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아산현감 이지함(李之菡)이 사망하였다. -(중략)- 하루는 그 부친에게 고하기를,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가솔들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이지함의 장인) 집에 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명함과 부정함, 길함과 흉함을 이따금 먼저 알아맞추곤 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맞추는지 아무도 몰랐다. -(중략)-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중략)- 어떤 때는 천 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으며, -(중략)- 이지함은 일찍이 용산(龍山)의 마포항 입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그 아래에는 굴을 만들고 위에는 정사(亭舍)를 지어 자호를 토정(土亭)이라 하였다. 그 뒤에 비록 큰 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다.1)

지난 회차 칼럼에서 필자는 이지함과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상관관계와 『토정비결』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관하여 소개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쓴 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지함이 만든 정자의 이름인 “토정(土亭)”이라는 이름이 책의 제목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이지함이 살아생전에 신기한 모습을 많이 보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실제로 이지함에 대한 여러 기록에서 이지함이 남긴 다양한 이적(異蹟)들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도 이지함은 처가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을 예언하였고, 사람의 길흉이나 됨됨이를 잘 알아맞춘다는 평가가 확인된다. 또한 오래 잘 걷는다든지, 더운 여름에도 물을 마시지 않는다는 등 흡사 수행을 많이 한 도사의 모습도 묘사됐다. 그리고, 그가 지은 정자인 토정이 홍수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이지함의 도사에 가까운 모습은 여러 자료에서 발견되는데, 이지함이 능히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목마름을 참았고, 혹은 겨울날 벌거벗은 몸을 펼쳐지는 바람 가운데에 놓거나, 혹은 10일간 음식을 끊었는데 병이 없었다2)는 묘사가 등장한다. 신병주는 이것을 근거로 이지함이 도가의 양생법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3) 심지어 이지함이 보령에서 서울까지 가는데 1-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백성들은 그가 축지법(縮地法)을 쓴다고 알았다.4)

위에서 언급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이 이지함의 졸기(卒記), 즉 특정인이 사망했을 때 그의 행적을 기록한 글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이지함의 모습과 행적이 상당히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처갓집에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고 가솔들을 피신시킨 것은 다른 기록에도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산수(毛山守) 성랑(星琅)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하루는 자기 형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가를 관찰하니 길한 기운이 없습니다. 내가 피해 가지 않으면 화가 장차 나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고, 처자를 데리고 서쪽으로 갔는데 다음 해에 화가 일어났다.5)

이 외에도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태어났을 때 이지함은 이산해의 울음소리를 듣고 ‘이 아기가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라면서 무척 기특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 이지함의 예지력을 알 수 있는 일화다. 이산해는 이지함의 조카로, 훗날 명종 대에 급제해서 처음 관직에 입문했고, 선조 대에 관직을 두루 역임한 뒤 영의정에까지 이르렀고, 지금까지 당대 유명 관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지함은 오래 수행한 도사의 모습이나, 사람의 앞날에 대해 잘 맞출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뛰어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부모의 묘를 이장할 때 했던 이지함의 예언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의 부모를 장사할 때에 장사할 산지(山地)를 살펴보니 자손에 정승이 두 사람이나 나겠다. 그러나 그 막내아들에게는 불길하다. 막내아들은 즉 그 자신이다. 그러나 선생은 강력히 주장하여 그 곳에 장사지냈다. 뒤에 산해(山海)와 산보(山甫)는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나, 선생의 자손은 요사(夭死)하여 드러나지 못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정(思亭, 이지함의 형)이 토정에게 말하기를 “이 산의 오른편이 부족(不足)하여 네가 그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이것이 흠이다.”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의 자손이 가까이는 비록 떨어질지라도 5, 6대 뒤에 이르면 반드시 수도 많아지고 또한 영직(榮職)으로 드러날 응보(應報)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7)

그런데 이 일화에 대해서는 다른 내용의 기록도 등장한다.

그 조부모를 장사지낼 때 지관(地官)이 말하기를, “자손에 두 명의 정승이 날 것이지만, 막내 아들은 불길하다.” 하였는데, 공이 억지로 그 곳에 장사지내면서 그 재해를 스스로 당하겠다 하더니,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석담일기』8)

앞의 연구 결과와 달리 위의 기록에서는 이지함이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아닌, 조부모의 장례 때 묘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이지함이 터를 잡은 것이 아닌 지관(地官)이 조언을 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터를 잡은 결과는 비슷했다.

이 외에도 이지함이 이인(異人), 즉 신통한 재주를 가진 비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 결과 이지함은 최치원(崔致遠), 정염(鄭), 권극중(權克中),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한국 단학(丹學)의 중시조(中始祖)로 평가9)받고 있다.


1) 『선조수정실록』, 제12권, 선조 11년(1578) 7월 1일 경술 2번째 기사.

2) 이긍익, 선조조고사본말, 연려실기술, 18.

3) 신병주,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141-142쪽.

4) 권인호, 「토정 이지함의 출처의리와 실학사상 연구」, 『한중철학』, 제4집, 한중철학회, 124쪽.

5) 이긍익,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17,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6) 신병주,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49.

7)유사(遺事), 토정집(土亭集).

8) 이긍익,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17,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9)이규경,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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