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중고등학생 때 필자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었다. 바로 “조선시대 과거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능력 위주의 사회로 바뀌었다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역사 대하드라마를 보면 양반이 노비를 때리고 구박하면서 “무엄하다!”를 외치는 장면을 봤던 필자에게 조선시대가 능력 위주의 사회라는 대목은 납득이 되지 않는 명제였다. 그리고 필자가 대학 시절 우리나라의 관리 선발의 역사를 살펴보고 난 뒤에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국가(國家)’라고 일컬어질 만한 형태가 초기의 형태로 나온 시기를 흔히 ‘초기국가시대’라고 부른다. 국가에는 필연적으로 행정을 담당할 관리가 필요했고, 이 시기에는 각 부족의 대표가 관리가 됐다. 그리고 이 가운데 한 명이 왕으로 추대됐다. 즉 각 부족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이 관리가 됐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높은 사람”은 힘이 강하거나 나이가 많거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후 국가의 고대적 형태를 일컬어 ‘고대국가’라고 부른다. 삼국시대-남북국시대를 뜻한다. 이 시기에는 이전 시대와 비슷하게 특정 가문의 대표가 관리로 활동했다.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골품제(骨品制)’라고 일컬어지는 엄격한 신분 질서가 제도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황족의 핏줄이 섞이지 않으면 일정한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치원이었다. 당(唐)에 유학해서 당대로서는 가장 최신의 학문인 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기울어져가는 신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제시했으나, 신분상의 한계로 지금으로 말하면 유리천장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최치원은 모든 관직을 버리고 전국을 유랑하며 신선이 됐다는 설화를 남겼다.

이후 고려 광종(光宗) 대(代)에 처음으로 과거(科擧)가 시행됐다. 이것은 당대로서는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이전 시대인 남북국시대의 통일신라 원성왕 대에 국립학교인 국학(國學)의 학생을 독서 능력에 따라 상중하로 나누고 관리를 선발하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가 시행되긴 했다. 그러나 독서삼품과로 선발하는 관리는 소수였고, 그나마 나중에는 관리 선발에서 당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밀렸다. 그런데 광종 대에 과거가 본격적으로 시행됨으로서 유학을 얼마나 공부했는지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가 제도로 정착됐다. 광종 대에 과거가 시행된 것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담당한 지역 호족(豪族)이 귀족화하면서 왕권을 위협하자, 능력 있는 관리를 선발하고, 이들을 선발한 왕에게 충성을 다하게 만듦으로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실제로 귀족의 권력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고려 내내 호족은 귀족으로 변모했고, 음서(蔭敍)를 비롯해 시험 없이 관리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제도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는 조선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정착됐다. 일부 음서가 남아있긴 했지만, 관리 선발 방식은 과거가 주를 이루었다. 이렇게 관리로 선발된 사람 가운데 문반(文班)과 무반(武班) 이 둘을 합쳐서 ‘양반(兩班)’이라고 불렀고, 이들은 조선의 지배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과거로 관리가 된 사람들은 기득권 세력이 됐다. 특히 붕당(朋黨)을 형성하고 당쟁을 벌이는 등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양반끼리 권력 투쟁을 하는 경우까지 생겼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양인(良人), 즉 중인(中人)이나 농민, 상인, 공인 같은 상민(常民)도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있었으나, 실제로 이들이 지원할 수 있는 분야는 지정돼 있었고, 성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나 여유도 없어서, 성리학 지식의 척도를 측정하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결국, 신분제가 고착되면서 이들은 과거에 지원에서 양반에 진입할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관리의 선발은 ‘시험’에 의해 이뤄졌다. 이로 인해 고시(考試), 공무원 시험 등 직무에 따른 다양한 시험 제도가 생겼고, 이후 사법고시와 외무고시가 폐지되는 등 일부 시험이 사라지고 변형됐다. 결국 소위 ‘능력’에 의한 관리 선발이 정착된 것은 조선시대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삼았던 국가였기 때문에 성리학 지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성리학 지식을 습득했던 양반 가문 이외에는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분, 심지어 성리학에 대한 관점이 다른 사람들을 관리 선발에서 배제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현대 사회에서 ‘능력’은 시험 점수, 그리고 학력과 학벌이 어떻게 되는지 여부와 등치돼 버렸다. 현대 사회에서는 그나마 ‘기회 균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어도 시험 성적만 좋으면 관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과도한 시험 중심의 관리 선발은 국가 운영의 핵심이며 국민 전체의 공복(公僕)이 돼야 하는 응시생에게 암기와 문제풀이를 강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한 관리가 된 이후에는 자신들이 졸업한 대학에 따라 동문끼리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다른 학교 출신과 승진을 놓고 다투거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관리를 무시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시대 당쟁(黨爭)의 모습과 비슷하다.

관료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부정과 부패를 낳고, 개혁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 소위 ‘능력’이 무엇인지부터 재정립하고, 이에 따른 관리 선발 제도를 한 번 더 개혁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학력과 학벌에 따른 차별과 편가르기를 막기 위하여 대학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 변화를 유도해야 된다. 시험에 따른 관리의 선발이 객관적이라는 고정관념과 학력과 학벌에 따른 파벌 형성은 정도는 다르지만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방치할 순 없다. 국민 전체를 아우르며 일해야 되는 관리를 잘 선발하려면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재정립해야 된다. 그리고 학력과 학벌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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