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매일 해질녘이 되면 집 근처 홍제천을 따라 걷는다. 코로나 19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천 주변 산책로에는 마스크를 쓰고 기어이 나온 사람들로 늘 붐빈다. 

일정한 거리를 걷고 반환점 삼아 돌아오는 다리가 있다. 이 낮은 다리 한가운데서 내려다보면, 얕은 물 아래 한 평 남짓의 모랫바닥이 있다. 그곳에 민물고기인 버들치가 떼를 지어 산다.

요즘 들어 유난히 그곳의 수면이 요동을 쳤다. 며칠은 그냥 궁금해하며 지나쳤는데 얼마전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가만히 지켜보니 8자를 그리며 일정한 영역을 지키느라 바쁜 녀석이 몇 있다. 이리저리 다니며 다른 버들치가 자기 영역 안으로 오지 못하도록 열심히 밀쳐낸다. 그리곤 움푹한 모래 구덩이 안에서 흐늘거리는 (필시 암컷일 게 분명한) 다른 녀석에게 몸을 대고 바르르 떤다. 

버들치의 산란기가 5~6월이라니까, 지금 이 좁은 모랫바닥의 버들치들은 사랑을 나누느라 바쁜 모양이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한 탓인지 이들은 남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암수 한 쌍이 산란하는 순간, 이놈 저놈이 와서 치고 받고 훼방 놓는다. 그러면 소란을 탐지한 다른 녀석들마저 순식간에 떼로 몰려든다. 잠잠하던 수면에 들끓는 물보라가 인다. 

결국 영역의 주인은 짧은 행위 틈틈이 침입자들을 물리치느라 또다시 8자를 그리며 돈다. 이 안타까운 반복이 여기저기 계속되느라 곳곳에서 물결이 푸르르 떤다.

버들치가 신경 써야 할 상대는 같은 동족만이 아니다. 가끔 잉어가 버들치 모래구역을 침범해 바닥을 마구 헤집으며 뭔가를 열심히 삼킨다. 버들치가 산란한 알들은 아마도 탱크처럼 밀고 들어오는 잉어들의 뱃속으로 적잖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버들치들은 잉어 주변에서 패닉에 가까운 몸짓을 보인다.

그러나 버들치들에게 진짜 위협은 따로 있다. 존재 자체가 전천후 사냥무기인 왜가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그들의 목숨을 노린다. 왜가리는 온 신경을 모래구역의 물결에 집중하며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경쟁으로 바쁜 버들치가 부주의해지기를 기다리며 5분 이상 꼼짝 않기도 한다. 

왜가리나 백로가 매번 사냥에 성공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곳 모래구역에선 한번 달려들 때마다 한 부리에 두 세 마리를 낚는다. 왜가리 입장에서 이곳은 만찬장이다.

버들치는 그저 자신의 후세를 남기기 위해 먹고 사랑하고 싸우고 지킨다. 그들은 단지 한 뙈기 모래밭에서 지나치게 경쟁적인 일생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정신을 놓으면 고개를 비스듬히 낮게 숙이고 다가오는 왜가리의 먹이가 된다.

좁은 모랫바닥에서 생존과 번성을 향해 경쟁 의지를 내뿜는 버들치에게서 남북으로 나뉜 우리가 보인다.

한반도의 절반을 경계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갈등이 얼굴을 마주한다. 적대적 갈등의 접점인 환경에서 힘 없는 나라는 다른 나라들이 벌이는 패권다툼의 희생양이 된다. 때문에 남북은 생존을 위해 경쟁에 몰두한다.

한국은 한반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세력갈등을 관리할 만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동북아 균형자 외교를 펼칠 수 없다면 미중 양측으로부터 외교적 전략 동반자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다. 가치를 증명해내지 못하면 역내 영향력이 약화되어 주변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치여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오랫동안 전쟁불안에 갇힌 경제활동과 그에 따른 불확실한 삶이라는 현실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그들 또한 오랜 동맹을 유지해 온 중국과 세계질서의 맹주인 미국 사이에서 요령껏 중심에 있어야 한다. 두 강대국간 외교 갈등의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없다면, 북한 역시 양측으로부터 쓸모를 인정받을 수 없어 이리저리 치여야 한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한반도 주변 패권구도에서 제 역할을 가진 주요 구성원이 되어야만 살길이 열린다. 두 주체가 하나의 공간에서 오직 하나뿐인 목표를 공유하면 끝없이 서로를 견제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남북은 단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처지다. 이 불행한 현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은 한반도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이다. 

요 며칠 미국의 전 국가안보 보좌관 볼턴의 회고록으로 시끄럽다. 보도를 종합해 보면 그는 트럼프의 재임을 막기 위해 책에서 그간의 대북 외교를 깎아내리고 북미회담과 관련한 한국, 북한, 미국 정부와 정상들을 비이성적인 것처럼 묘사했다. 남과 북이 저마다 살길을 찾겠다고 주장을 펴는 것을 두고 볼턴은 자국의 이익에 반하는 적대 세력을 바라보듯 한다. 

미국 같은 강대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상징하는 볼턴의 관점에서, 남북은 그저 동족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팔린 존재일 뿐이다. 남한이 한반도의 주역이 된다면 북한은 그만큼 잃는 게 생긴다. 북한이 중심국가가 되면 남한도 그만큼 잃는다. 볼턴에게 그런 남북은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필사적인 외교 행위를 펼치는 교활한 나라일 뿐이다. 

볼턴의 회고록 보도를 접할 때 마다 홍제천의 왜가리가 떠오른다. 한반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만 생존에 유리한 이상, 남북은 좁은 모래 위에서 서로 경쟁하느라 왜가리의 먹잇감이 되는 줄도 모르고 바쁘기만한 버들치가 된다.

왜가리는 버들치의 생에 아무런 공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살려면 잡아먹어야 할 대상이므로 딱 그만큼의 시선으로 버들치를 본다. 버들치의 사랑도, 질투도, 경쟁도 그리고 그 때문에 피어나는 애잔함도 왜가리에겐 아무 의미 없다. 단지 그러다 부주의해질 때를 기다릴 뿐이다. 생사여탈권을 쥔 강력한 존재의 무감함은 그 자체로 공포다.

바로 그 때문에, 볼턴의 회고록을 통해 왜 남북이 통일되어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케 된다. 미국과 중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더라도 한반도의 두 체제는 경쟁을 멈추기 어렵다. 러시아나 일본 독일이 그 자리를 메꿀 것이므로, 한반도에 휴전선이 있는 한 남북의 이익추구가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같은 목소리를 내는 단일 정치협력체로서 외부에 대응해야만 모두가 산다.

요즘엔 통일 비용이라든가 이질적인 문화 혹은 자본계급 격차가 불러올 혼란 등을 이유로 남북 통일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통일의 대비라는 관점에선 옳은 지적이다. 하지만 단지 보통의 삶이 평화롭기 위해서 통일은 당위를 가진다. 

한반도 남북에 걸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그저 자기 자신의 목소리대로 이루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남과 북은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서 한 목소리를 내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나라의 패권다툼 속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느라 누군가의 먹잇감이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다. 겨레의 소원이라든가 민족적 화합 같은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통일은 필요하다.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홍제천 주변을 걷겠다는 어느 가족의 평범한 저녁 산책을 위해서 통일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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