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박원순 서울시장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하루 전 위력에 의한 성추행으로 고소됐다는 소식은 사람들을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피고소인이 망자가 되어 없으니 사건의 실체를 알기 전까진 고소인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과, 그런 말로 피해자를 위축시키지 말라는 사람들 사이에 격론이 일었다. 그러나 이런 갈등에서 사건의 실체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뉴스를 접한 다음날,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가 자신의 ‘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 다른 출연자들은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짤’은 2000년대 초반 인터넷 사이트인 DC인사이드에서 유래한 낱말이다. 사진과 카메라를 다루는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 글을 쓰려면 반드시 사진을 첨부해야 했다. 사진이 없는 게시물은 사이트의 정체성에 맞지 않았으므로, 관리자들은 그런 게시물이 올라오면 곧바로 삭제, 즉 ‘잘랐다’. 

그러자 사진과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회원들은 잘림 방지용으로 아무 이미지나 첨부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짤림 방지로 읽히다가 짤방으로 변한 뒤 지금의 '짤'이 됐다.

짤은 이내 창의적인 표현수단이 되어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싣고 퍼져 나갔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됐다. 이젠 사람들에게 짤의 어원이나 개념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짤은 그냥 짤이고 그게 뭔지 다들 안다. 원래 뜻과 달라졌지만 짤을 대체할 다른 낱말은 없다. 그건 다른 무엇과 혼동되지 않을 만큼 사회적으로 합의된 개념이 그 안에 있다는 뜻이다. 

어떤 개념을 하나의 낱말로 불러낼 수 있을 때 사람들은 쉽게 그 개념에 어울리는 행동을 한다. 짤을 언급하기만 해도 웃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반면에 우리에겐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이르는 낱말은 없다. 그건 합의된 개념도 없다는 뜻이다. 갈등은 여기서 생긴다.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권력질서를 바탕으로 일어난다. 한 직장 내의 권력질서는 그게 옳든 그르든 나이, 성별, 위계, 권위 등 사회의 체제질서를 그대로 본 딴다. 궁극적으로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모두가 따르는 체제질서의 힘 때문에 발생한다.

보통 체제질서는 공적 영역에서 법과 제도로 강제되고 일상에선 도덕이나 예의 같은 규범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위력에 의한 성범죄의 가해자가 범죄사실을 부인할 때 방패로 삼는 게 바로 그 규범들이다. 

가령 ‘딸 같아서 그랬다’라는 말은 친족 간의 애정표현이라는 개인의 도덕 경험으로 판단을 유인한다. 사람에 따라 규범 해석의 농도차가 생기는 영역에 사건을 가두는 것이다. 가해자는 물적 증거가 적은 범죄의 특성을 악용해 보기에 따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방패를 만든다.

즉 가해자의 범죄도, 범죄를 부인하려는 거짓말도 모두 체제질서의 힘을 이용한다. 체제질서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고 피해자에겐 불리하다. 따라서 기존 질서의 상식과 규범에서 중립이라고 불리던 것들은 가해자의 입장에 훨씬 가깝다. 

그 예가 안희정 전 지사의 모친상에 모인 정치인들과 대통령 직함이 새겨진 화환이다. 사람들은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저지른 안 전 지사와 고인을 기리는 것을 분리해서 대하는 게 중립적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료 정치인들은 그에게 존재했던 위력의 일부다. 화환에 새겨진 대통령 직함 또한 그 위력이 생겨난 질서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장례는 도리에 충실한 관습이라는 체제질서를 불러냈을 뿐이지만, 피해자가 목격하는 건 범죄가 일어난 구조적 환경이 확장되어 가해자 곁에 선 광경이다. 피해자는 또다시 범죄환경을 체험한다. 

비슷한 광경은 박 시장의 장례에서도 벌어졌다. 특히 박 시장의 경우엔 서울시와 더불어 상당수의 시민들이 대규모 추모를 하면서 체제질서의 편에 섰다. 그 결과 사회의 추는 자동으로 고소인의 반대편에 쏠리게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피고소인이 무고의 희생자일지도 모르므로 고소인에게 마냥 온정적일 수 없다. 그래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양측이 원하는 최대치가 균형을 이뤄 누가 진실하든 억울하지 않은 지점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사건의 실체를 따질 필요없이 가상의 진짜 피해자를 상정하면 된다.

여기 진짜 피해자가 있다. 그는 체제질서의 편에 선 사회라는 거대한 상대와 마주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으로 저항하기 위해 여론의 지지를 모으거나 전략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가령 시민사회가 가해자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위력의 장을 확장하고 불균형을 키우면, 피해자는 체제질서의 힘이 위력의 절정으로 치달은 발인 날짜에 맞춰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전략을 쓸 수 있다. 사람들은 이를 기존 규범의 관점에서 극악한 무례로 보고 의도를 의심한다.

