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석방된 지학순 주교는 명동의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주거가 제한됐다. 이후 지학순 주교는 동생의 집으로 옮겨졌다가 신병을 이유로 다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졌다. 지학순 주교가 로마 유학 당시 당뇨병을 얻었고, 이후 지학순 주교는 당뇨병으로 생애 내내 고생했다.

지학순이 중정에서 나온 뒤 “그럼 그렇지, 누가 감히 천주교회를 건드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학순은 병원에 있으면서 계속 고심하다가, 7월 16일 김지하의 어머니와 아내를 면담하고 나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의 자식과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죄목으로 함께 감옥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독재 권력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굽히지 않은 것이다. 천주교 신부들 중 지학순 주교를 말리는 사람도 있었으나, 지학순 주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74년 7월 23일 아침, 지학순 주교는 명동 성모병원 정문에서 미리 몰려와 있었던 내외신 기자를 앞에 두고 양심 선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1)

인은 1974년 7월 23일 오전, 형사피고인으로 소위 비상군법회의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둔다. 소위 비상군법회의에서 본인에 대한 어떠한 절차가 진행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72년 10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이 최소한도의 양보도 할 수 없는 기본 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제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하나다. 이것들은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에 대한 청원이나 건의를 금지하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다는 것의 보도까지도 금지,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의사조차 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금지를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식이다.

4. 본인이 위반했다고 그들이 기소한 또 하나의 죄목인 내란선동은 본인이 그리스도교 정신을 올바로 가졌기 때문에 억압받는 청년에게 그리스도교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사실에 대하여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

본인을 재판하겠다는 소위 비상군법회의라는 것은 그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할 수 없는 꼭두각시다. 저들은 지금 수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데 있어서 비상군법회의라 불리는 이 형사절차의 꼭두각시 이름을 빌리고 싶은 것이다. 울부짖는 피고인들의 목소리가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 동안 당국에 의해 통제된 신문들·방송들·TV들은 지금도 계속 증거가 희박한 검찰관의 주장만을 사실처럼 보도하고 있다.

양심선언에서 지학순 주교는 자신의 체포와 재판 출두 등이 모두 독재정권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유신헌법, 긴급조치 등의 반헌법성과 반민주성을 지적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반민주 독재정권이라는 뜻도 밝혔다. 아울러, 자신에 대한 혐의와 체포 등도 모두 부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

지학순 주교에게 지목된 혐의의 부당함은 지학순 주교의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지학순 주교는 해방 이후 한반도 북쪽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자, 목숨을 걸고 월남을 시도했다가 옥살이를 한 경험도 있었다. 월남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제2사단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다. 이러한 사람에게 소위 “빨갱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학순 주교 역시 다른 신부들에게 양심선언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내가 젊은이들에게서 돈을 대서 내란을 선동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빨갱이입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심선언을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2)라는 뜻을 밝혔다.

지학순 주교는 양심선언 직후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주교와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오후 12시 10분, 곧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됐다.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민주화의 열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7월 25일 명동 성당에서는 벨기에와 프랑스 대사까지 참석한 가운데 시국 미사가 열렸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원주교구 신부들을 잇달아 구속했고, 지학순 주교는 8월 12일 3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이후 9월 23일, 원주에서 성직자 300여명이 참여한 세미나가 개최됐고, 사제모임의 결성과 명칭에 합의했으니, 이것이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3) 그리고 전국민적 저항 앞에서 박정희는 특별담화를 통해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과 대통령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야인사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은 이것을 정략적 요식 행위로 규정하고 국민투표 거부 운동을 전개했으며, 민주회복국민회의는 지학순 주교가 모범을 보인 양심선언 운동을 제안했다. 그리고 부정선거였던 문제의 국민투표가 진행된 뒤 지학순 주교는 구속집행정지 조치로 1976년 2월 17일에 출감했다. 그리고, 2020년 9월 지학순 주교의 긴급조치 위반은 재심 결과 무죄로 판결됐다.


1) 「[실록 민주화 운동]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경향신문』, 2003년 6월 15일자.

2) 「유신정권과 지학순 주교 사건(3)」, 『가톨릭평화신문』, 제759호, 2004년 2월 8일자.

3) 한상봉, 「지학순 주교 구속으로 정의구현사제단 발족」,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0년 9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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