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유몽인의 전반적인 삶에 대해 소개했다. 유몽인은 정치적 대립이 극에 치달았을 때 중간에 서서 죽임에 이르렀다는 평가가 있다. 즉 유몽인이 북인(北人)이면서 북인과 다르고 서인(西人)에 동조하면서 서인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대립은 그 ‘중간’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면서1) 유몽인이 대립의 와중에 중간을 지킨 것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북인이 인목대비의 폐위(廢位)를 주장할 때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던 점,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 복귀하지 않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필자는 반만 동의한다. 유몽인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중간의 위치에 섰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몽인 개인의 모습에 천착한다면, 유몽인은 중간의 위치가 아니라 절개(節槪)를 지킨 것이다. 광해군이 재위(在位)했을 때 유몽인의 붕당(朋黨) 소속은 집권세력이었던 북인 소속이었지만, 북인 다수가 주장했던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했다. 이건창의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유몽인이 정온(鄭蘊)을 도와서 중북(中北)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정온은 정인홍(鄭仁弘)의 제자였으나,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에서 폐모론, 즉 인목대비를 폐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정인홍과의 사제 관계를 끊었던 인물이었다. 예조참판, 대사간 등의 요직을 역임하던 유몽인이 (친모는 아니지만)광해군의 어머니였던 인목대비를 대비 자리에서 폐위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오자 자신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폐모 반대의 편에 섰다. 이것은 당대 조선에서 가장 강조했던 덕목인 효(孝)에 위배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몽인은 광해군 8년(1618) 이조참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재미있는 것은 폐모론을 주도했던 이이첨이 김상헌·장유 등 서인계 인물들과 함께 유몽인을 “문예(文藝)에 매우 뛰어나다”는 이유로 다시 등용할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광해군은 유몽인에게 예문관 제학을 제수했으나, 유몽인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대에 인정받는 문인이면서 관직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던 유몽인의 폐모론 반대가 그저 중간을 지킨 것이라고 평가될 순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의 모습이 단순히 중간을 지킨 것이 아니라 절개를 지킨 것이라는 것은 유몽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유몽인은 자신을 관직에서 쫓아냈던 광해군과 북인 정권이 인조반정으로 무너진 이후에도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면서 『어우야담』의 원본을 집필했다. 그리고 오히려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세력에 의해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반란의 혐의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유몽인은 이전에 폐모론이 등장했을 때처럼 절개를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유몽인이 죽음에 이른 과정이었다.

유몽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하여 유몽인을 고발한 사람, 유몽인을 심문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과정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 유몽인이 사망에 이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는 아직도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다. 『어우집』, 『인조실록(仁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 『우곡일기(愚谷日記)』 등 다양한 기록에 등장한다. 심지어 그에 관한 헌의(獻議), 시장(諡狀), 제문 등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고변과 문초 과정에 대해 한쪽 면만 대변하거나, 사실이 뒤섞인 모습이 많다. 이 자료들을 정리하면 유옹형과 문회, 이우 등이 유몽인을 고변하고 이귀가 유몽인에 대한 공초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공초에서 유몽인이 백이와 방효유를 언급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지를 드러냈다.2)

백이(白夷, ?-?)는 중국에서 충(忠)의 상징으로 꼽히는 전설적인 인물로, 은(殷) 말에 주(周)의 무왕이 은의 주왕을 치려고 했을 때, 아우인 숙제(叔齊)와 함께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수양산으로 들어가 굶어 죽었던 인물이다. 또한 방효유(方孝孺, 1357-1402)는 중국 명(明) 초기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영락제가 건문제를 내몰고 황제가 되어 즉위의 조서를 기초하도록 시켰으나, 이를 거절하여 처형당한 인물이다. 백이와 방효유를 언급함으로써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유몽인이 공초 과정에서 읊었던 「상부사(孀婦詞)」라는 시가 있다. 일흔살의 과부가 꽃같은 남자가 온다고 다시 결혼할 순 없다는 내용이다. 자신을 늙은 홀어미에 비유하고, 좋은 사내를 인조에 빗대어 자신은 광해군에 대한 절개를 지키겠다는 선언이었다. 「상부사」를 읊은 것 때문에 온건파인 이원익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의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약 유몽인을 살려줘서 광해군이 복위할 경우,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서인의 영수인 김류의 강경한 반대 논리와 여기에 설득당한 이원익 등 온건파의 동조로 인해 역모의 죄를 물어서 사형에 처해졌다. 유몽인을 살려줄 경우 반정 공신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유몽인의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이다.3)

유몽인의 행적이 대립하는 두 세력에서 중간의 위치를 고수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몽인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다보니 집권층이 지향하는 정책의 반대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많은 대립이 넘치는 시대다. 대립이 넘치는 시대에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힘 있는 편에 붙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봉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유몽인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1) 김홍백, 「유몽인의 1623년」, 『한국문화』, 제74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203쪽.
2) 김홍백, 「유몽인의 1623년」, 『한국문화』, 제74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195-200쪽.
3) 김홍백, 「유몽인의 1623년」, 『한국문화』, 제74집,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201-203쪽.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