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철학박사▸상지대학교 조교수
▲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했다.

이로 인해 사대부들은 불교를 억압하거나 비판했다. 불교에 호의적인 사대부들마저 불교를 접할 수 없었다.

이 시대에 사대부와 승려는 신분상 상극의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사대부와 승려는 대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사대부가 교류하거나 친분을 맺었던 승려를 ‘방외우(方外友:신분을 떠난 친구)’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들과 이념이나 신분이 다른 승려와 우정을 교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몽인의 불교와 승려를 소재로 한 시에서는 불교를 비판하거나 승려를 하대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비난한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유몽인은 승려를 같은 지위로 생각했거나, 우호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몽인은 천재이자 고위 관료였지만, ‘경세가(經世家: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사람)’보다는 문장가로 기억되길 원했다. 덕분에 유학 서적뿐 아니라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며, 방대한 지식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 서적을 접하게 됐을 거라 추정된다.

특히 유몽인은 성장기에 불교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유몽인은 신호(申護)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신호는 15세 무렵에 2000권에 이르는 불교 경전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불교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고, 금강산에서 생을 마무리할 것을 결심한 이후로 보인다. 금강산에는 오래된 사찰이 많았기 때문에 그곳에서 은거하면 승려들과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에게 불교는 이단이었다.

그러나 문인 성향의 사대부들은 불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열린 태도를 취했다. 유몽인 또한 문인 성향의 사대부로 자신만의 문체를 개발하고, 글쓰기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 ‘야담’ 문학 양식을 개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죽임을 당하기 전, 유몽인은 금강산의 한 승려에게 준 글에서 김시습의 뒤를 잇고 싶다고 밝혔다.

유몽인의 글을 모아놓은 『어우집』에는 100여 편의 증서(贈序)와 서간(書簡:사적으로 소식을 서로 알리거나 용건을 적어보내는 문서)이 실려있는데, 그 가운데 승려에게 준 것이 20여 편에 이른다. 그리고 승려들에게 주거나 승려의 시축(詩軸:시를 적은 두루마리)과 시권(詩卷:시를 모은 책)에 제(題)한 시편이 70여 수에 이른다. 양적으로도 승려와 유몽인 사이의 교류가 꽤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어우야담』의 「승려」조에는 승려가 주인공인 10개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유몽인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승려들의 행적을 서사화 한 것들이다.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신이(神異)하고 기이한 승려들의 행적이 중심을 이루면서 승려들의 인물됨이 형상화돼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글쓰기는 성리학적 관점에서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다.

따라서 유몽인의 이러한 글쓰기는 당대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또한, 이러한 모습은 당대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적 윤리 기준이 크게 적용되지 않은 유몽인의 열린 시각과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의 글에서는 선불교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또한 벽곡(辟穀:신선이 되는 수련 과정의 하나)하며 면벽(面壁:벽을 마주하고 좌선함)하고 있는 선승(禪僧:선을 수행하는 승려)의 모습을 자주 언급했다. 이것을 통해 유몽인이 가진 선불교에 관한 지식이 깊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1)

마지막으로 유몽인은 당시 사찰과 승려들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금 승도(僧徒)가 하는 일을 보니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다. 본읍(本邑)에서는 그 이름을 호적에 올려 그 친족에게 침징(侵徵)하고 가는 절마다 그 몸을 구속하여 공례(公隷)로 충원하거나 군정(軍丁)으로 등록하여 노역에 응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한다. 또 양식을 싸들고 변방 고을에 가도록 하여 집집마다 구걸하며 쌀이나 베를 마련하여 돌아오니, 산과 사찰마다 그렇지 않은 곳이 없다. 지금 너와 같은 금강산 승려는 다른 산에서라면 하지 않는 일을 한다.-(중략)- 승려들이 남여를 잘 모는 것은 마치 전거(傳遽)에 상중하 세 등급이 나뉘어 있는 것과 같다. 남여에 타는 자의 몸이 수척한지 살쪘는지 보고 강약을 구분해 수레 무게의 경중에 맞춰 가니, 구슬 같은 땀방울이 온몸을 적시고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우레 같은데도 멈출 수가 없다. 이와 같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승려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산으로 가버린다. 그들을 신선산의 도인이라고 하지만 그 곤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2)

유몽인이 생존 당시에 묘사했던 승려의 부역 모습이다. 승려들의 역이 매우 고되었고, 이것에 대해 유몽인이 안타까워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몽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유학자이며 권신(權臣:권세 있는 신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하대 받은 승려와 열린 자세로 교류했고, 이단으로 평가받던 불교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모습을 보였다. 갈등이 첨예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으로 깊이 있고 마음 넓은 사람의 표준을 유몽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


1) 김상일, 유몽인이 본 불교인과 불교, 한국불교학, 52, 한국불교학회, 2003, 161-182.
2) 유몽인, 표훈사 승려 학열에게 준 서[贈表訓寺僧學悅序], 어우집,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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