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난 10월 19일자 칼럼에서 전우치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 가운데 “전우치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 형제와 도술 대결에서 패배한 뒤 서경덕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이것은 소설인 『전우치전』에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전우치도, 서경덕도 실존 인물이고, 도술 대결이 사실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만났거나, 매우 가까운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서경덕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선 서경덕은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학문을 닦았다. 서경덕은 어릴 때부터 생명 현상의 이치와 우주의 이치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이 남달랐다. 이로 인해 서경덕은 자기 자신의 사색과 궁리의 힘을 스스로 깨닫는 것에 힘을 쏟았다.1) 그가 나물을 캐다가 새끼 새가 처음에는 날지 못하다가 조금식 날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그 이치를 생각하느라 나물을 제대로 캐지 못했다는 일화, 『대학(大學)』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대목을 보고서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서 사물의 이름을 벽에 써 붙이고, 그 이치를 계속 생각했다는 일화, 20세 때 먹고 자는 것도 잊은 채 사색에 잠기는 습관이 생겨서 3년 동안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경덕은 세상의 이치에 대해 누군가가 가르쳐 준 것을 좇지 않고, 스스로가 궁리하고 탐구했다.

다음으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지 않고 처사(處士), 즉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뭍여 사는 선비의 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서경덕은 사실상 독학으로 일관했고, 중종 14년(1519) 현량과에 천거됐지만 사양했으며, 중종 26년(1531)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생원과에 합격했지만, 대과(大科)에는 끝내 응시하지 않았고, 말년에 능참봉 벼슬을 받았지만, 곧 사직했다. 즉 그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는 처사의 길로 일관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모습을 보인 것은 그의 학문세계에서 엿볼 수 있는 자유분방함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9세였던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시작으로 중종 14년(151) 기묘사화(己卯士禍)까지 숱한 권력투쟁이 있었다.2) 그런데 사화는 권력투쟁이라기보다는 훈구(勳舊) 세력에 의한 사림(士林)의 탄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서경덕은 다른 성리학자들이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처사의 기질을 더욱 고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서경덕의 모습은 다른 성리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서경덕의 학문에 대해 “병통(病痛-병들음)이 없는 부분이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주자보다 더 주자답고자 노력했던 이황에게 스스로 깨우침을 추구했던 서경덕의 학문 방향은 주자의 길에서 벗어났던 것이었다. 반면, 서경덕에게는 학문적 정통성이나 전통적 권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은 이치가 중요했다. 그리고 유교 경서에 주석을 추가하는 것보다 만물의 이치에 직접 접근해서 궁리하는 것을 추구했다. 이것은 서경덕의 독립성과 자율성, 그리고 주체성을 중요시 여기는 학문적 스타일을 보여준다.3)

그러나 서경덕은 스스로가 성리학자임을 자부했고, 실제로 성리학에 중요한 궤적을 남겼던 사람이다. 서경덕은 “천하에 세 가지 도(道)가 있는데, 유학이 최상이요, 불도(佛道)가 다음이요, 선도(仙道)가 또 그 다음이며, 배움의 순서 또한 그러하다”4)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서경덕은 당시 주된 논쟁의 대상이었던 이(理)와 기(氣)의 관계에 대해 이와 기가 별도로 존재하면서 이가 기를 주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 스스로가 기의 작용을 바르게 이끄는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작용 원리이자 이치라고 보았다. 서경덕의 이러한 입장을 ‘기(氣)일원론’, ‘유기론(唯氣論)’, ‘주기론(主氣論)’이라고 일컫는다.5) 그리고 이러한 그의 주장에 대해 이황,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등이 다양한 평가를 남겼다.

성리학자로서 서경덕의 모습은 전형적인 성리학자의 모습이 아니기에 평가 절하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대중에게 기억되는 서경덕의 모습은 앞에서 언급한 전우치와의 도술대결, 당대의 기생 황진이(黃眞伊, ?~?)와의 관계 등 도가적 풍모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지속적으로 서경덕의 성리학자로서의 독특함과 가치를 재평가해왔다. 그리고 서경덕의 기이한 행적 역시 같은 선상에서 재평가 될 필요가 있다. 지금이 조선시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향후 본 지면을 통해 서경덕의 기이한 행적의 일부를 소개할 예정이다.


1) 표정훈, 「서경덕-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處士)」, 『인물한국사』, 2012. 네이버 지식백과.

2) 표정훈, 「서경덕-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處士)」, 『인물한국사』, 2012. 네이버 지식백과.

3) 표정훈, 「서경덕-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處士)」, 『인물한국사』, 2012. 네이버 지식백과.

4) 홍만종, 『우리 신선을 찾아서』, 돌베개, 2010, 138쪽.

5) 표정훈, 「서경덕-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處士)」, 『인물한국사』, 2012.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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