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학순 주교의 협동운동, 생명운동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영서지역에 발생했던 수해를 복구하는 과정이었다. 지학순이 원주교구 주교로 부임하면서 장일순을 비롯한 1950-60년대 원주지역 사회운동가들이 원주그룹을 주도했다. 이들은 1960년대 후반 천주교의 ‘평신도운동’을 전개했고, 1972년 8월 남한간유역 대홍수 극복을 위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추진했는데, 이러한 운동들이 원주그룹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원주그룹은 1973년도 남한강사업, 한우지원사업, 1976년도 원주원성수해복구 사업 등을 추진했다. 이것을 통해 기존의 긴급구호 사업 성격의 농촌개발운동에서 장기적인 부락개발사업에 기반한 농촌개발운동으로 전환됐다.1)

천주교 원주교구 관내 9개 시·군과 인접 4개 시·군은 1972년 8월 19일에 발생한 남한강 유역의 집중호우로 인해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지학순 주교는 즉각적인 긴급 구호활동을 전개했고, 남한강 유역에 발생했던 대규모 수해로 인한 피해 복구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자 직접 발로 뛰었다. 특히, 대규모 수해복구사업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지학순 주교는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구호기관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특히 수해 직후 직접 독일 가톨릭 주교회의 자선기구인 미제레오를 방문하여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서독 주교단의 주선으로 서독 정부의 지원을, 국제까리타스의 주선으로 유럽까리타스의 지원에 원칙적 합의에 이르렀다.2)

처음에 지학순 주교는 1972년 10월 20일 직접 서독을 방문하여 최종합의를 통해 신속히 긴급구호사업을 전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국 직전인 10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출국 불허, 10월 26일 연행, 10월 31일 연금상태에 놓이면서 긴급구호사업 추진은 차질을 빚게 됐다. 이로 인해 지학순 주교는 11월 26일에야 출국할 수 있었고, 12월 22일 귀국할 때까지 대규모 구호자금 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했다. 그리고 1972년 12월 말 미제레오와 까리타스는 291만마르크라는 상당히 큰 규모의 긴급구호자금을 원주교구에 지원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학순 주교는 수해지역의 긴급구호사업과 부락개발사업 등을 시행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과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3) 여담으로, 이전의 회차에서 지학순 주교가 1974년 귀국길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되었고, 이후 신병 치료를 위해 입원했다가 퇴원하면서 양심선언을 했다는 것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지학순 주교의 연행과 구속은 1974년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72년에도 지학순 주교가 구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의 인신구속은 남한강 유역 수해복구 지원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초에 원주그룹과 농업문제연구소, 노동문제연구소, 한국가톨릭농민회 등은 서독의 대규모 지원 자금에 기반한 수해복구사업을 통해 농촌·농민 지향의 장기적인 농촌개발운동을 추진했으나, 지원 결정이 12월 말에야 이루어지면서 원래의 계획이 대폭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4)

지학순 주교는 서독과 유럽까리타스의 지원금 사용과 관련해서 관련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소위 ‘거지근성’을 기르는 교회의 무상구호에 입각한 방식을 넘어선 새로운 형식의 지원 방법 모색과 계획 수립을 요청했다. 그 결과 원주그룹과 전문가들은 긴 논의 끝에 천주교의 범위에서 벗어나 정부기관과 사회기관의 대표들도 참여하는 제3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하되 산하에 실무적인 일을 하는 집행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안이 제안되었다. 또한 지원자금을 구호사업에 사용할 때 무상이 아닌 부락 내에 협동조합 조직 구성을 ᅟᅩᆼ해 부락민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하여 사업을 추진할 때 그 협동조직체에만 지원하도록 하며, 그 지원금은 일정한 거치기간을 거쳐 무이자 분할 상환하는 안을 마련했다. 이 방안에 기초하여 지학순 주교는 1972년 말에 지원받을 대규모 자금의 사업 계획과 추진원칙을 마련할 수 있었다.5)

“위기를 기회로”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사용하면, 자칫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줄 수 있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일부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수구단체의 인사들이 했던 발언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남한강 홍수 이후 지학순 주교의 활동은 수해복구를 낙후했던 원주의 농촌, 탄광 지역의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계기로 삼았던, “위기를 기회로” 바꾼 모범적인 사례다.


1)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7쪽.

2)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67쪽.

3)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69-70쪽.

4)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117-118쪽.

5)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67-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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