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군사독재 정권과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1952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잠시 청주교구의 보좌신부로 있다가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귀국해 가톨릭대학교, 청주교구, 부산교구 등에 있다가, 1965년 원주교구가 창설되면서, 4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교구장으로 취임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장이 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큰 의미가 있었다. 지학순 주교가 원주교구장이 되었던 1965년은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군사독재 정권이 본격적인 장기집권을 도모하던 시기였다. 반면 가톨릭의 경우 1962년부터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 정교회와의 화해,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 즉 사회적 불의에 대해 가톨릭이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함을 의결한 가톨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지학순 주교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유학하면서 당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보고 배운 것을 원주교구장으로 취임하면서 의욕적으로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지학순 주교가 펼쳤던 것이 바로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원주문화방송 창설과 관련된 것이었다. 원주문화방송은 원주교구가 40%의 지분을 후원하면서 창설됐다. 그러나 창설 이후 원주문화방송은 60%의 지분을 가진 5.16장학회의 부패로 인해 운영이 엉망이 됐다. 특히, 원주문화방송 운영진은 방송장비를 구매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 원주교구에 바가지를 씌웠고, 공금 횡령, 탈세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원주교구가 감사를 요구하자, 5.16장학회은 자기네 지분을 다른 종교에 넘기겠다며 되레 원주교구를 협박했다. 잇따른 부패에 지학순 주교는 5.16장학회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박정희에게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이에 분개한 지학순 주교는 1971년 사회정의 실현과 부정부패 고발을 선언하며 원주문화방송의 운영을 규탄했고, 이것은 한국 천주교가 처음으로 사회 운동에 개입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원주문화방송 관련 투쟁으로 박정희 정권에 그야말로 “제대로 찍힌” 지학순 주교는 정권의 요시찰 인물이 됐다. 그러나 군사정권에 대한 지학순 주교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72년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이사장이 됐고,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맡아 활동하며 유신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박형규, 김지하, 조화순 등 반정부 인사를 자주 원주로 불러 시국을 논의했다. 그리고 지학순은 장일순, 김지하 등을 후원했고, 훗날 이들과 함께 사회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 지학순 주교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50분 지학순 주교는, 4월 22일 출국하여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 주교회의와 필리핀에서 열린 매스컴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뒤 유럽을 순방하고 귀국하던 중 김포공항에서 정체불명의 기관원들에게 강제 연행됐다. 그 이유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과 관련하여 내란을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시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당시 유신정권은 백기완, 장준하 등이 개헌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각계가 광범위한 유신 반대운동에 합류하자,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 이들의 활동자금이 북한에서 유입된 공작금인 양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자 김지하는 조사를 받던 중 그 돈이 지학순에게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자신의 활동이 북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실제로 김지하는 원주 학성동 주교관 뒤편 언덕 위에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지학순 주교의 일을 돕기도 하고 민주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기도 했는데, 주교관에 오며가며 이따금 지학순 주교로부터 돈을 얻어쓰기도 했다.1) 앞에서 언급한 대로 지학순 주교는 당시 민주화 운동을 수행하던 각계각층의 인물을 원주로 초청해 만나고, 그들에게 가끔 용돈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수행하던 활동가들은 사회 활동이나 취업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마저 막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학순 주교가 밥이라도 먹고 다니라고 준 용돈이 반정부단체 자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지학순은 귀국 전에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해 4월 3일 민청학련 관련 활동을 엄단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된 뒤 유신반대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던 학생, 종교인, 학계 인사 등 1,024명이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국가 반란, 공산혁명, 무력혁명을 추구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아 이중 203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국가내란 예비음모,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대량 구속되었던 터였다. 긴급조치 4호는 관련자를 사형까지 처할 수 있도록 규정했기에, 지학순은 고민 끝에 자신이 귀국해서 사실을 밝혀야만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2)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종교인을 인신 구속하는 것 자체는 정권에게는 큰 부담이 된다. 특히, 가톨릭 사제는 한 나라의 국민이자 로마 가톨릭의 신부이기도 하고, 교황청과 로마 가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국제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크다. 이로 인해 세속 정부가 신부를 인신 구속하거나, 신부가 의문의 죽임을 당할 경우 국제적으로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학순 주교가 군사독재정부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다시 지학순 주교의 체포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지학순 주교가 비행기에서 내린 사실은 확인했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해지자 천주교 측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원주교구로부터 지학순 주교의 실종 사실을 보고받은 천주교 측은 빠르게 대응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주교단 상임위원회를 개최했고,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지학순 주교의 연행 사실을 듣게 됐다. 이에 김수환 추기경은 중앙정보부에서 지학순 주교와 면담했고, 교황청 대사도 지학순 주교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천주교 측은 7월 10일 오전 11시 주교회의를 개최했고, 이어 오후 6시에 명동성당에서 시국 미사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청와대 측에서 갑작스럽게 김수환 추기경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당일 지학순 주교는 석방됐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으니, 이러한 지학순 주교의 모습은 그 유명한 ‘양심선언’으로 이어졌다.


1) 「[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경향신문』, 2003년 06월 15일자.
2) 「[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경향신문』, 2003년 06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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