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칼럼

▲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올해는 지학순(池學淳, 1921~1993) 주교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학순 주교의 세례명은 다니엘로, 천주교 원주교구장을 역임한 신부이며, 천주교 신부 가운데 김수환 추기경 못지않은 유명세를 가진 분이었다.

필자가 “지학순”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지학순 주교가 이산가족 상봉 때 동생을 만나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었다. 이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의 방문 행사였다. 이 행사는 남북분단 이후 있었던 첫 상봉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당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던 것에는 흥미로운 배경이 있었다.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남한에 엄청난 수해가 있었는데, 북한 측에서 구호 물품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남측에서는 북한의 구호물품 제공이 북한 내부 선전에 이용될 것이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로 인한 화해무드가 1985년 이산가족 상봉으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이 가족을 만났는데, 지학순 주교는 이 상봉단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이러한 제1차 고향방문단 교환 이후 2차 방문단에 대한 협의가 진행됐으나 상봉 성사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여담으로, 당시 경제력에서 이미 남한이 북한을 압도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구호물품 제공 의사를 덜컥 받는 바람에, 북한이 구호물품을 준비하느라 경제적으로 상당히 무리했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남한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구호물품보다 훨씬 많은 답례품을 제공하는 바람에 그 답례품을 처리하느라 북한 당국도 상당히 난감한 상황을 겪었다고 전언도 있다.

다시 지학순 주교와 동생과의 만남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지학순 주교는 1985년 9월 22일 고려호텔에서 동생을 만났다. 이 장면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보도됐고, 필자 역시 그 장면을 인상깊게 보았다. 그런데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산가족 상봉의 감격스러움도 큰 원인이지만, 남매가 나눈 대화 내용이 가진 의미도 기억에 남는 이유가 됐다.

가족들이 별실에 가서 가슴에 맺혔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북측 요원들의 저지를 실랑이 끝에 뚫고 들어간 우리 측 기자가 “오빠가 남쪽의 유명한 천주교 주교가 된 줄을 아느냐?”고 묻자, 누이는 “오빠가 천주교 학교에 다니다가 49년 남쪽으로 내려간 것만 안다.”고 대답한 뒤 안내원의 눈치만 살피다가 “우리는 살아서 천당가는데, 오빠는 죽어서 천당가겠다니 돌았다.”, “북한에서는 모두가 잘 먹고 근심없이 잘 살아 이 곳이 천당인데, 천당을 어디에서 찾겠다는 것이냐”고 말을 했다. -(중략)- 지주교가 착잡한 마음으로 누이에게 “네가 여기서 세뇌공작을 많이 맏았구나.”라고 말하자 누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아니야요.”를 연발.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북측 안내원은 서둘러 기자에게 나가줄 것을 강력히 종용했다.1)

위의 인용문은 지학순 주교가 여동생과 상봉했을 당시 상황을 묘사한 기사다. 필자는 위의 장면을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뒤 그 학기 겨울 방학 때 학교방송(현재의 EBS 라디오)에서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지학순 주교와 동생이 상봉했던 날 저녁 뉴스에서도, 겨울 방학 때 들었던 학교방송에서도 공통된 논지는 ‘이산가족의 상봉에서도 드러난 북한의 세뇌 교육’이라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당시에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앞두고 철저하게 사상 교육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분노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과 지학순 주교의 동생이 만나는 순간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은 진심으로 느껴졌고, 어린 나이였지만 가슴 찡함을 느꼈다.(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북측 요원의 저지를 뚫고 별실에 들어가 지학순 주교와 동생의 상봉을 취재한 기자의 행동에 대해서도 목숨을 던져 사실을 보도하려는 기자다운 자세라는 생각과 남북한 당국의 통제도 무시한 행동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지학순 주교는 분단과 한국전쟁, 그리고 이산가족 상봉에 이르는 한국의 분단 상황을 온 몸으로 겪어낸, 분단의 역사를 그대로 안고 살아갔던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필자는 40대 후반이 됐고, 지학순 주교가 주교로 착좌했던 원주의 상지대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역 문화 관련 과목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필자는 강단에서 지학순 주교가 한국 분단사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한국 민주주의의 고난의 역사, 대안 경제로 많이 언급되어왔던 협동조합의 역사까지 한국 현대사를 오롯이 짊어졌던 인물이라고 강의하고 있다. 이후 몇 회차에 걸쳐서 필자는 강단에서 강의했던, 지학순 주교라는 인물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한국 현대사를 조명할 예정이다.


1) 「지학순 주교, 요동생 만나고도 착잡 “천당 왜 믿나” 엉뚱한 말에 “세뇌 많이 당했구나.” 한숨」, 『조선일보』, 1985년 09월 22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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