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별세…향년 88세
‘모두가 잘 사는 세상’ 꿈꾼 민중운동 큰 어른

15일 별세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뉴시스
15일 별세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뉴시스

【투데이신문 김태규 기자】 민중·민족·민주운동의 큰 어른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영면했다.

통일문제연구소는 15일 오전 백 소장이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 향년 88세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다.

백 소장은 반독재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시민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는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등 5권의 시집과 <장산곶매 이야기>, <버선발 이야기> 등 7권의 이야기책, 13권의 평론집/수필집 등을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또 백 소장은 1987년 제13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중후보’로 출마한 정치인이다.

백 소장이 한국 현대사에 남긴 발자국은 많은 이들의 삶에 울림을 주고, 한국 사회가 외면해 온 사회적 약자들을 정치의 주체로 호명해 큰 의미를 새겼다.

1960년대 초 삼십대 초반의 젊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1960년대 초 삼십대 초반의 젊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한평생 민중·민족·민주운동 매진

백 소장은 1933년 2월 29일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이후 13세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한 그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자신의 가족이 나뉘어 살게 되자 갈라진 집안을 하나로 잇고자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초등학교 이외의 교육과정은 거치지 못했으나 독학으로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우는 등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백 소장은 1951년 해외유학장려회에서 해외유학을 권유받았으나 “싸우는 조국을 두고 나 혼자만 유학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약 10년간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운영하고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자진녹화대), 농민운동(자진농촌계몽대) 등에 몸담아 젊은 날을 보내던 그는 1957년 평생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결혼했다.

1960년에는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들어 혁명 세력을 하나로 모으고 정치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힘썼으며, 1964~1965년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와 전후 보상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1966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맞서 윤보선(대한민국 4대 대통령),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야권 통합운동을 성사시켰으며, 19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1974년 유신헌법 개헌의 문제를 지적하며 ‘개헌청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이후 1979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됐다.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유신헌법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는데 반대해 열린 집회였다. 이는 당시 계엄령이 내려져 집회·시위를 열 경우 군·경과 충돌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개최된 위장결혼식이었다.

이 위장결혼식에는 백 소장과 윤보선과 함석헌, 문동환, 한명숙(대한민국 37대 국무총리) 등 재야인사와 정계 인사들이 다수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체포돼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간 백 소장은 고문을 당한 뒤 구속수감됐다. 당시 백 소장은 모진 고문으로 수차례 혼절하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당시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80년 병감정유치로 풀려나 한양대병원에 장기입원해 투병하던 백 소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접한 뒤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필연성을 역설했다. 백 소장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는 광주민주화운동 중 전라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탄에 숨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1978년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사망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곡 ‘임을 위한 행진곡’에 차용되기도 했다.

백 소장은 1984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성고문 폭로대회)’를 주도하다 또다시 구속됐다. 이후 합병증으로 위독해진 백 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한양대병원으로 병감정유치됐다. 그러나 1987년 성고문 폭로대회를 주도한 것과 관련해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수감됐다. 그해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백 소장은 곧바로 6월 항쟁에 참여해 시민대표로 연설한다.

제14대 대통령선거 백기완 후보 포스터. ⓒ통일문제연구소
제14대 대통령선거 백기완 민중후보 포스터. ⓒ통일문제연구소

민중운동 현장에 항상 앞장선 운동가

백 소장은 학생,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받아 1987년 치러진 제13대 대선에 무소속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백 소장은 당시 야권 후보였던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와 군부독재 종식을 촉구하며 중도 사퇴했으나 결국 단일화는 무산되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1992년 치러진 제14대 대선에도 출마한 재차 독자 민중후보로 추대돼 출마한 백 소장은 사퇴 없이 대선을 완주해 민중의 독자적인 정치 시대를 열었다. 제14대 대선에서 낙선한 백 소장은 이후 민중운동과 통일운동,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이후 백 소장은 1992년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를 결성하고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2008년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쌍용차·현대기아차비정규직·유성기업·콜트콜텍·파인텍·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희망버스 운동 등 노동운동, 민중운동 현장에 늘 앞장섰다.

2011년에는 밀양송전탑 반대투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투쟁에 참여하고 2013년에는 ‘4대강을 파괴하는 이명박 정권 반대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목소리를 냈으며,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을 규탄하기도 했다. 2015년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고(故) 백남기 농민 투쟁에도 온몸으로 가담했다.

2016~2018년 이어진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는 빠짐없이 앞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2019년에는 태안화력발전소 청년비정규직 노동자 고(故) 김용균의 죽음에 맞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섰으며,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법외노조 취소를 촉구하는 시민사회원로 기자회견을 주도하기도 했다.

태안화력발전소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잘려 운명한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의 장례식.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기력이 쇠한 상태였지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영정 앞에서 백기완은 울었다. 달라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현실에 피눈물을 흘렸다. ⓒ정택용
태안화력발전소 야간작업 중 컨베이어벨트에 몸이 잘려 운명한 비정규직노동자 김용균의 장례식.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기력이 쇠한 상태였지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영정 앞에서 백기완은 울었다. 달라지지 않는 노동자들의 현실에 피눈물을 흘렸다. ⓒ정택용

정치권도 추모 물결

백 소장의 일생은 ‘노나메기’를 향한 큰 뜻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나메기란 ‘너도나도 일하고 너도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을 뜻한다. 백 소장은 노나메기를 민중의 희망이라고 역설했다.

백 소장은 지난 2020년 1월부터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하다 15일 오전 4시경 영면했다. 그의 별세 소식에 정치권에서도 추모가 이어졌다.

정의당 강은미 비대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한 평생 농민·빈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해 왔던 우리 시대의 큰 어른, 백 소장의 명복을 빈다”며 “백 소장은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우리 시대 큰 어른으로 눈물과 아픔의 현장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셨다”고 백 소장을 추모했다.

이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선생께서 못 다 이룬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더욱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당 정호진 수석대변인도 “애통한 마음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유가족을 비롯해 슬픔에 잠겨있을 모든 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정 수석대변인은 “고인의 삶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역사 그 자체였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삶이었다”라며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원하며 1987년 해방 이후 첫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고 1992년 대선에서도 민중후보로 출마해 대한민국 사회가 외면해 온 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의 주인으로 호명하고 대변했다”고 추모의 뜻을 밝혔다.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대변인도 이날 브리핑을 통해 “백 소장은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올곧게 농민, 빈민, 통일, 민주화 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 운동에 평생을 바쳐왔다”며 “그의 대한민국을 위한 이 같은 열정은 우리에게 큰 울림과 감동으로 남을 것이며, 우리 사회를 깨어있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백 소장의 장례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등 50여개 단체가 주축이 된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으로 엄수된다. 입관식은 17일 오후 1시로 예정돼 있으며 18일 오후 6시경 추모행사가 진행된다. 발인은 19일 오전 8시이며 서울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를 거쳐 대학로 거리에서 노제를 진행하고 11시경 영결식을 한 뒤 장지인 경기 마석 모란공원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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