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회차에서 성리학자로서의 서경덕의 면모를 소개했다. 서경덕은 당대에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오고 갔던 성리학의 우주관인 이기론(理氣論)과 관련한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유학(儒學)이 최상의 도라는 입장도 피력했다. 그런데, 이러한 성리학자로서의 면모와 다른, 서경덕의 도사로서의 면모도 많이 보인다. 우선, 일화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서경덕이 지리산 유람을 갔을 때다. 최상봉에 오르려고 새벽에 점을 치고선 시종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인(異人)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중략)- 산을 올라 꼭대기에 다다라서는 소나무에 기대 돌 위에 걸터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 사나이가 반공중에 떠 길게 읍하고서 말했다.

“그대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서경덕이 말했다.

“나도 그대가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기(氣)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면 상등으로는 대낮에 하늘로 치솟을 수 있고, 중등으로는 우주 끝까지 맘대로 갈 수 있으며, 하등으로는 천 년 동안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 노닐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선이 되는 술법은 비록 전해지는 것이 있다 해도 유학자가 갈 길은 아닙니다. 나는 공자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대의 신묘한 비법이 배울만한 것이기는 하나 나는 원치 않습니다.”

선인이 웃으며 말했다.

“도(道)가 다르니 함께할 수 없군요. 나 또한 그대의 고고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날 시종들은 아무도 선인을 보지 못했다. 선생이 혼자 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하니 모두들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이윽고 선생이 손을 드니 선인(仙人)은 번개처럼 사라졌다. 선인은 날개옷을 입었고, 양팔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으며, 나이는 서른 남짓 되어보였다고 한다. 선생이 그 때의 일을 남에게는 말한 적이 없었다.-(후략)-1)

위의 일화를 살펴보면, 서경덕이 “점을 친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점”의 경우 유교 경전인 『주역(周易)』을 통한 점치기도 가능하기 때문에 유학자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또한, “나는 공자를 따른 사람”이라고 단언하는 모습 역시 서경덕이 자신을 유학자로 규정짓는 모습이다. 그런데, 선인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거나, 혼자 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한 모습, 누군가가 올줄 알았다는 모습 등은 도사로서의 모습이다. 서경덕 스스로가 유학자임을 고수하는 동시에, 도교의 선인에 대하여 열린 자세를 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서경덕의 도사로서의 면모가 돋보이는 다른 일화는 전우치와의 도술 대결이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서경덕은 후대에는 도사 이미지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다. 전우치 설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 민담 소설이나 기담(奇談)에 노장사상이나 선술(仙術)의 대가로 엄청난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도사로 자주 등장한다. 설화 『전우치전』에서는 도술만 믿고 각종 사고를 치고 다니던 전우치를 굴복시켜서 선계로 데려간다거나, 도술 대결 이후 전우치가 서경덕의 가르침을 받는다거나, 산에 들어가 도를 닦는다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전우치가 사고를 치면, 서경덕이 뒷수습을 맡는 구도였다. 『전우치전』의 일부 판본에서 전우치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도술만 믿고, 더 도력이 높은 사람에게 덤비다가 다른 도사들에게 참견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저승에서 온 강림도령에게 제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사실 여부를 떠나 서경덕과 전우치가 사상적으로 서로 통하는 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경덕이 살았던 16세기에는 도가 사상에 심취해 도인(道人)의 기질을 보인 인물이 다수 배출됐다. 소설 속에서 전우치와 도술을 겨루는 서경덕 형제를 비롯해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남사고(南師古, 1509~1571), 정렴(鄭, 1506~1549),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등 도가적 경향을 보인 인물 대부분이 이 시기 사람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들은 학자이면서 동시에 신이한 행적을 보였으며 예언자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경덕의 학풍에 도가적인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해동이적』(海東異蹟)과 같은 자료에도 나타나 있으며, 서경덕의 두 아우인 형덕과 숭덕에게 도가의 이술(異術)이 있었다는 기록이 1648년(인조 26)에 김육(金堉) 등이 편찬한 『송도지』(松都誌)에 전해지고 있어서 서경덕 집안의 분위기가 도술에 상당히 경도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경덕이 도가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또 다른 사례는 서경덕의 제자들이다. 서경덕의 문인 중에는 도가 사상에 심취한 인물이 많았다. 천민 출신의 서기(徐起), 서얼 출신인 박지화(朴枝華)가 그 대표적인 인물로, 한문학 4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은 『택당집(澤堂集)』에서 “박지화는 박학하고 문장에 능했으며 또한 이학(理學)으로 명성이 있었다. 서기는 천인이다. 경학에 밝아 문인들을 가르쳤으며 산수를 좋아하여 명산에 은거하였다. 대개 화담 문하의 제자들은 자못 기이한 것을 좋아하니 세상에서 신선이라 여긴다. 서경덕은 전지지술(前知之術)이 있었으니 화담의 학풍을 배운 자는 대개 이와 같았다”며 화담 문하에 도술적인 분위기가 상당했음을 기록하고 있다.2)

서경덕은 분명 자신의 정체성을 성리학자로 규정지었다. 그런데, 그의 각종 일화들 속에서 서경덕이 가진 도사로서의 면모가 확인된다.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했던 조선시대, 그것도 사림에 의한 통치가 안정기에 접어드는 16세기에 서경덕을 비롯한 도사의 면모를 갖춘 인물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1)홍만종, 『우리 신선을 찾아서』, 돌베개, 2010, 132-133쪽.

2)신병주, 노대환 저,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돌베개, 2005.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