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지함의 호인 “토정(土亭)”이 비결(秘決)에 관한 책, 즉 예언서인 『토정비결(土亭秘訣)』에 가차됐고, 그의 생애 자체에도 신비한 일이 많았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지함은 단학(丹學), 즉, 수련과 단약 섭취, 양생(養生)을 중요하게 여기는 도교 일파의 중시조(中始祖)로 평가받는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성리학자의 면모도 못지않게 많이 보인다.

이지함이 가진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는 그의 가족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지함의 7대조는 고려 말의 저명한 성리학자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다. 이색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1337-1392), 야은 길재(野隱 吉再, 1353-1419) 등과 함께 고려 말 삼은(三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대성리학자였다. 이지함의 아버지 이치(李穉)는 의금부 도사, 수원 판관 등을 두루 지낸 관료였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 지식을 평가해 관리를 뽑았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지함의 아버지 역시 꽤 높은 성리학 지식을 갖췄을 것으로 보인다.1)

아울러, 이지함에게 학문을 가르친 이지함의 형 이지번(李之蕃)의 아들은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9-1609)였다. 이산해는 명종 15년(1560) 명종이 시행한 알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을 정도로 학문적 수준이 높고, 훗날 사색당파 중 북인(北人)의 영수가 됐다. 고려 대부터 성리학으로 유명했던 가문의 사람으로, 이지함 역시 가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지함은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다는 것도 이지함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알 수 있는 점이다. 이지함이 젊었을 때 해변에 어버이를 장사지냈는데, 조수가 조금씩 가까이 들어오자 먼 장래에 물이 반드시 무덤을 침해하리라 판단했다. 이에 이지함은 제방을 쌓아 막으려고 했는데, 수없이 돈이 들었으나 스스로 돈을 벌어서 지속적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해구(海口)가 깊고 넓어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에 이지함은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늘에 달렸으나,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위해 재난을 막는 계획은 게을리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뜻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울러 이지함은 조카인 이산해를 가르침으로써 자신에게 학문을 가르쳐준 형의 은혜를 갚았다. 자식을 거두어 기르기도 벅찬 상황에서 조카를 가르쳐서 형의 은혜를 갚을 정도로 이지함의 형제에 대한 우애도 남달랐다는 의미다. 효(孝)나 동기간의 우애가 사상에 상관없이 인간에게 중요한 덕목이긴 했지만,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한 조선 시대에는 특별히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이지함은 효성이 깊고 우애가 남달랐다.2)

이지함의 학맥에서도 이지함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지함의 학맥은 서경덕과 같은 성리학 주류에서 조금 벗어난 사람과 이어지긴 한다. 그러나, 이지함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등과 같은 대성리학자들과 나란히 분류되는 사례도 있다.

선생이 교유한 사람은 조남명(曺南冥-남명 조식을 뜻함), 서화담(徐花潭-서경덕을 말함), 이토정(李土亭-토정 이지함을 말함) 같은 이들로서 다 세상에 드문 명현(名賢)들이었고, 남명과는 더욱 막역(莫逆)한 사이였다.3)

위의 인용문은 대곡 성운(大谷 成運)의 묘비명이다. 여기에서 이지함이 남명학파의 거두 조식과 함께 명현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묘비명이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1607-1689)의 저서에 등장한다는 점은 이지함이 후대까지 성리학자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앞에서 언급한 중봉 조헌(重峯 趙憲, 1544∼1592)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이가 세 사람이온데, 이지함(李之菡)·이이(李珥)·성혼(成渾)입니다. 세 사람의 성덕(成德)은 비록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지극한 행실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은 모두가 동일합니다.4)

조헌은 당대의 기개있는 성리학자이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왜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했던 사람이다. 이런 인물이 이지함을 높게 평가했다는 점은 같은 학맥에 있던 사람들이 이지함을 성리학자로서 높게 평가했음을 방증한다.

실제 이지함은 율곡 이이와 많이 교류했는데, 이이와의 일화에서도 이지함의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이가 선조에게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는데, 선조가 받아들이지 않자 이것에 대해 탄식했다. 그러자 이지함은 웃으며, “공자께서 병을 핑계로 유비(孺悲)를 보지 않았고, 맹자가 병을 핑계로 제왕(齊王)이 부르는데도 가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의 선비들이 없는 병도 있다 하니, 병을 핑계로 사람을 속이는 것은 남의 집의 게으른 종과 머슴들이 하는 짓인데 선비로서 차마 이런 짓을 하면서 공자·맹자가 하던 일이라 하니, 어찌 성현이 하신 일이 후폐가 되지 않았는가. 내가 어찌 장자(莊子)의 말을 하리오.”라고 말했다. 이지함의 해학이 돋보이는 모습인 동시에, 공자와 맹자의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분류하는 장자의 말을 피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지함의 고전에 대한 지식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5)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지함은 “신비로운” 사람이란 이미지가 각인돼 있다. 그러나 이지함은 그 기이한 행적과 함께 당대에 높이 평가받는 성리학자의 모습도 갖고 있었다.


1) 표정훈, 「이지함-민초들의 삶 한가운데 살았던 조선의 선각자」,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2) 표정훈, 「이지함-민초들의 삶 한가운데 살았던 조선의 선각자」,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3) 송시열, 「대곡(大谷) 성 선생(成先生) 묘갈명」, 『송자대전(宋子大全)』.

4) 송시열, 「토정선생유고(土亭先生遺稿)」, 『송자대전(宋子大全)』.

5) 이이, 「석담일기」, 하권, 『대동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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