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해마다 설날 즈음이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1위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겠다. 그리고 아마 2위는 이 말이 아닐까.

“새해 액땜했다고 쳐.”

겨울엔 세상 모든 게 건조하게 쪼그라들었다가 눈과 비에 다시 말랑거리며 풀어지는 걸 반복하다 보니 멀쩡하던 것들도 왠지 물성이 위태위태해진다. 사람 마음도 비슷해져서 연말연시엔 관계로든 뭘로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종종 생긴다.

사건이란 게 두개 이상의 진행이 서로 다르게 나아가다 만나서 생기는 거니까, 이미 그 교차점에서 굴절해 튀어나간 사건은 또다른 어딘가를 향해 자기 길을 가기 마련이다. 일은 늘 물고 물리면서 벌어진다. 피치못할 일을 당했다는 건 그로 인해 다른 사건이 시작된다는 걸 의미한다.

어쩌면 액땜했다고 치자는 말은 한번의 고초가 또다른 사건의 연속으로 이어지지 말라는 바람이겠다. 이 일은 여기서 끝. 한 해를 이런 식으로 시작할 수야 없다.

사건은 떠난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사실 불행감 뿐이다. 연쇄적으로 이어질 여파를 감당하려면 각각의 사건으로부터 매번 얼른 마음이 떠나야 한다.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사건은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쌓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제일 편리한 방법은 이미 벌어진 상황을 숙명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결과를 되새기느라 괴로워하는 것 보단, 현재의 결과가 미래의 새 사건과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숙명적인 근거를 찾는 게 더 쉽다.

그런 방면으로 새해 운세란 얼마나 좋은 수단인가. 스마트폰에는 다양한 운세 앱들이 있고, 은행이나 포털 같은 사이트들도 운세서비스를 올려 놓는다. 대개 아주 나쁜 소리들은 없다. 그야 당연히 사람들은 기분 나쁜 이야기만 늘어놓는 걸 굳이 손품 팔며 찾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적당히 경고하고 크게 격려해준다. 인터넷 시대의 천기누설은 가볍디 가볍게 떠돈다. 간혹 안 좋은 문장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건 읽어도 머리에 그다지 잘 저장되지 않는다. 나쁜 내용들은 두 눈의 망막을 통과해 시신경을 타고 머리 뒤통수로 휘발되어 사라진다. 

그렇다. 운세를 본다는 건 바로 이걸 하기 위함이다. 선택적으로 잊는 즐거움에는 운세만한 게 없다. 어차피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고 이러거나 저러거나 시간은 간다. 대놓고 원하는 것만 편식해도 누가 뭐라할 사람 없다. 당장 입맛에 좋으면 기분은 좋아진다.

올 한 해가 이렇게 잘 될 운세인 걸 보니, 이번 일이 앞으로 닥칠 수도 있었던 더 큰 액을 막아 올해 운을 지켜준 거구나! 그래 새해 시작부터 고생값을 치렀으면 연간 불운총량에서 좀 더 과감하게 감경해줘야 균형이 맞지.

그런데 이렇게 좋은 운세를 왜 새해마다 매번 귀찮게 갱신해야 할까. 어떤 사건이 닥쳐도 액땜으로 소비되는 행운이 반드시 일년마다 따라줄 팔자라면, 그냥 그 운을 나눠서 평소의 모든 사건 사고가 더 큰 사건을 막는 액땜인 쪽이 더 나은데 말이다. 그러면 아예 일상에서 큰 일이 안 일어날 게 아닌가.

365일 동안은 잡다한 여러 불행이 닥쳐도 운세 땜질용으로 삼을 수 없다는 건 너무 가혹하다. 우리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경쟁과 갈등의 부담을 안고 산다. 뉴스를 보면 매일 국회에서, 도로에서, 바다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별의별 사건들이 터진다. 이런 난장판을 해결해 보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나서면 그건 또 그것 대로 싸움이 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회용 액땜 티켓만으로 일년을 버티라는 건 매정한 처사다.

생각 해 보니 ‘일년마다 새해’라는 구분 자체가 지나치게 간격이 넓다.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은 한 해의 간격이 너무 넓어서다. 새해 운세라는 건 우리가 일년 버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쯤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때가 왔다는 밑도 끝도 없는 확증편향의 근거를 찾는 일이다. 연초 즈음의 사건 사고를 액땜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의 모든 일은 반드시 이번 일년이 좋아야 하는 근거가 돼야겠기에 아예 반대 싹을 자르고 확증편향을 굳히느라 하는 말이다.

설날을 기념하는 행위의 가장 큰 기능도 인생이 너무 고되고 길어서 일년 간격으로 운세 리셋 버튼을 누르는 것에 있다. 사람들이 설날에 운세를 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설날이 확증편향의 근거로 이용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초의 액땜운을 나날이 소분해 놓으면 우리는 일년 내내 설날처럼 살 수 있다. 오늘 액땜용 에피소드들로 내일 다가올 큰 액을 막아 아침마다 행운이 오게끔 운세 리셋을 할 수 있다. 매일 사건을 떠날 수 있다. 이걸 굳이 연간 행사로 정의할 이유는 없다.

하늘의 움직임을 인간이 그은 구분선으로 부르는 개념이 없었다면 운세라는 그럴듯한 인과율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다 우리가 정하기 나름이다. 음력 1월 1일만 설날이라고 믿는 건, 그렇게 믿기로 한 누군가로부터 비롯되어 이후로는 모든 천체관측의 결과를 1월 1일 설날의 근거로 삼은 확증편향 때문이다.

이 참에 차라리 설날은 없는 셈 치는 게 마음이 홀가분하다. 그러면 더 잘되어야 한다고 중대하게 결심할 것도, 작년 보다 더 나빠질까 불안해할 것도 없어진다. 스트레스는 줄고 매일을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이게 웬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기분 좋은 정초에, 일년마다 불행 방어하는 건 귀찮으니 설날은 없는 셈 치자는 설날기념 칼럼을 읽게 될 줄이야. 그것 보시라. 설날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겨울엔 예기치 못한 사건이 종종 생긴다.

뭐 그런 사람들은 새해 액땜했다고 치자. 대신 액땜을 했으니 올해 복은 제대로 많이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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