대중의 의심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하던 양태와 똑같다. 음모론을 들이대는 건 그나마 낫다. 피해자를 부정직한 인물로 만들어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피해자의 발언, 인격, 외모, 행동, 성향, 과거 등을 도구 삼기 일쑤다. 대리인에게도 동일한 일이 자행된다. 2차 가해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제 이 ‘진짜 피해자’는 세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한다. 첫째, 해석이 모호한 영역으로부터 범죄의 실체를 건져 올려야 한다. 둘째, 거대한 체제질서의 관성에 맞서야 한다. 셋째, 사람들의 의심이 만들어낸 2차 가해와 싸워야 한다.

증거가 부족하니 증언에 의존해 입증하고, 체제질서 그대로의 성불평등 환경을 고발하며, 가해자의 전형적인 방어논리를 답습하는 증거요구나 음모론 같은 2차 가해에 맞서야 한다. 이것도 최대의 용기를 냈을 때나 가능한 좌충우돌이다.

이런 상황의 피해자에게 사람들이 원하니 대응 수위를 적당히 조절하라는 건 ‘키스는 안되지만 엉덩이 만지는 건 괜찮다’에 합의하라는 것과 같다. 여론 조성과 전략적 행동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그건 열세의 베트콩에게 땅굴에서 나와 막강한 화력의 미군과 대등하게 교전하라는 주문과도 같다.

결국 다른 사건에서라면 합리적일 수 있는 요구와 행동이 여기선 2차 가해에 해당한다. 사건을 공정하게 다루고 싶은 이들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무고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실재하는 현실에서, 그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조차 막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피해자가 아니다.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와, 범죄가 가능했던 환경을 만들어낸 체제질서에 무지해서 범죄를 방조하고 2차 가해를 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는 입을 다무는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위력이 두려웠던 피해자의 침묵과, 의심의 발설을 입막음 당하는 시민의 침묵이 등가교환 되는 현상이다. 교환을 거부한다면 불평등을 통해 이익을 보는 강자이며 그가 행하는 모든 중립은 ‘강자의 중립’이다. 

피해자가 침묵해야 했을 땐 무심했다가 나중에야 침묵의 이유를 냉담하게 따지는 강자의 중립만 허용되는 건 그 자체로 불평등하다. 그래서 이 문제에 관한 한 침묵을 지키는 게 실제로 공평한 대응이자 규칙이다. 

무엇보다 의심의 침묵은 피해자가 원하는 최댓값이기도 하지만 무고의 희생자에게도 이로운 최댓값이다. 강자의 중립을 강행하는 사회가 피해자로 하여금 강력한 행위를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가짜 피해자가 큰 목소리로 누군가를 망신 주고 파괴하는 게 걱정된다면, 애초에 진짜 피해자가 여론의 지지를 얻으려 목소리를 높여야만 하는 상황을 없애면 된다.

피해자가 피해 호소인으로 불려도 전혀 위축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와 사법기관이 치우침 없으면, 애써 중립의 추를 옮겨 피해자에게 힘을 얹어줄 필요가 없어진다. 의심의 열기를 뒤로 물리고 2차 가해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면 이 장은 차분한 열평형상태로 빠르게 바뀐다. 그러면 무고의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과도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쪽이 불평등한 강자다. 평형상태에서의 무고는 불평등한 강자에게 관심을 보태지 않으므로 악의의 수단으로선 효과가 없어진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갈등에 휩싸이는 건, 위력에 의한 성범죄를 어떻게 다룰지 모두가 합의한 개념이 없어서다. 범죄가 일어나는 구조적 환경, 체제와의 관계, 가해자의 회피 방법, 제3자가 해서는 안될 행동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 개념이 없다. 개념이 없으니 대표하는 낱말도 없다. 당연히 불러낼 행동 규범도 없다. 대통령의 화환에 무엇을 새겨야 하는지, 고소인을 피해 호소인으로 부를지 말지조차 정하지 못했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다.

위력에 의한 성범죄는 불평등한 권력구조에서 생겨나고 정치는 권익의 분배를 통해 불평등을 해소한다. 따라서 이런 범죄는 최종적으로 정치와 닿아 있다. 특히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정치세력이 집권해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선, 위력 성범죄가 정치문제화 되는 건 당연하고도 건강한 신호다. 그 신호의 발산에 정치적 음모가 있더라도 결과적으론 적자생존을 이끌어 민주주의에 이롭다. 그러므로 개념을 불러낼 수 있는 낱말이 정치영역에 안착되어야 한다.

박원순은 30년 전에 우리의 민주주의 게시판에 위력에 의한 성범죄 개념이라는 ‘짤’을 장착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을 처음으로 제시했던 사람이다. 그가 자신이 연루된 사건을 남기고 아무런 설명 없이 퇴장한 건, 규칙을 어기면 게시판을 사용할 수 없음을 보여준 모종의 실토인지도 모른다. 그게 아직도 짤 없이 게시판을 난도질하는 이들이 바라보아야 할 미래다.

진실을 모르는 위력에 의한 성범죄에선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도록 침묵의 규칙이라는 새 규범을 따라야 한다. 강자의 중립이 아닌 공평한 중립이다. 이것이 자리 잡히기 전까지는 개념을 부를 이름조차 없어서 짤이란 낱말로 비유해야 하는, 짤 없는 사회일 뿐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