 변호사는 수사관을 특정해서 고소하게 됐다. 서울구치소가 발칵 뒤집혔다. 감옥 안에서 재소자가 몽타주를 바깥으로 빼냈는데 어떻게 구치소가 몰랐냐고 문책을 많이 받았다.

Q. 출소하기 전까지는 본격적으로 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들었는데.
세계 인권단체나 서구 시민단체들이 내 석방운동을 열심히 해줬다. 내 이름 앞에 ‘화가’라는 타이틀을 붙여서. 물론 그전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화가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100% 갖고 있지 않았다. 재주도 짧고 재능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예술가의 길이 굉장히 고달플 것 같았다. 차라리 사회활동가나 조직가로 평생을 바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2년에 출소하고 나니 그냥 화가가 돼버렸다. 석방운동을 해줬던 사람들에게도 실망감을 주지 않기 위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게 맞는 선택이었는지 틀린 선택이었는지 가늠을 못하고 있다.

Q. 왜 화가를 선택한 것에 대해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가.
예술세계는 그만큼 어렵고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해야 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유혹들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나같이 속된 마초가 과연 그런 영예스러운 예술가의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이 많다.

   
▲ 간코쿠 야스쿠니, 2009년작

야스쿠니는 지금 바로 우리들 곁에 존재하고 있다

Q. <야스쿠니의 미망迷妄> 연작을 그리게 된 계기는.
내가 일본에 갈 때마다 군국주의의 새로운 싹이 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본의 군사주의가 이렇게 되살아나면 동아시아 정세가 어려워질 거라고, 위험함과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2000년과 2007년에 1차, 2차 아미티지 보고서가 나왔다. 중국의 군사적 팽창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직접 중국과 부딪히는 일은 없어야 하니, 일본의 자위대를 새롭게 군사화하고 한미일 군사조약을 맺는다는 대목이 있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 문젠데, 이중에서도 가장 감정적 정점에 서 있는 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아미티지 보고서는 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 다양한 경로로 압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이를 읽고 굉장히 위험하게 느꼈는데 당시 지식인들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Q. 유독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한 건 그런 의미에서였는가.
그렇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내가 여러 강연들과 글들을 통해 ‘박정희가 정말 굴욕적인 한일 협상을 했으니, 그 딸인 박근혜도 제2의 치욕적인 한일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박근혜 정권을 위험하게 봤고 계속 공격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한 기념으로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내 자화상을 그렸다. 박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가 아직 일본군복을 입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성찰의 필요성을 고발하고 식민지 잔재를 지금이라도 청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야스쿠니 연작은 그때부터 내 몸속에 잠재돼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야스쿠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새로운 군국주의의 부활을 비판하는 그림이다. 그리고 이 연작은 일본을 뛰어넘어 끊임없이 발전했다. ‘간코쿠(韓國) 야스쿠니’, ‘타이완(臺灣) 야스쿠니’ 등 군국주의를 새롭게 부활시키는 야스쿠니는 옛날 일본의 식민지 잔재가 완전히 청소되지 않은 채 지금 바로 우리들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계속 그림으로 그려냈다. 그렇게 2015년까지 80여점의 그림을 완성했다.

Q. 도쿄에서도 <야스쿠니의 미망>전이 열렸는데.
처음 그렸던 그림을 2007년에 도쿄에서 전시했고 이후 서울, 제주, 광주를 거쳐 2015년에 전부 완성된 그림을 도쿄에서 다시 전시했다. 2015년 전시 때는 일본 우익 세력들이 몰려와서 전시장 바깥에서 시위했다. 잘못하면 칼을 맞을 수 있겠다고 해서 나는 호텔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렇게 야스쿠니를 마쳤다.

   
▲ 세월오월, 2014년작.(원본) 화면 오른쪽으로 수요집회에 참여하는 할머니들과 촛불을 든 시민들, 일본 아베신조 총리와 야스쿠니가 그려져 있다.

