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조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중급 관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유몽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당대부터 현대 학계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인정받는 『어우야담』을 보면, 유몽인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몽인은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급제, 고속 승진했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해 명(明)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 외교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특히 유몽인은 임진왜란 동안 원군(援軍)을 보낸 명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해 원군이 철군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명을 어르고 달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유몽인이 담당했던 또 다른 업무는 광해군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宣祖)는 의주로 피난을 갔고, 광해군과 업무를 분담하는 분조(分朝, 선조가 있던 의주의 행재소와 구분해 세자가 있던 곳을 이르던 말)를 감행했다. 선조가 도성에 틀어박혀 무능한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달리 광해군은 전장을 누비며 병사들과 의병들을 독려하는 등 선조보다 뛰어난 역량을 보여줬다. 유몽인은 선조가 의주로 피난 갈 때 선조를 호종(護從, 보호하며 수행함)했고, 업무를 마친 후 광해군을 호종해 삼도순안어사(三道巡按御史, 1595)·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 1597)·평안도 순변어사(巡邊御史, 1598) 등으로 파견돼 해당 지역을 안정시키는 큰 공로를 세워 이때의 활약을 눈여겨 본 광해군이 즉위 후 유몽인을 중용했다.1)

광해군 즉위 2년 전,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태어나면서 광해군의 왕위는 위협받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당쟁은 격화됐지만, 도승지를 역임한 그는 광해군이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왕위에 오르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유몽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北人)임에도 당파적 색채가 짙지 않았다.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를 둘러싸고 북인들이 폐비를 주장했던 것과 달리 유몽인은 폐비에 반대했다. 이에 인목대비 폐비를 지지한 북인 내의 대북(大北) 세력이 유몽인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해 유몽인은 사직한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유몽인에게 닥쳤으니, 인조반정 이후 역모에 연루돼 참형에 처해진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시도에 유몽인의 아들 유약(柳瀹)이 연루됐다. 당시 유몽인은 사직한 이후 전국을 유람하며 『어우야담』 집필에 몰두했다. 광해군을 비롯한 당대 권력과 거리를 둔 것이다. 유몽인은 언젠가는 광해군이 쫓겨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조반정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고 밝혔을 정도로 당시 그는 권력과 멀리 있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광해군을 복위시키려는 모의에 아들 유약이 가담하면서 유몽인 역시 역모에 참여했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의 왕위 승계부터 인조반정 이후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격화되는 당쟁 속에서 유몽인이 지켰던 것이 있었다. 바로 의리(義理)다. 유몽인은 광해군이 왕위를 승계해야 된다는 신념 하에 광해군을 보좌했고, 광해군을 지키기 위해 인목대비의 폐위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내놓았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지 않다가 광해군 복위 모의에 연루돼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유몽인은 광해군에 대한 의리와 義理의 원래 뜻인 “옳음과 순리”를 지켰다.

봉건 군주제가 확립되고 사람 사이의 위계질서가 수립되면서 의리의 뜻은 그 사회를 지키는 위계에 대해 순종을 하고 배신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의미가 변질됐다. 유몽인의 글과 삶을 보면 그가 옳은 것을 지키고 순리를 따르는 義理와 상위에 있는 사람을 따르고 배신하지 않는 의리를 모두 지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의리는 조직폭력배에서 검찰에 이르기까지 조직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로 변질됐다. ’옳은 것’과 ’순리’는 찾을 수가 없고, 오직 조직이나 상급자(혹은 상급자를 자처하는 사람)의 수호만이 남아있다. 이렇게 義理가 의리가 되다 보니 ’의리’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 의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이를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된 것 같다.

한편, 유몽인의 외가 쪽 선조가 세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세조 즉위에 기여했던 신숙주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1) 김범, 「유몽인 [柳夢寅] - 정치적 균형과 자유로운 문학을 추구한 [어우야담]의 저자」, 『인물한국사』, 네이버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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