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5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한 청년이 평화시장의 남쪽, 동화시장 계단에서 분신했다. 그의 손에는 <근로기준법>이 들려 있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전태일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전태일 열사의 아버지는 봉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몇 차례 사업을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이로 인해 전태일 열사와 그의 세 동생은 제대로 공부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고, 결국 가난에서 벗어나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로 상경해서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서울 생활은 빈곤에서의 탈출을 보장하지 않았다. 청계천의 봉제공장에서 받은 임금은 약 1200원이었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단칸방의 월세는 약 3600원 정도였다. 이로 인해 전태일 열사는 봉제공장에서의 일 외에 새벽과 밤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하던 중 봉제공장의 여성 보조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원단과 섬유에서 나오는 먼지를 마시면서 쉬는 시간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일을 했다. 그 결과 폐 질환과 하혈 등 각종 병에 시달렸다. 산업재해였다. 그러나 그들은 산업재해에 따른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휴무일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다. 심지어 휴무일에 일을 해도 추가 수당도 보장받지 못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 건강 상태 조사를 위한 설문을 시도했지만, 설문조차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평화시장에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서 직장에서 해고됐고, 한동안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심지어 전태일 열사의 활동을 곱지 않게 본 업주들과 제대로 된 감독을 하지 않는 감독관청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 전태일 열사와 그의 동료들을 공산주의자, 소요 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방관했다. 그 결과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

전태일 열사의 생애와 분신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드러난다. 첫째, 엘리트들의 엘리트주의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의 짧은 학력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국한혼용체와 어려운 용어들 때문이었다. 이때 전태일 열사가 “대학을 나왔더라면, 또는 대학 다니는 친구라도 있었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한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전태일 열사 생존 당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고, 대학생은 매우 희소한 존재였다. 아울러 당시 대학 진학은 성공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학생들은 정치의 민주화 등 거시적인 일에 집중했지, 그들의 눈에 ‘천해 보이는’ 노동자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대학생들이 노동 현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둘째, 열악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노동조건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열악한 근로 환경 속에서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받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태일은 월세는커녕 생활비로도 빠듯한 금액의 임금을 받았다. 또한 어린 노동자들이 산업 현장에 떠밀리듯 투입됐다. 근로 조건도 열악했다. 전태일이 분신의 순간에 외쳤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말은 허울뿐인 근로기준법, 기계 취급받던 노동자의 현실, 지켜지지 않았던 일요일 휴무를 방증한다.

셋째, 박정희 정권 당시의 경제 발전의 이면에 있는 각종 모순들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배움의 기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기계처럼 일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용자들의 ‘너희가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사용자들은 많은 구직자들 덕분에 근로기준법과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치거나 아픈 사람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음으로 양으로 저임금 기조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 정권 당시 독재 정부는 쌀값을 지속적으로 낮게 책정했다. 이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진 농민들은 농업을 포기하고 대규모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배움도 짧고, 기술도 없는 사람들에게 높은 임금을 줄 이유도, 좋은 노동 환경을 제공할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2020년의 노동 현실을 생각해보았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지 50년이 지났다. 지금의 노동조건은 얼마나 좋아졌을까? 주 5일제, 최저임금 상승, 주 52시간 노동 등 겉으로 보기에는 노동조건이 좋아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노동자들은 화력발전소에서, 제철소에서 희생당하고 있다. 택배 노동자들은 고통을 호소하면서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더 복잡하고 촘촘해진 사회적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들에게 더 꼼꼼한 고통이 가해지고 있다.

전태일을 우리에게 온 예수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태일과 예수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예수도 아직 재림하지 않았고, 전태일의 정신도 우리 사회에 재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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