우리에게 세월호로 다가온 5월 광주

Q. 걸개그림 <세월오월>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4년 1월에 광주비엔날레 책임큐레이터가 와서 ‘광주정신특별전’의 킬러프로젝트로 걸개그림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렇지만 힘들다고 했다. 이미 박 대통령과 관련해 <골든타임> 그림으로 대선 전 경을 치른 상태였고, 무엇보다 걸개그림이라는 건 시위와 집회에 사용하는 그림인데 미술관이라는 화이트큐브에 걸개그림을 보내기 싫었다. 마치 관 속에 갖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민중미술 1세대로서 용납할 수 없었고 걸개그림을 그릴 이슈도 없었다. 그러다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이틀 후에 배낭을 짊어지고 진도로 내려갔다.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면서 일주일을 지켜봤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최소 자본으로 최대 이윤을 내려고 하는 더러운 자본가와 부패한 관료사회, 무능한 국가권력이 카르텔을 형성해서 만든 학살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책임큐레이터에게 전화했다. 걸개그림을 그리겠다고. 광주항쟁의 당사자로서 ‘광주정신’은 지난 1980년의 광주를 되돌아보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광주학살은 우리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다가와 있는지 발견하고, 고발하고, 분석하고, 슬픔과 괴로움을 같이 나누고, 치유하는 게 바로 광주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호를 주제로 한 걸개그림이 탄생했다.

Q. 박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했다. 국정농단이 있었다는 걸 예상했는지.
몰랐다. 내가 무슨 돗자리를 깐 것도 아니고. 그런데 박 대통령이 TV에 나와서 얘기하는 걸 보면서 딱 알았다. 저 사람의 의식적인 면, 지식수준, 내공. 이것쯤은 표정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의 진실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뭔가 두꺼운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우리 국민들이 그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허상에 투표했다. 그리고 그가 국회의원으로서 얼마나 많은 기간을 지냈는가. 게다가 이 가부장제 나라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얼마나 귀한가. 여성 국회의원들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10년이 넘는 세월을 여성 의원으로서 지낸 그가 한 게 뭐가 있는가. 세금이 아깝다. 그걸 보고도 그를 허수아비라고 느끼지 못했다면 그건 사람의 눈도 아니다. 백옥주사, 감초주사, 국정농단도 별 거 아니라고 본다. 최순실씨 같은 사람 100명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우리 국민이 뽑았으니까. 대의민주주의에서 최고 권력자가 잘못했을 때 그 책임은 국민들에게 있다. 우리가 강요에 의해 뽑은 것도 아니고 자율적으로 투표했는데 국민이 책임져야 한다.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면서도 창피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

Q. 많은 사람들은 <세월오월>에서 박 대통령의 모습만 지적하지만 사실은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데.
화면의 중심에서 ‘김밥 아줌마’가 세월호를 불끈 들고 있다. 그 오른쪽으로 수요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모습, 촛불을 든 시민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와 야스쿠니가 그려져 있다. 나는 이 장면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생각하면 지난 2015년 12월 28일 이뤄진 치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예언한 작품인데, 사람들은 그걸 또 못 보더라. 그냥 ‘2년 전에 벌써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표현했구나’ 이 정도만 본다.

Q. <세월오월>이 탄압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애초에 광주에 그림 그리는 인구가 적다. 광주비엔날레재단 직원이나 광주시립미술관 큐레이터들도 선후배 관계인데 이야기가 새어나올 수밖에 없다. 이번 싸움은 힘들겠다고, 비엔날레에 압력이 들어오고 있고 국정원 직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고 있다고. 그리고 광주 중심부에 있는 ‘메이홀’이라는 대안문화복합공간에 임시작업장을 설치하고 거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임시작업장으로 향하는 계단 앞 사거리는 통유리로 만들어진 카페로 가득했다. 거기에 앉아서 우리를 체크하는 기관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 2014년 8월 <세월오월> 중 허수아비로 묘사한 박 대통령을 닭으로 교체하고 있다.ⓒ뉴시스

