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br>▸철학박사<br>​​​​​​​▸​​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난 15일 백기완 선생이 별세했다. 향년 88세. 여러 해 동안 심장질환을 앓아왔고, 작년부터 폐렴 증세까지 나타나서 투병해왔다1)고 전해진다. 정치권 전반,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필자가 “백기완”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백기완 선생이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왔을 때였다. 당시 선거홍보물 속에서 입술을 굳게 다문 백기완 선생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그리고 “민중”, “민주”, “대연정”, “친미 사대주의” 같은 단어들이 선거홍보물 속에 적혀있었다. 지금이야 초등학생이라고 부르지만, 당시는 국민학생이라고 부르는 신분이었던 필자는 백기완 선생의 모습과 단어들이 공포스러웠다. 필자의 머릿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소위 “빨갱이”였는데, 홍보물 속의 백기완 선생의 화가 난 듯한 표정과 미국을 비판하는 표현, 각종 어색한 단어는 백기완 선생을 “김대중보다 더한 빨갱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때는 그런 시대였고, 나는 그런 시대의 교육을 정면으로 받았던 국민학생이었다.

이후 백기완 선생을 다시 본 것은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였다. 그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당시 가장 유명했던 토크쇼인 “쟈니윤쇼”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사퇴한 이후 백기완 선생이 말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코미디언으로 성공했던 쟈니윤이었지만 백기완 선생의 카리스마를 누르기는 힘들어서였던지, 나에게 백기완 선생이 출연한 회차는 전반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호탕하게 웃으며 당시까지의 이야기를 하고, 눈을 감고 자신의 자작시를 읊는 모습은 백기완 선생의 이미지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거기에 ‘“쟈니윤쇼”에 나온 사람이니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까지 들었다. 어쩌면 중학생이 된 필자에게 쟈니윤쇼에서 백기완 선생 스스로가 이야기하는 인생사보다는, 쟈니윤쇼에 나온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백기완 선생에 대한 적의를 더 줄인 것 같다. 미디어는 그렇게 무서웠고, 지금도 무섭다.

이후 필자가 백기완 선생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였다. 지금도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은사인 중학생 시절 선생님, 주변의 대학생 형들로부터 백기완 선생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유인물들을 접하면서 백기완 선생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바뀌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렇게 무섭고 꺼리던 “민중”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가치, 우리나라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존재인지도 조금은 알게 됐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새 백기완 선생의 노력과 투쟁으로 인한 결실을 하나씩 누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개나 산 중턱에 모여 사는 동네를 “판자촌”이라는 비하의 의미가 들어있는 단어로 부르는 대신, 달 뜨는 것을 먼저 볼 수 있다는 뜻의 “달동네”라는 예쁜 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때 “프레쉬맨, 소포모어, 주니어, 시니어”를 외우느라 고생했고, 상급 학교에 진학했을 때 스스로를 “신입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필자를 “새내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서클”이 아닌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달동네”와 “새내기”, “동아리”는 순우리말을 쓰자는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백기완 선생이 고집스럽게 쓰던 말 중 우리 사회에 정착한 몇 안 되는 말들 중 일부다. 백기완 선생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군인들이 총칼로 권력을 잡은 나라가 아닌 곳에 살고 있으며,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에게 투표를 할 수 있게 됐다. 백기완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손자로 태어나서 조부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된 뒤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당시 소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시작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군사독재를 향한 투쟁, 민주화 이후의 노동운동, 2000년대에 비정규직·해고 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을 비롯해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정권퇴진운동, 민중총궐기,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투쟁, 고 백남기 농민 투쟁, 그리고 최근의 촛불집회, 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맞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 공무원 노조와 전교조 법외노조 취소를 위한 기자회견에 이르기2)까지 민주주의, 정의, 인권을 부르짖는 현장에 늘 발 벗고 나섰다. 박정희,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당한 고문이 너무나 가혹해서 거구의 몸이 반쪽이 되고 정신착란 증세까지 일으킬 정도였으며, 투옥도 겪었다.

그리고 필자는 각종 집회, 심지어 국가 기념 행사인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듣고 따라 부른다. 이 곡의 일부는 백기완 선생의 시인 <묏비나리>에서 가져온 것3) 이다. 사회운동가이면서 시인이었던 백기완 선생이 작사한 이 곡은 집회뿐만 아니라 국가 행사에서도 불리는 노래가 됐다.

필자가 마주했던 고 백기완 선생의 삶 속에서 군부독재, 매카시즘, 그리고 군정 종식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민중 운동,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가져오고 고착화시킨 분단이라는 현실과 학벌주의의 병폐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서, 한 때 “386세대”라고 통칭됐던 사람들이 50대가 되어서 “586세대”라고 불릴 정도고, 그 세월의 흐름 속에서 백기완 선생도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이제 고인이 된 백기완 선생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앞서서 나갔는데, 산 자인 당신들은 따르고 있는가?”


1) 「'임을 위한 행진곡' 백기완 별세..."삶이 현대사"」, MBN 뉴스, 2021년 02월 15일자.

2) 「‘민중의 벗’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영면…노나메기 세상 위한 일대기」, 『투데이신문』, 2021.02.15.일자.

3) 「‘민중의 벗’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영면…노나메기 세상 위한 일대기」, 『투데이신문』, 2021.02.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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