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서 재단사가 된 청년 노동자 ‘전태일’
노동자·자본가 간 불평등한 계급 구조에 눈떠
근로기준법 접한 후 노동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전태일 분신 항거, 한국 노동운동 역사에 변곡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1965년 17세의 나이로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재단·봉제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제대로 된 일자리가 생겼다는 설렘도 잠시, 그는 평화시장에서 참혹하고 끔찍한 노동현실의 참상에 눈을 떴다. 그는 노동환경 개선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다 1970년 11월 13일, 만 22세 나이에 분신 항거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후 5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수많은 노동자들은 전태일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노동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보장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투데이신문> 전태일 분신항거 49주기를 맞아 1960·7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전태일의 삶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노동문제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짚어봤다. 3편에서는 평범한 청년이었던 전태일이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을 자처하며 분신항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죽음을 통해 그가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화시장 앞에 세워진 전태일 동상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전소영 기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는 갑작스럽게 불길이 치솟았다. 한 20대 청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의 이름은 ‘전태일’. 평범한 20대 청년이자, 평범한 노동자였다. 전태일은 육신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고 이 말들을 외쳤다. 

전태일의 죽음은 ‘인간선언’이라고 불린다. 전태일의 삶을 기록한 책 <전태일 평전> 저자 조영래 변호사는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 보고 하루 열여섯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죽었다”고 했다.

소년, 전태일

전태일은 1948년 8월 26일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의 사이에서 2남 2녀 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태일의 아버지는 피복제조업 분야에서 봉제 노동자로 일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집에 미싱을 두고 손수 일을 했다. 피복제조업 특성상 투기성이 높았고 전태일의 아버지는 사업에 거듭 실패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폭언과 매질을 일삼았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고난이 한데 얽혀 쳇바퀴처럼 돌았다.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전태일은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했다. 12살의 나이로 생계 전선에 뛰어든 그는 술로 허송세월을 보내는 아버지와 그 충격으로 몸져누운 어머니를 대신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신문팔이, 삼발이 판매, 구두닦이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가 17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위해 서울로 떠났다. 전태일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막냇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상경했다. 노숙생활을 이어가며 구두를 닦고 신문을 팔던 그는 이듬해 평화시장 학생복 맞춤집 ‘삼일사’ 구인광고를 우연히 보게 된다. 그리고 미싱 시다로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었지만, 상황은 되레 열악했다. 생활은 더욱 궁핍했고 노동은 더 고됐다. 그러나 언젠가 기술을 배울 땐 지금의 삶보단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한 달 월급은 1500원이었다. 하루에 하숙비가 120원인데 일당 50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여관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휴지를 팔아서 보충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기술을 배운다는 희망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불효자식의 고집 때문에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막냇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피곤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 전태일 평전 p.87(전태일 수기, 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풀빵 나눔 시절 전태일(가운데) <사진 제공 = 전태일기념관>

청년, 전태일

1966년 전태일은 시다 꼬리표를 떼고 ‘통일사’ 미싱사로 새롭게 일을 시작했다. 전태일은 그곳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구조에 눈을 떴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하루 평균 15시간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한국통계연감 ‘국가별 연간 1인당 노동시간’에 따르면 그 시절 한국의 노동시간은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월등히 길다.

한국은 △1965년 2970시간 △1970년 2723시간인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은 각각 △1983시간 △1905시간, 프랑스는 △2093시간 △1948시간, 캐나다는 △2016시간 △1925시간이었다.

작업환경은 열악 그 자체였다. 노동자들은 햇볕 한줄기 들지 않고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150cm 남짓인 공간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먼지를 마셔가며 오로지 일에만 열중했다. 작업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영양실조나 만성 소화불량, 호흡기질환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기 일쑤였지만 건강검진은커녕 휴가조차도 없었고 되레 병세가 악화되면 해고되는 일도 빈번했다.

임금은 업주가 정한 대로, 주는 대로 받는 것이 관례였다. 비수기에는 이마저도 할 수 없는 실업자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정직한 재단사가 돼 나약한 직공들이 자신의 노동력에 걸맞은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그해 추석 무렵 ‘한미사’에 재단보조로 취직하고 이듬해 2월 재단사가 됐다.

