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가박스 마곡점 내 상영관 ⓒ뉴시스

◎외국선 화면해설·자막상영 기기 상용화 됐지만
◎국내 시청각 장애인 영화관람에 어려움 겪어
◎멀티플렉스 3사에 차별구제청구 소송…1심 승소 
장애인 차별 개선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간 판결
◎피고들 “판결 취지 공감하지만 시행 어려워” 항소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게 꿈입니다”

CJ CGV·롯데쇼핑(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멀티플렉스 3사를 상대로 낸 차별구제소송에서 지난 7일 승소한 3급 시각장애인 박승규(36)씨는 자신의 ‘작은 꿈’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18일 서울 은평구의 장애인 인권단체 사무실에서 만난 박씨는 영화를 좋아해 주로 집에서 영화를 즐겨본다. 상영관에서 웅장한 음향과 함께 영화를 즐길 법도 하지만 편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이 없어 영화관을 잘 찾지 않는다.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는 박씨는 흰지팡이(도로교통법 11조는 시각장애인이 흰색 지팡이를 사용하도록 규정. 세계적으로도 흰색으로 통용)를 사용하지 않는 저시력 장애인이다. 밝은 공간에서는 사물의 대략적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야맹증이 있어 어두운 공간에서는 활동이 제한적일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다.

박씨는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때 어두운 장면이 나오면 저는 소리로만 영화를 이해해야 한다. 또 화장실을 자주 가는 편인데, 영화관 같이 실내가 어두운 곳에서는 화장실을 갈 수가 없다”며 영화관에서의 고충을 털어놨다.

또 자막을 읽을 수 없어 외국 영화를 보기 어렵다고 했다. 박씨는 “시각장애인들은 외국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외국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나마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한국영화를 본다. 반대로 청각장애인들은 한국영화를 보지 않는다.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와 달리 외국영화의 경우 자막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각 장애인들은 영화 선택의 폭이 굉장히 좁다”라고 설명했다.

▲ 2013년 4월 CGV 왕십리에서 열린 장애인 영화관람데이 ⓒ뉴시스

‘배리어 프리 영화 있지만 선택 폭 좁아

현재 시·청각 장애인들이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편의가 제공되고 있긴 하다.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는 매월 ‘장애인 영화 관람 데이’를 정해 화면을 음성으로 설명해주는 화면해설과 화자 및 대사, 음악 등 소리정보를 알려주는 한글자막을 제공하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그러나 배리어 프리 영화는 영화 제작사 혹은 배급사나 한국농아인협회 등에서 음성해설과 자막 등을 제작해 제공하는 영화에 한해 상영되고 있어 여전히 장애인들의 영화 선택은 제한돼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 11월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는 1769편이다. 같은 기간 한국농아인협회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음성해설, 자막 등을 제작해 상영한 배리어 프리 영화는 불과 33편이다.

상영 횟수는 전국에서 한 달 80여회 정도다. 상영관도 제한돼 있을 뿐 아니라 상영 시간대도 주중 낮 시간 또는 주말 오전대가 대부분이다.

法, “장애인·비장애인 동등한 수준으로 영화 관람할 수 있어야”

지난해 2월 17일, 박씨 등 시·청각장애인 4명이 CJ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상영하는 모든 영화에 대해 음성화면해설, 한국수어통역 등을 제공해 달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피고 측이 ‘장비 마련에 상당한 비용이 소모돼 과도한 부담’이라고 반박해 ‘영화 제작업자 또는 배급업자 등으로부터 화면해설 또는 자막 파일을 제공받은 영화의 경우 이를 제공하라’고 청구취지를 변경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 7일 재판부는 피고들에 대해 박씨 등 시각장애인인 원고 2명에게 화면해설을, 청각장애인인 원고 2명에게는 자막을 제공하고, 이 중 2급 청각장애인 원고에게 FM보청기기를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또 이들 4명이 영화 및 영화관에 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통해 화면해설 또는 자막을 제공하는 영화와 그 상영관 및 상영시간, 그 밖에 장애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편의의 내용을 각 제공하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상영관에서는 시각장애인인 원고들에게 점자자료 또는 큰 활자로 확대된 문서로, 청각장애인인 원고들에게는 한국수어 통역 또는 문자로 된 영화 정보를 제공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배리어 프리 영화를 상영하는 부산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영화제 등에서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으로 영화의 화면해설을 제공하고, 국내에서도 배리어 프리 영화의 자막을 재생할 수 있는 스마트 안경이 유통되고 있다”며 피고 측이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여러 대안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화상영관별로 소수의 장비나 기기 설치로 설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며, 피고들의 국내 스크린 점유율·상영관 규모 등으로 미뤄 장비나 기기 설치비용을 지출하는 것이 피고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 ⓒ뉴시스

英, 대형 배급사 ‘배리어 프리’ 제작 佛, 시청각 장애인 접근성↑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 5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경우 시청각 장애인들이 영화 관람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대부분의 영화관이 적절한 장치를 갖추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대형 배급사들은 대부분 자사의 영화에 자막 또는 오디오 설명을 포함해 제공함으로써 시청각 장애인들의 영화 관람을 지원하고 있다. 메이저 배급사들은 이들 추가 서비스 비용을 모두 부담하고 있다.

