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이하 재해위)가 출범했고, 제2차 원주그룹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생명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원주와 인근 지역에서 협동조합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재해위와 원주그룹은 영서 지역의 수해복구, 빈곤층에 대한 구호와 빈곤 극복을 위한 협동조합 설립을 비롯한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는데, 지학순 주교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펼쳐진 수해복구와 빈곤층 구제활동, 협동조합 활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위축됐다.

지학순 주교와 천주교 원주교구의 활동이 위축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박정희 정권의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 현상 등 당시 사회의 분위기였다. 이촌향도 현상은 지학순 주교의 여러 사업 중 부락개발사업에 영향을 끼쳤다. 부락개발사업은 농촌부락마다 작목반과 부락총회를 구성하고, 농민 주도의 부락개발운동을 전개하도록 유도하는 사업이었다. 특히, 정부 정책으로 피폐해졌던 농민과 광부들이 직접 신협과 소비조합을 설립하고 운영하도록 유도하면서 고리채와 중간 상인 횡포 등의 극복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사업 대상 부락 내 농촌지도자들의 이주가 증가했고, 부락 내에서 협동활동을 주도했던 농민지도자들이 부족하게 되면서 작목반과 부락총회 활동이 정체됐다. 그 결과 1976년-1977년 초에 이르러 부락개발사업 대상부락의 상당수가 침체에 빠졌고, 모든 부락에서 작목반의 협동활동은 지원자금 상환완료로 인한 활동중지와 정체·중단이 나타났다.1)

대외적 경제 요인도 사업이 난항을 겪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지역개발사업이다. 지역개발사업의 집행위원회는 해외의 지원자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예를 들어 수해 지역에 장갑 공장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무산되자, 집행위원회는 이미 투자된 지역개발사업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원주의 갑부인 원주교구 청년연합회장 최규택이 원주실습장의 위탁경영자로 선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지학순 주교가 적극적으로 최규택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오일쇼크로 인해 사업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1974년 후반기 감사와 특별감사 결과 서울 사업을 철수하게 되면서 지역개발사업 예산에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했다. 이후 집행위원회 원주 실습장 중심의 제반 사업도 실패로 돌아갔다. 또한, 이 소식을 들은 미제레오는 추가적인 수해복구자금 지원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1976년 3월 미제레오는 제4단계 사업으로 지원된 자금의 회수에 강력히 나섰다. 지역개발사업 추진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던 목적을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지원자금의 손실이 발생하자 미제레오는 재해위가 미제레오에 지원자금을 환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재해위는 4단계 사업의 실패와 책임을 인정하면서 수해민이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 그들 스스로의 역량을 최대한 개발하고자 노력한다는 사업 취지와 그 과정에서 실패에 따른 환수 추진은 그동안 원주 지역의 협동운동을 통해 공들여온 제반 성과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점을 미제레오에게 강변했다. 그 결과 1976년 미제레오 측에 양해를 구하면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었다.2)

지학순 주교 중심의 여러 활동이 난항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정권의 탄압 때문이었다. 부락종합개발계획의 경우 원래 1975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예정이었으나,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과 이로 인해 7월 재해위 위원장인 지학순 주교 구속 등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외부적 걸림돌이 돼 그 추진력을 잃게 됐다. 두 사건으로 인해 부락종합계발계획을 주도하던 집행위원회와 정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정부의 극심한 감시와 탄압으로 부락개발사업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었고, 부락종합계발계획의 추진도 사실상 어려워졌다. 실제로 부락종합계발계획에 선정된 마을이나 그 마을의 지도자는 정부에 의해 조사를 받고나 탄압을 받았다는 증언이 존재한다. 결국 부락종합개발계획은 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3)

한우작목반 사업에서는 그 운영에서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거나 공화당원인 부락민이 한우작목반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인 언급하는 것이 방해 요인 중 하나였다. 매지부락에서 한우반 구성원이자 공화당원이었던 사람이 원주교구 공소 농촌청년회나 재해위에 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하고 다녔고, 백교부락에서 원주의 지원자금으로 사업을 해면 행정기관의 협조를 받기 어렵다는 얘기가 돌면서 작목반의 활동에 부정적 여론이 조성되는 모습이 대표적인 사례다.4) 당시 한우지원사업의 내용들이 담겨있는 재해위의 회의록에서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천주교의 재해위 활동이 일부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영월의 밤수동협업농장의 경우 행정기관과 마찰이 심했는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단체에서 하는 사업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등장한다.5) 자연재해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민간의 순수한 활동이 매카시즘이라는 정치적인 프레임에 의해 시련을 겪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시 민중들의 고통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1)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68-169쪽.

2)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83-185쪽.

3)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66-167쪽.

4)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94-195쪽.

5)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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