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2021년 7월 16일 전국교수노동조합(이하, “전국교수노조”로 약칭함)의 노동조합설립신고필증이 교부됐다. 이전까지 정부가 노동조합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법외노조”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전국교수노조가 정식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교수와 연구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는 21년 전부터 있었다. 노동자의 단결권을 쟁취하고 교육 현장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구성원들의 참여에서 비롯됨을 인지했던 “민주평등사회를 위한 전국교수모임”(약칭 민교협) 소속의 교수들이 2000년 10월 31일에 교수노조 추진기획단을 발족했다. 이후, 2001년 11월 10일 전국교수노조가 출범했고, 2005년에 설립을 신고했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전국교수노조는 합법화 투쟁의 일환으로 2차로 2015년 4월 20일에 노동조합 설립신고서를 제출했으나 다시 반려됐다. 이에 전국교수노조는 고용노동부장관을 상대로 반려처분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2015년 12월 30일에는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 그 결과,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는 교수노동조합 설립을 불허한 교원노조법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교수들의 단결권은 헌법으로 인정받는 권리가 됐고, 2020년 5월 20일 국회에서 개정된 교원노조법에 의해 노조설립의 근거가 마련됐다. 20년 동안의 길고 고된 과정을 거치고 난 뒤 정식 노조로 인정받은 것이다.

전국교수노조의 설립 신고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교수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교수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현실적으로는 교수가 언제든 보직에 오르고, 보직에서 물러난 뒤에 다시 평교수의 지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이 표면적인 이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 특정 사상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가 도사리고 있다. 필자는 2013년 5월 20일자 지면에서 노동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의 이면에 “반공 이데올로기”가 있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마치 “국민”, “시민”이라는 단어는 용인되지만, “인민”이라는 단어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교수가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것에 대한 반발에는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담겨있는 것이다.

또한, “교육”이라는 행위에 비합리적인 신성성을 부과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노동”은 농업, 수산업, 광업 등 1차산업, 제조업 등 2차산업에서 하는 행위이지 교육은 노동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러한 고정관념은 초등, 중등교사 중심의 노동조합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즉, 전교조가 만들어질 때도 있었다. 전교조 창립 당시에도 “가르치는 행위가 어떻게 노동이냐?”라는 주장을 근거로 전교조 창립이 가로막혔다. 무엇보다도 교육이 학생의 인성과 가치관을 좌우할 수 있는 일이라서 교사에게 노동조합은 가당치 않다는 생각도 전교조 창립을 막아섰다. 이러한 걸림돌은 교수가 노조를 만들 때도 비슷하게 작동했다.

교육이 노동이 아니라는 주장은 공무원, 서비스업 종사자의 노동조합이 창립되면서 설 자리를 잃었다. 교육이 학생의 인성과 가치관을 좌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오히려 이러한 인식이 학생의 창의성과 가능성을 가로막고 인권을 무시했다는 반발 속에서 점차 사그라들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교육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이 드러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못한다’는 말이나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명목 아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모종의 대단한 권위를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됐다. 그 결과, 교육자는 오랫동안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교육자로서의 권리도 모두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즉,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존재했던 교육자에 대한 잘못된 권위 부여는 오히려 노동권과 교권 모두를 침해해 왔다는 뜻이다.

전국교수노조가 창립되었지만, 국제적으로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을 정도의 나라에서 이제야 교수노동조합이 합법화돼 법률로 보호받게 되었다. 또한, 개정된 현재의 교원노조법이 노동3권 보장에서 불충분하다는 한계도 분명하다. 특히, 정부는 대학에게 연구성과, 신입생 충원, 취업 등을 강요하는 평가 지표를 들이밀고 있고, 대학은 그것을 교수에게 연구성과 강요, 급여체계 개악, 책임시수 증가, 신입생 모집을 위한 고등학교 방문 강요 등으로 그대로 떠넘기고 있다. 인구절벽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 대학, 특히, 비수도권 대학은 존폐의 위기에 처해있고, 이것을 핑계로 상당수의 대학은 비인기 학과를 없애고, 각종 명칭이 붙은 “비정년트랙”이라는 “교수인 듯 교수 아닌 교수 같은” 직위를 양산했다. 비전임교원인 강사의 고통은 개선된 것이 거의 없다. 이렇게 악화되고 있는 교수들의 노동환경 악화와 실직 위기는 고등교육 전체의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전국교수노조의 설립 인가에는 그 이전의 21년 동안의 노동운동, 민주화, 그리도 대학의 역사가 담겨있다. 또한, 전국교수노조는 아직도 개선되지 않은 노동의 현실, 그리고 교수의 직장인 대학의 위기라는 상황에서 인가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노조는 지식인이자 고학력자, 교육자인 교수를 향한 고정관념 속에서 노동자로서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권리도 획득해야 한다는 안팎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전국교수노조의 설립인가를 보면서 필자는 이희승의 수필 『딸깍발이』를 떠올렸다. 전국교수노조의 “노동조합”으로서의 활동이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옮음을 추구하고, 나의 이익보다 시민, 사회, 역사를 생각하는 의로움과 용기 등 『딸깍발이』 속에 나타나는 선비의 기개를 보여줄 필요하다. 이러한 기개가 날로 악화되는 교수의 노동 여건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이익집단”인 노동조합이 나의 이익보다 의로움을 추구해야 교수 직군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딜레마를 전국교수노조가 어떻게 극복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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