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가 잘 모르는 허균
[칼럼] 우리가 잘 모르는 허균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2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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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홍길동전』을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호부호자(呼父呼子 :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자식을 자식이라 부를 수 있어야 된다는 말), 활빈당(活貧黨, 부자의 물건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도적의 무리), 율도국.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였다. 그리고 학벌과 경제력에 따른 각종 차별을 겪고, 지지부진한 정치권의 모습과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기득권의 몸부림에 혀를 차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쯤은 홍길동의 등장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이 『홍길동전』을 지은 사람이 허균(許筠, 1569-1618)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균은 『홍길동전』의 저자로 유명하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이 허균에 대하여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껏해야 허균의 누이가 당대의 문인이었던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라는 것이 허균이 『홍길동전』의 저자라는 것 외에 조금 보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허균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었을까?

우선 허균은 당대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허균의 부친 허엽의 호는 강릉의 유명 음식인 “초당두부”의 그 초당(草堂)이다. 그의 호가 초당인 이유는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허균의 이복형제인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에까지 올랐고, 동복형제인 허봉은 허균의 스승 역할을 할 정도로 학문 수준이 높았고,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대로 동복 남매인 허난설헌은 여류 문인으로 유명하다.

또한 허균의 관직 생활의 파란만장함도 잘 드러나지 않은 사실이다. 명문가 집안 출신답게 허균 역시 관직에 진출했다. 25세이던 선조 27년(1594)에 과거에 급제한 후 그의 행실과 종교를 이유로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왕이었던 선조가 허균을 상당히 총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의 굴곡진 관직 생활은 광해군 5년(1613)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으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 사건은 명칭 그대로 일곱 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 사건을 의미하는데, 7명의 서자 가운데 한 명이 허균의 제자였고, 허균 역시 이들과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허균 역시 변란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아서 목숨이 위태로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사 결과 허균은 이 변란에 관련되어있지 않다고 밝혀졌지만, 허균은 이 사건을 계기로 뒷배가 될 실력자가 필요함을 알았고, 그의 선택은 대북세력의 실력자이자 함께 글공부를 했고, 훗날 영창대군을 살해하자고 요구했던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이었다. 즉 칠서지옥이 광해군의 영창대군 제거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이첨을 뒷배로 얻은 허균은 호조참의와 형조판서까지 역임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형이었던 허봉과 다른 붕당(朋黨)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승승장구하던 허균은 결국 대북 세력의 전면에 나서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했고, 영창대군이 선조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인목대비는 결국 폐위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같은 북인 계열인 정온, 남인계인 이원익, 심지어 정치적 동지인 영의정 기자헌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리고 결국 상당수 중신으로부터 배격됐고,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으로부터 역모 혐의로 고발돼서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1)

허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사실은 허균이 불교 신자라는 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허균이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파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가 부처를 숭상한다는 혐의였다. 대표적인 예로 삼척부사 재직 당시 허균의 파직을 요구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불교를 숭배하고 믿었다는 것2) 이 그 주요 이유였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했던 조선시대에 불교를 숭상한다는 혐의는 지금으로 치면 주사파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과 유사했다.

명문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시대의 명작을 남기고, 등용과 파직을 반복하다가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역모 혐의로 사형에 처해진 허균. 어떤 사람은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시대의 반항아라고 평가한다. 확실한 것은 허균을 단순히 『홍길동전』의 저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너무 작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1)  이근호, 「허균-조선중기 사회모순을 비판한 문신 겸 소설가」, 『인물한국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995&cid=59015&categoryId=59015

2)  『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1607) 5월 4일 병인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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