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br>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원주를 비롯한 영서 지역에서 펼쳐졌던 남한강 수해복구 사업과 이 사업을 계기로 펼쳐진 협동조합 운동은 1970년대 후반 일대 전환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는 이 전환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전환의 핵심은 1979년 9월 재해대책위원회(재해위)는 사회개발위원회(사개위)로의 전환이었다. 원주교구 신부들이 사개위 위원 다수를 점했고, 이들 위원들이 각 사업마다 담당 이사를 맡아 각 사업을 주도했으며, 상담원이 이들을 보좌했다. 그리고, 김지석 신부가 감사로 임명되면서, 그동안의 재해위의 제반업무와 활동 등에 대한 감사를 지시했다. 원주교구 사제들에 의해 주도된 이러한 기구 개편은 재해위가 주관해 왔던 재해대책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면서, 1970년대의 재해대책사업의 종료와 사개위로의 전환을 통해 좀 더 범종교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면서 교구 내 교회를 발전시켜보자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재해위가 사개위로 전환된 배경은 재해위의 재해대책사업이 종료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기구로의 모색이 논의되고 있었고, 재해위의 성격과 활동에 대한 원주교구 내 신부들과 원주그룹 사이의 이견이 1970년대 후반 대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학순 주교는 재해위의 운영과 활동에서 독자성과, 운영에 대한 사제들의 미개입을 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78년 1월 일부 사제들이 공소사목부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한우지원사업을 비롯한 재해위의 일부 사업을 이관받아 선교의 일환으로 직접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공소사목부의 활동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1년 만에 사업을 재해위로 재이관하면서 혼선을 빚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1979년 말 사개위의 출범에 따라 재등장했다1)

이러한 변화에는 한국에 파견 온 외국인 사제, 즉 방인사제 수의 증가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교구 방인사제 증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70년대 초 9명에 불과했던 방인사제의 수가 1970년대 말 급증했다. 방인 사제의 영향으로,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 재해위의 구성과 활동방식에 대해 비판적 인식이 일부 신부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다.2) 즉, 신부들과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재해위의 사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당시 교구 내 일부 신부들이 신부회의에서 교구 안의 대표적인 사업인 재해위의 제반사업은 직접선교를 목적으로 신부들이 주도해야 한다는 논의를 진행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이러한 인식이 확산됐다. 그 결과, 지학순 주교는 1979년 말 일부 사제들이 재해위를 사개위로 개편할 때 집행위원장의 사무국장으로의 격하와 담당이사제를 신설하는 안을 승인했다. 사개위의 출범과 담당이사제로 신부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1980년대 전반 농촌과 광산지역을 중심으로 추진된 사개위의 소비조합운동 등은 원주그룹의 주도로 계속 추진됐다. 그러나, 당시 사개위의 위원이자 담당이사들인 신부들은 사개위의 제반사업 추진을 위한 전략과 방향, 지침 등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본당 중심으로 사목활동만 전념하던 사제들이 재해위의 제반사업과 활동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이 부족했으며, 사업의 방향과 사업지침을 내려줄 수 있는 실정이 아니었고, 사개위를 총괄한 이흥근 신부도 교구 사목국장의 일을 겸임하면서 사개위의 사업만을 주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사개위가 1983년 11월 사회개발부로 개편될 때까지 기존의 재해위를 담당하던 김영주 사무국장을 중심으로 상담원들이 1980년대 전반기의 소비조합운동을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상담원들의 활동은 내적으로는 그동안 활동에 따른 피로감, 외적으로는 정치적 탄압 등의 어려움, 그리고 농촌사회의 변화 등의 영향 속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안으로는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전반 사개위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외부 지원에 기초해서 추진하고 있었으며, 상담원의 업무와 활동이 과중함에 따라, 내부의 활력을 잃어가면서 부락사업에 기초한 협동조합운동의 적극적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사개위가 그동안 추진해왔던 제반 사업과 협동조합운동이 이농의 급증으로 인해 부락별로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침체를 겪는 경향이 많아지면서, 상담원들도 다소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자체연수회의 개최 등을 내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아울러 당시 사개위 자체가 원주교구 소속으로 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교구적 차원에서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을 수 없었다. 밖으로는 전두환정권 아래에서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으로 인한 영향으로 원주교구가 직접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주그룹 자체도 군사정권의 정보기관에 의해 상당히 노출돼 있었다. 그 결과  1982년 박재일이 한국가톨릭농민회 회장으로 선임돼 활동함에 따라 사개위의 체제개편과 업무분담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부녀사업과 마을건강사업 등을 전담하던 유재동은 1982년 6월 사개위의 활동을 그만두고 있었으며, 1983년 3월 상담원 이한규도 교구의 정년규정으로 인해 사개위의 활동에서 물러나고 있었다.3)


1)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1쪽.

2)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1쪽.

3) 김소남, 「1960-80년대 원주지역의 민간주도 협동조합 연구-부락개발, 신협, 생명운동」,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342-344쪽.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