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알고 있던 무학 자초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등장해 조선의 건국을 위해 이성계를 보좌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태조의 후계를 놓고 왕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을 때도 자식들이 왕위를 놓고 죽고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하는 이성계를 다독이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러나 무학 자초가 어떻게 입적(入寂, 죽음을 뜻하는 불교용어) 했는지도 모른 채 드라마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교과서에 등장하고, 드라마에도 중요한 조연의 지위를 가진 사람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이 의문에서 무학 자초에 관한 연재를 기획했다. 이제 연재를 마무리 지을 시점에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무학 자초는 권승인가? 아니면 고승인가?

’권승(權僧)’은 수행자로서 승려의 모습은 거의 없고, 당대 권력자와 유착하거나 직접 권력을 잡은 승려를 뜻한다.

반면 ’고승(高僧)’은 수행자로서 승려 본연의 모습을 지키면서 불교에 기여한 승려를 의미한다.

그런데 승려를 권승 혹은 고승으로 나누는 것은 다분히 평가하는 측의 주관이 담겨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 명종 대(代)에 활동했던 보우(普雨)의 경우 당대 유신(儒臣, 홍문관 벼슬아치를 통틀어 이르는 말)들은 부패한 권승으로 평가했고, 명종 당대를 비롯한 이후의 불교계에서는 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학 자초가 권승으로 평가됐던 이유는 아마도 왕사(王師, 임금의 스승)로서 이성계의 최측근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무학 자초가 가진 풍수(風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양을 도읍으로 선정하는 과정에 개입한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영조실록』에는 한양을 도읍으로 선정하는 과정에서 “태조가 승려 무학을 거느리고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1)는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영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평가도 남겼다.

신라에는 도선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무학(無學)이 있어, 나라의 운수가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말이 있었다. 대개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초엽에도 오히려 남은 풍조가 있었고, 중엽 이후에서야 비로소 물리쳐 금지하게 됐다.2)

자신이 가진 불교 지식을 바탕으로 나라의 운수를 논했던 권승으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며 박하게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조의 아들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이후 흥미로운 논의가 등장한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기를,

“(-전략-) 가만히 보건대, 자초(自超)는 천례(賤隷)에서 나와 살아서도 취(取)할 것이 없고, 죽어서도 이상한 자취가 없사온데, 전하께서 그가 일찍이 왕사(王師)가 됐다 하여, 예조(禮曹)에 내려서 부도(浮屠)·안탑(安塔)·법호(法號)·조파(祖派)·비명(碑銘)·등사(等事)를 상정(詳定)하게 하시니, 전하의 전일(前日)의 아름다운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미 내리신 명령을 고요한 상태에서 깊이 생각하시어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이소서"하였다.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후략-)“3)

위의 인용문은 사간원이 무학 자초가 천한 신분 출신이고, 생존했을 때와 입적했을 때 신비로운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도나 비석을 만들어줄 만한 승려가 아니라는 간언을 펼쳤고, 태종이 여기에 동의했다는 내용이다.

무학 자초가 입적한 직후부터 그에 대해 권승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많은 반론도 나타나고 있다. 「설봉산석왕사기」에 따르면 무학 자초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 참여한 것은 무학 자초가 이성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조선이 개국된 후 왕사로 책봉됐기 때문이며, 『영조실록』에서 신라의 도선과 무학 자초가 비슷하다는 기록을 고려한다면, 무학 자초를 추모하기 위해 과도하게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무학 자초는 왕사로 책봉된 이후 회암사에 머물면서 스승인 지공과 나옹의 추모에 집중했다.

그 결과 왕사에 책봉됐음에도 불구하고 무학 자초는 이성계의 초빙 때문에 개경으로 들어와서 1년 2개월 정도 활동했지만, 대부분 회암사에 머물렀다.

활동의 내용도 연복사탑 낙성식,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법회인 반승(飯僧) 참여, 연복사와 광명사 법회 참여 등 불교 행사에 집중돼 있었다.

반면 한양 도읍 결정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한 것은 한 달 남짓에 불과했다.

즉, 무학 자초를 정치 문제에 개입한 권승(權僧)으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는 것이다.4)

실제로 『태조실록』에서 무학이 도성의 결정에 도움을 줬다는 기록은 단편적으로 계룡산의 지세(地勢)를 관람했다5)는 내용과 무악의 지세를 살폈다6)는 내용,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태조가 승려 무학을 거느리고 한양에 도읍을 정했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래서 무학 자초가 권승이라는 것인가? 고승이라는 것인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학 자초의 법명이다. 무학(無學), 배움이 없고, 자초(自超), 스스로 초월했다는 의미다.

특별히 누군가에게 깊이 배우지 않고 스스로 초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생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승려지만, 현대 불교계에서는 주변적 인물로 평가되는 무학 자초와 잘 어울리는 법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1) 『영조실록』, 권1, 영조 즉위년(1724) 9월 16일 병진.
2)  『영조실록』, 권35, 영조 9년(1733), 8월 26일, 갑술 두 번째 기사.
3)  『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1405) 9월 20일 임자 4번째 기사.
4) 황인규, 「無學自招와 漢陽 奠都」, 『東國歷史敎育』, 제4집, 동국대학교 역사교과서연구소, 1996, 49-50쪽.
5)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 1월 21일 정묘,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1393) 2월 11일 병술.
6)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1394) 8월 12일 기묘, 『태조실록』, 권6, 태조 3년(1394) 8월 13일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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