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평소대로라면 필자는 원고를 수요일이나 목요일 저녁에는 보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회차 칼럼을 집필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유난히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금요일까지 원고를 미루면서 소위 뭉개(?)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의 실종 소식이 들려왔다. 걱정스러운 마음과 ‘혹시?’라는 생각에 글은 더욱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는 참담한 소식이 들려왔다.

필자와 박원순 시장과의 인연은 함께 두 차례 정도 팟캐스트를 녹음한 것, 그리고 내가 현재 서울특별시민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정은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냈고, 현재의 필자가 일상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결과를 낳았다. 

박원순 시장이 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첫 번째 사건은 바로 유신반대 투쟁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했으나,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4개월간 투옥됐다. 군사독재 시절 많은 사람들이 독재에 반대하다가 고초를 겪었는데, 박원순 시장도 이 투쟁에 참여했다가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박원순 시장을 비롯하여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사람들 덕분에 오늘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된다.

두 번째 변곡점은 성 관련 사건에서 피해자의 변호를 맡았다는 것이다. 박원순 시장은 변호사 시절 1987년 부천서성고문사건,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의 변호를 맡았다. 특히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의 경우 당시까지 성폭력에 대한 처벌이 상대적으로 미비했고, 성에 대한 관념이 지금보다 왜곡되었던 시절, 성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1993년-1999년이라는 긴 시간의 소송 기간 동안 피해자의 편에서 변호를 맡아서 승소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처음으로 생겼고,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있어야 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2000년 12월에는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 성범죄 문제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했다. 이 자리에서 박원순 시장은 “한반도는 10만 명 이상이 군대 위안부로 동원된 최대 피해국이었고, 식민지 지배가 그 배경이었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면서 일본 천황의 처벌과 배상을 주장했다.

세 번째 변곡점은 그의 시민단체 활동이었다. 박원순 시장은 여러 시민단체의 설립과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참여연대 시절 낙천낙선운동과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낙천낙선운동의 경우 기존에 유권자가 투표에 의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깬 사건이다. 각 정당에서 후보를 공천하는 과정부터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개진해서 정당을 압박할 수 있고, 누군가를 당선시키기 위해 표를 던지는 행위뿐만 아니라, 정당에서 공천한 후보가 옳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낙선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해준 활동이었다. 소액주주 권리찾기 운동의 경우 재벌들의 비정상적인 영향력 앞에 주주들의 권리가 외면 받고 있다는 불만이 점점 거세지고 있던 와중에, 참여연대에서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자본주의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소액주주들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시작했다. 이 활동은 특정 기업에 주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그들의 의견을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특히 재벌 개혁의 동기를 부여했고, 이건희 회장이 구속되는 계기도 마련했다.

박원순 시장이 한국사의 변곡점을 만드는데 기여한 네 번째 활동은 서울시장으로서의 모습이었다. 2011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패배와 동시에 사퇴하자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서서 서울시장에 당선되었고, 첫 번째 시장 업무가 무상급식에 관한 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소위 “보편적 복지”라는 것의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정부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촛불시위를 벌일 때 이전 정권에서 차벽을 설치하고 물대포를 쏘던 것과 달리 시민들의 안전한 시위를 보장했다. 당시 정부의 압박이 매우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으로서 촛불시위에 대한 탄압을 앞에서 막아준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에 촛불시위가 정착했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시민들의 주장을 펼치면 안전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소위 “K-데모”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시민들이 평화로운 시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박원순 시장의 업적은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본 지면에서는 역사의 변곡점을 중심으로 박원순 시장의 생애와 업적을 알아봤다. 물론 박원순 시장의 과(過)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운동가이자 최장기 민선 서울특별시장이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상황에서 그 사람의 업적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른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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