프랑스의 경우 2013년 7월 10일부터 2016년 12월 28일 사이에 개봉한 영화 중 총 740편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이 중 41%인 300편이 시청각 장애인이 접근 가능한 영화였다. 프랑스 내 200관 이상에서 개봉된 영화의 경우, 78%가 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시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영화들의 비중도 2013년 2분기 40%에서 지난해 2분기 5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15년부터 ‘권리와 기회의 평등, 장애인들의 참여와 시민권(l’éalitédes droits et des chances, la participation et la citoyennédes personnes handicapés)‘에 관한 법령을 시행 중인 프랑스는 해당 법령을 개정해 영화관에 ▲청각 장애인을 위한 청각 감응 장치 등의 음향 설비 ▲청각 장애인을 위한 영화 자막의 배포 ▲시각 장애인을 위한 영화 오디오 해설의 배포를 법제화 할 예정이다.

미국은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정한 연방통신법에 따라 상업용 영화나 비디오는 자막방송, 화면 설명 방송의 의무가 강제적으로 행해져 장애인의 보편적인 의사소통 접근권을 고려해 영화 제작사나 배급사가 자막과 화면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단체 “장애인 차별 개선 발판된 판결”

박씨는 이번 판결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아직 확정판결이 난 것은 아니지만 이번 판결로 멀티플렉스 회사에서 장애인들의 원활한 영화 관람을 위한 기본적인 장치들을 갖춰야 할 의무가 생겼기 때문이다.

박씨는 앞으로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권(享有權) 개선에 힘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번 소송에서 이겼으니 이를 토대로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 더 많은 것을 바꿔나갈 생각이다.

그는 “실제로 영화관에 가서 어느 정도의 편의제공이 되는지, 얼마나 이행이 되는지 모니터링하고 결과를 공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백지현 간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10년 전 제정된 차별금지법에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권이 명시돼 있지만 현재까지도 가장 대중적인 문화예술인 영화 관람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판결이 확정된다면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될 것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번 소송의 변호인단에 참여한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김재왕 변호사도 “이 판결은 그동안 영화 관람에서 소외됐던 시·청각 장애인의 현실이 장애인 차별임을 확인한 판결”이라며 “이 소송으로 영화뿐만 아니라 뮤지컬, 오페라 등의 공연에서도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과 화면해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이번 판결을 평가했다.

▲ 7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장애인정보문화누리 등 시청각 장애인 단체 관계자들이 시청각 장애인 영화관람권 보장을 위한 차별구제청구소송에서 승소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시스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모두 ‘항소’

한편 피고 멀티플렉스 3사 모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상황이다.

멀티플렉스 관계자들은 모두 “판결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 항소를 진행한 이유를 전했다.

롯데시네마 관계자는 “판결문에 편의제공 의무를 부담하는 문화사업자에 대한 범위가 명시된 부분이 있는데 멀티플렉스가 이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명확히 하기 위해 항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기를 마련한다고 해도 음성해설·자막 등 콘텐츠가 뒷받침 돼야 사용할 수 있다”며 “1심 판결에 따른 장애인에 대한 편의제공 절차가 합리적이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라고 밝혔다.

CGV 관계자는 “제도적으로 기기·장비 등이 표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바로 시행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입장을 전했다. 

메가박스 관계자도 “판결의 기준이 모호하고 광범위하다”고 항소 이유를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이후 법원의 판결을 지켜봐야 한다”며 “항소심에서도 원고 측의 주장을 전개해 재판부를 설득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종적으로 1심 판결이 확정된다면 멀티플렉스 업체 등에서 시·청각 장애인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자막이나 화면해설을 제공하는 보조기기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실제 미국 등에서는 청각장애인에게 자막을 제공하는 특수안경이나 시각장애인에게 화면해설을 들려 주는 기기 등이 상용화 돼 있다”고 강조했다.

멀티플렉스 3사가 항소함에 따라 시·청각 장애인의 문화·예술 향유권을 위한 싸움은 조금 더 길어지게 됐다.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싶다’는 박씨의 ‘작은 꿈’은 언제쯤 이뤄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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