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일몰에 기대다’를 읽고

【투데이신문 정남진 기자】 독자들은 그를 ‘바람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가 빚어낸 시편들에는 바람의 이미지와 바람의 이야기가 많다.

배교윤 시인. 그가 최근 ‘일몰에 기대다’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시집을 펴냈다. 2003년 <문학과 경계>로 등단한 이후 두 번째 시집이다.

목차를 펼치면 바람의 시들이 쭈욱 펼쳐진다. ‘바람의 시간’, ‘바람의 귀’, ‘마음의 경계’, ‘분리’ 그리고 ‘가을강’에 이르기까지.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같은 시인의 삶’이 오롯이 투영된 것같은 시편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시집을 읽어 내려가면 가슴 속에 뭔가 ‘싸아-’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진다. 정처없이 흘러왔다, 또 정처없이 흘러가는 바람을 대하는 듯, 그의 시에는 강한 이끌림이 있다. 그리고 어떤 진실들이 있다.

배교윤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주하게 되는 진실들을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에서 3가지로 요약해 본다.

 

삶은 어차피 바람같은 것이다

가을강

 

잊지 못할 것들이

살아나서 말을 걸고 있다

(중략)

물은 강으로 흐르지만

여전히 강물에 마음을 담그지 못한

의지가 있어

계절마다 쓸쓸한 빛이 감돈다

개울이 흐르는 들녘으로 가면

아직 못다 한 말들이

쟁기질할 때까지는

약속을 뒤집지 말아야 한다.

가슴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처럼

바람에 흔들리게 놓아두어야 한다 (끝)

 

‘가을강’이라는 시의 제목부터 인생을 느끼게 한다. 가을강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생의 많은 것을 직감한다. “물은 강으로 흐르지만 / 여전히 강물에 마음을 담그지 못한 / 의지가 있어”

그렇다. 노년이 다가오면 ‘물은 강으로 흐르는’ 순응이 더욱 자연스러워 지지만, ‘여전히 강물에 마음을 담그지 못한 의지가 있어’ 선뜻 자연과 이치에 순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처럼 ‘계절마다 쓸쓸한 빛’을 느끼나 보다.

놓아 두어야 한다. ‘가슴은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처럼 / 바람에 흔들리게 놓아두어야’ 한다. 그렇다. 시인의 다짐처럼,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처럼 자유로워지려면, 바람에 흔들리게 놓아 두어야 한다.

삶은 어차피 어디선가 스쳐왔다 다시, 스쳐지나가는 바람일텐데, 시인의 말처럼 바람에 흔들리게 놓아 두어야 한다. 바람같은 순응에 익숙해져야 한다.

 

우린 늘 실존을 마주하며 살아야 한다

암 병동에서1

 

앙상한 팔뚝을 두들기던 간호원

“혈관이 약하군요”

여섯 시간의 투약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항암 주사액을 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방전된 몸을 본다

옷을 입었음에도 맨몸으로 느껴지는

구겨진 생의 체면

힘내라 손잡은 딸에게 변명이 되어 버린 몸

아직 끝나지 않은 계절에

나는 푸른 그림자와 서 있다 (끝)

 

우린 누구에게나 숨겨진 아픔이 있다. 삶의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그늘이 있다. 가끔은 숨기고 싶고 부인하고 싶은 그 무엇들이 있다.

시인의 ‘암 병동에서1’를 읽다보면 나 또한 삶의 그늘을 대하게 된다.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엄연히 존재하는 정직한 실존과 맞서게 된다.

실존은 때론 견디기 어렵게 아프다. 시인의 고백처럼 ‘한 방울씩 떨어지는 항암 주사액을 보며 / 삶과 죽음의 경계에 방전된 몸을’ 우리도 함께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남몰래 고개를 떨군다. 다시 시인의 고백처럼 ‘구겨진 생의 체면 / 힘내라 손잡은 딸에게 변명이 되어버린 몸’같은 솔직한 실존을 대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늘 정직하고 솔직한 실존과 부딪치는 연습을 해야 한다. 힘겹더라도, 그래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며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는다

히말라야 핑크소금

 

미네랄 함량이 높다고

동생이 히말라야 핑크소금을 보내왔다

3억 년 전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솟아올라

히말라야 산맥이 되어 만들어졌다는

이 소금을 먹으면

항암으로 방전된 몸이

다시 흠결 없는 몸이 될 수 있을까

차돌같이 빛나는 분홍 소금 덩어리

천년의 시간을 우려낸

히말라야의 내면을 본다

오늘 저녁에는 청정의 히말라야를 헐어

콩나물국을 끓여 보아야겠다 (끝)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 히말라야를 하나씩 품고 살 일이다. 시인의 바램처럼 ‘천년의 시간을 우려낸 / 히말라야의 내면’을 품고 살 일이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

각자의 마음 속에 ‘천년의 히말라야’를 품고 산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리라. ‘청정의 히말라야를 헐어 콩나물국을 끓이듯’ 노년이 되어서도 ‘히말라야 같은’ 시를 늘 대할 수 있다면, 우린 다시 내면으로부터 일어서는 힘을 얻으리라.

그리고 끝내는 일어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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