한 가지 억울하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 작업이 힘들게 작업시간이 길고 힘에 겨운 야간작업을 시키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는 절대적인 책임자인 재단사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 하기 싫은 야간작업을 하고 나면 그 다음날은 평일보다 작업량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공장 주인보다 경제적으로 약자인 우리 직공들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직공들은 어린아이들 바지를 만들어 내는 매수에 따라 월불 계산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 미싱사들의 다 같은 불만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1매당 얼마를 준다는 확고한 결정을 짓지 아니하고 대목 일이 끝난 다음에야 1매당 얼마를 지불한다는 것을 주인이 재단사와 적당히 타협해서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기 때문에 일이 바빠 직공들이 매수를 많이 올려도 겨우 평균 월급보다 조금 나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 나는 이런 계통에서 미싱사로서는 처음 당하는 일이었지만 너무 억울했다. 아무리 열심히 밤잠 못 자고 많은 양의 바지를 만들어봐야, 피땀 흘린 대가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 전태일 평전 p.105(전태일이 평화시장 노동조건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한 최초의 기록, 조영래 지음. 아름다운전태일 펴냄)

한미사 공장안에서 전태일(오른쪽)과 동료들 <사진 제공 = 전태일기념관>

노동운동가, 전태일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힘썼던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근로시간은 휴게시간을 제외한 1일 8시간, 주 48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단 당사자 간 합의에 따라 주 60시간까지 가능하다는 ‘근로기준법 제42조’, 사용자는 근로자에게 1주일에 평균 1회 이상 유급휴일을 줘야 한다는 ‘근로기준법 제45조’. 이 밖에도 여공들의 유급 생리휴가, 건강진단, 재해보상, 여자 및 18세 미만 근로자 야간작업 금지 등 규정은 전태일에게 큰 깨우침을 줬다.

전태일은 이런 규정들을 두고도 주인의 횡포에 휘둘려 살아온 자신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바보’라고 책망하는 한편, 노동 착취에 저항하고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를 쟁취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했고, 1968년 재단사 10명과 함께 ‘바보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근로조건 개선을 명목으로 모인 이들은 우선 노동자들에게 설문지를 배포해 근로실태 조사에 나섰다. 전태일은 시청과 노동청에 설문조사를 알려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어느 쪽에서도 적절한 조치는 없었다. 그들은 평화시장의 실정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듯했다.

전태일은 바보회 결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고됐다. 게다가 평화시장 내 어느 업체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평화시장이 아닌 곳에서 재단, 미싱은 물론, 시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바보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매일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실태에 관한 자료들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바보회는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됐다. 평화시장 내 바보회 활동에 대해 알려지면서 회원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결국 바보회를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듬해 겨울 무렵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바보회는 ‘삼동회’로 바꿔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노동실태를 세상에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시청이나 노동청은 그들의 문제를 외면할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삼동회는 방송국, 신문사도 함께 찾아다녔다. 삼동회의 이름으로 다시 노동실태 조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 개선 진정서’를 만들었다. 10월 6일, 삼동회는 이를 노동청에 제출했다.

다음날 평화시장의 이야기가 경향신문에 실렸다. 보도 이후 평화시장주식회사에서는 진정서의 출처를 찾아 헤맸다. 삼동회는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여성 생리휴가 보장, 노조결성 지원 등 요구조건 8개가 적힌 건의서를 들고 회사 사무실을 찾았다.

10월 중순경 노동청 근로기준국장이 삼동회 회원들에게 만남을 요청했고 ‘회원들이 모두 취업을 하면 일주일 안에 근로조건을 모두 개선시켜준다’고 제안했고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취직을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삼동회는 20일 노동청 정문 앞 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당국에까지 흘러들어갔고 근로감독관이 전태일을 찾아 근로조건 개선을 이행할 테니 며칠만 참아줄 것을 요청했다. 전태일은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기다려보기로 하고 시위를 보류했다. 그러나 근로감독관은 국정감사가 끝나자 태도를 바꿔 노동운동을 멈추라며 그를 회유했다.

격분한 삼동회 회원들은 24일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에서 시위를 감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날도 시위는 무산됐다. 평화시장에 파견돼 있던 정보계 형사들로 인해 시위가 탄로 난 것이다. 사측은 11월 7일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짜에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낮에는 시다, 밤에는 껌팔이, 새벽에는 구두닦이 시절 전태일 <사진 제공 = 전태일기념관>
낮에는 시다, 밤에는 껌팔이, 새벽에는 구두닦이 시절 전태일 <사진 제공 = 전태일기념관>

전태일 결단을 내렸다. 그는 회원들을 모아 13일 오후 1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제안했다. 화형식 당일 평화시장의 분위기는 삼엄했다. 약속시간이 되자 회원들은 준비한 피켓을 펼쳐들었고 이를 제지하려는 형사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이때 전태일은 회원들을 집회가 예정된 곳으로 먼저 보냈다.

10분 뒤 가슴에 근로기준법 책을 품은 전태일이 나타났다. 이내 그의 옷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화마에 갇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전태일은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전태일은 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던 평화시장에서 노동자로서 삶을 끝냈다. 그는 최소한의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혹사당하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삶이 자신의 희생으로 나아질 수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친우(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 전태일의 유서 전문

그는 자신의 죽음이 그저 유난스럽게 굴던 일개 노동자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길 바랐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오롯이 노동자들의 걱정뿐이었다. 자신 한 사람의 희생으로 만인의 노동자를 살려내길 바랐던 그의 바람은 통했다. 전태일,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을 한데 모았고, 한국의 노동운동 역사에 변곡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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