외국에서 처음 선보인 <세월오월>

Q. 결국 <세월오월>은 한국에서 먼저 선보이지 못하고 외국에서 데뷔했는데.
본래 2014년 9월 대만의 성공대학 문예당에서 5월판화 <새벽>을 전시하기로 했는데 대만 측에서 세월오월 파일을 보내주면 실물 크기로 프린팅해서 같이 전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파일을 보내 프린팅해서 전시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UN총회 연설 일정에 맞춰 300~400명에 달하는 미주한인회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시위할 때도 이 그림을 리프린팅해서 선봉에 세웠다. 그렇게 한국에서 먼저 모습을 보이지 못한 건 참 씁쓸하다. 내가 볼 땐 별것도 아닌 그림인데.

Q. 베를린의 초청으로 <세월오월>을 전시하고자 했으나 작품을 운송하지 못했다던데.
2015년 종전 70주년을 맞아 유럽에 있는 많은 평화단체들이 베를린에서 크게 행사를 주최했다. 그간 전쟁과 관련해 유럽 화가들의 그림은 많이 보여줬지만 아시아 화가들은 많이 보여주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한국, 일본, 중국, 대만에서 화가 한 명씩 초청해 전시를 기획했다. 특히 내 경우 주최측이 전시할 작품까지 선정해 왔다. 유신과 관련된 몇 작품, 그리고 <세월오월> 걸개그림. 그리고 그림을 옮기기 위해 주최측과 계약한 한국 운송회사가 어느 날 저녁 전화를 걸었다. “내일 오전 11시에 그림을 가지러 가겠다”고.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9시쯤 다시 전화가 와서 “중역회의를 했는데 이 그림 운송했다간 회사가 깨지게 생겼다. 정말 죄송하다. 운송 못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급히 베를린 주최측에 연락해 상황을 알렸더니 주최측에서 한국의 다른 운송회사들과 얘기했지만 매번 똑같은 말을 들었다. 그림이 베를린에 가지 못했다. 그래서 전시회를 열흘 앞두고 베를린의 미대생 지원자들과 함께 벽에다 직접 그림들을 그렸다.

Q. 이때 그린 <세월오월-베를린>은 박 대통령과 닭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 흑백으로 처리됐는데.
그림 자체가 블랙리스트였기 때문이다. 그림이 도저히 올 수 없으니 그냥 까맣게 칠했다. 박 대통령과 닭 그림을 컬러로 살려놓은 이유는, 그것들 때문에 내 그림이 못 왔으니까.

Q. <세월오월>로 인해 보수단체들의 열렬한 반대를 받고 있는데.
낯설긴 하지만 좋다. 그들도 그런 식으로 표출할 수 있는 게 민주주의 사회니까. 그렇지만 정식으로 토론의 자리를 만들어서 같이 얘기해보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성숙하지 못하게, 마을 주민들에게 내 사진을 크게 프린팅해서 보여주면서 “이 사람이 빨갱이니까 이 마을에서 쫓아내라”고 말하고. 그런 건 서북청년단이나 했던 짓 아닌가. 빨갱이라고 말하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나본데, 그걸 두려워할 사람이 두려워할 거다. 난 이미 빨갱이다. 빨갱이면 어떤가.

Q. 결국 <세월오월>은 오는 3~4월 광주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가 결정됐는데.
이미 <세월오월> 사건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큰 탄압사건으로 기록돼 버렸다. 그때(2014년) 전시했으면 윤장현 광주시장은 영웅 돼서 이재명 성남시장이나 박원순 서울시장이랑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거다. 아무리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사건을 쉽게 만들지는 못하는데, 내가 상을 차려줘도 안 먹겠다고 발로 차버렸으니. 사실 정치에서 부정부패는 매번 있는 일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잊는다. 그런데 문화는 상징이라서 재임 때도, 퇴임 때도, 아니 무덤까지도 따라간다. 광주시립미술관에 <세월오월>을 전시하고 오픈 때 화가들과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한다면 조금 상쇄되긴 할 거다. 그렇지만 탄압을 직접 했던 주체들은 밑에 있는 사람들이다. 행정부시장, 문화예술정책실장, 큐레이터 등. 그 사람들이 정식으로 내 앞에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전시회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Q. 안산 416기억전시관에서 열린 세월호를 주제로 한 그림 전시도 이번달 초 마무리됐다. 앞으로도 세월호 그림과 관련된 계획이 있는가.
사실 세월호를 주제로 그림 그리는 걸 피하고 싶었다. <세월오월> 걸개그림을 끝으로 세월호를 안 그리려고 했다. 젊은 화가들이 나와서 그렸으면 했는데 2년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아서 결국은 내가 그리게 됐다. 세월호는 내 그림의 한 주제로 계속 그려야 할 운명이 돼버렸다. 다만 이제부터 나 혼자 그리는 그림은 이번 전시에서 끝났다. 이제부터 세월호와 관련된 행동이 가는 만큼 내 그림도 갈 것이다. 세월호가 꿋꿋하게 걸으면 내 그림도 꿋꿋하게 걷고, 세월호가 진실을 파고들면 내 그림도 진실을 파고들고, 세월호가 지치면 내 그림도 지칠 거다. 몇몇 건방진 화가들은 마치 예술이 현실을 앞서간다고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림은 인간들이 걷는 발자국을 뒤따라간다.

   
▲ 똥의 탄생, 2016년작

Q. 최순실씨와 박 대통령을 소재로 한 <똥의 탄생>이라는 작품도 나왔는데.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세월오월> 사건이 재조명되고, 故 김 전 민정수석의 비망록과 블랙리스트가 연달아 터지며 정신없이 지냈다. 바쁜 와중에도 <똥의 탄생>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하도 나를 풍자 화가라고 부르니 “이게 바로 풍자다”라고 보여주려고 제대로 된 풍자 그림을 그렸다. 더 많은 그림들을 그려야 하는데 바빠서 못 그리고 있다. 

블랙리스트, 가장 큰 탄압사건으로 기록될 것

Q. 故 김 전 수석의 비망록에 14번 이름이 거론됐다. 소감이 어떤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날 그렇게 좋아했을까, 14번이나 부를 정도로. 사실 나는 괜찮다. 나이도 60살이 넘었고 중견의 자리도 후배들에게 내줘야 한다. 눈도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져서 그림 그릴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내 이름을 14번이 아니라 140번 불렀다 한들 괜찮다. 그렇지만 이제 갓 피어나는 젊은 작가들의 이름이 담긴 9400여명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서 관리했다는 건 너무 소름끼친다. 인류 역사상 어떤 시대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나치 때도 없었다. 가장 큰 탄압사건으로 길이길이 기록될 거다.

Q. 블랙리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예술가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비판적 자세를 가진 거다. 순수하지 않고 정치적이었다면 불이익이 닥칠 걸 두려워서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을 거다. 이 회색빛 현대에 알록달록 감정을 입히는 게 예술가들이다. TV에서 코미디 프로그램을 빼면 누가 보겠느냐. 신문에서 만화와 만평이 없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그런 예술가들은 또 어떻게 생활하는가. 2011년 사망한 故 최고은 작가도 배가 고파서 주인집 문에다 밥이랑 김치 조금만 달라는 메모지를 붙였다고 한다. 그렇게 자존감을 지키면서 작업한다. 그 분도 언론에 나와서 사람들이 알게 됐지, 비슷하게 죽어간 젊은 작가들도 많다. 국가가 예술가들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 의료보험을 제대로 해준 적이 있느냐, 국공립 미술관 할인증을 준 적이 있느냐. 예술가들은 쥐꼬리만한 문화지원금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것 몇 푼 안 주려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제외시켰다. 치가 떨린다. 조윤선 장관은 인간도 아니다. 문화예술이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한 나라의 정책을 좌우했다는 자체가 부끄럽다.

Q. 블랙리스트에 항거하는 예술가들이 세종시에서 1박2일로 농성을 벌이고 광화문광장에 광장극장 ‘블랙텐트’를 설치하는 등 항거하고 있는데.
작가들이 참 잘한다. 이 추운 날씨에 텐트로 극장까지 만든다. 세종시에서 농성을 벌일 땐 걱정돼서 계속 사진을 받아보기도 했지만. 이젠 내가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강함과 부드러움을 잘 조절하고 있다. 좋은 문화예술은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악의 세력들과 끊임없이 저항하는 가운데서 좋은 문화가 창조된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물론 잘 싸우는 것에도 기대를 보내고 있다. 그렇지만 내 경험상 블랙리스트에 저항하고 있는 저 작가들 속에서, 바로 저기에서 향후 우리 문화예술의 미래를 이끌어갈 좋은 예술가들이 탄생하게 되리라고 본다.

Q. 앞으로 그려보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나를 정말 사랑스럽게, 마치 게이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14번을 애타게 불렀다. 내가 응답을 해줘야 한다. 응답하지 않으면 나를 얼마나 무심한 사람으로 보겠는가(웃음). 김 전 비서실장의 일대기를 보니 나와는 또 구연이더라. 1989년 내가 구속됐을 당시 검찰총장이 김 전 비서실장이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조작간첩을 만드는데 선수로 활약했던 분이다. 자칭 IQ 170, 우리나라 최고 사법엘리트가 최고 권력과 간통해서 부와 권력을 누렸다. 남들이 나를 풍자 화가라고 부르는 만큼 풍자화를 그리려 한다. 그런데 사실 풍자화의 정점은 포르노그래피다. 그래서 소위 ‘19금’ 포르노그래피로,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김 전 비서실장에게 응답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자유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화가
Q. ‘민중미술 1세대 화가’, ‘5월화가’ 등의 수식어를 갖고 있는데.

사실 수식어들은 명예롭기에 앞서 일종의 멍에다. 국민들이 수식어를 붙여주는 건 그런 식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이다. 예술가가 어떻게 그런 멍에를 짊어지고 살겠는가, 자유로워야지. 예술가는 예술을 열심히 하든 말든, 상상력을 위해 자유를 마음껏 구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유는 죽음과도 바꿔야 한다. 수식어와 같은 멍에들이 내게는 상상력을 억압하는 기제로 돌아올 수 있다. 나라를 위한답시고 그 멍에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있지만 이제는 떠나야 할 때다.

Q. 평화의 시대가 온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
‘미치도록 아름다운’이란 말이 있다. 살인을 하고 싶도록 지키고 싶은, 내 죽음과도 바꿀 수 있는 아름다움.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싶다.

Q. 훗날 어떤 화가로 기억되고 싶은지.
예술가는 자기 멋대로 살아야 한다. 그런 모습을 사람들에게 마음껏 보여주는 것,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속박으로부터 잠시라도 일탈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임무다. 나는 그렇게 ‘자기 인생을 멋대로 자유스럽게 살았다’고 기억되고 싶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화백의 조그만 재떨이에 어느새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그가 내려준 향긋한 커피가 차게 식어갈수록 그의 입담은 점점 거칠어졌다. 서슴없는 단어들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천천히 나가는 길을 안내했다. 건물을 빠져나가려면 낮게 걸려있는 사슬을 넘어가야 했다. 화백은 “거기 넘다가 넘어진 사람이 많다”며 기자가 사슬을 잘 넘을 때까지 걱정스럽게 지켜봤다. 누군가가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까맣게 칠해버린 이름이 아닌, 인간 ‘홍성담’을 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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