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지갑을 잃어버렸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카드 몇 장도 함께 사라졌다.

신분증과 카드라니. 잃어버린 곳으로 의심되는 전철역 주변을 꽤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얼른 다음 조치를 취해야 피해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지갑 찾는 건 빠르게 포기했다.

먼저 카드사에 전화해서 이용정지를 신청했다. 상담원은 신분확인을 거친 후 카드를 정지시켜줬다. 전화를 통한 카드재발급은 수령까지 며칠 걸린다길래 다음날 직접 은행에 가서 재발급 받기로 했다. 주민등록증은 정부24 앱을 이용하면 아무 때나 분실신고를 할 수 있지만 당시엔 그 생각을 미처 못했다. 그래서 다음날 주민센터에 가서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카드를 재발급 받으러 은행에 갔다. 아뿔싸, 좀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카드사는 전화통화로 신분확인과 재발급이 가능했으니 은행도 카드사와 전산상으로 연결하면 비슷한 절차를 거쳐 카드를 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은행직원은 신분증이 없으면 안된다며 무엇이 됐든 사진이 붙은 공공기관의 증서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나라는 걸 증명할 길이 없으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주민센터에 가서 주민등록증 재발급 신청을 한 뒤 임시 신분증을 받아서 다시 오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은행 업무 시간이 거의 끝나가던 참이라 카드 재발급은 다음날로 미루고 일단 주민센터로 발길을 옮겼다.

터덜터덜 걸어가며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힘으로 신뢰의 시스템을 꼼꼼하게 구축하는구나. 같은 금융그룹에 속해 있더라도 카드사와 은행은 시스템을 분리해 별도로 운용한다. 공공기관도 자기 영역의 시스템을 민간은행 같은 외부와 공유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악의적인 신용교란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

흐릿하게 겹친 구석이 없는 이 복합 시스템은 사람이 사람을 불신하는 정도에 맞춰 촘촘하게 울타리를 세운다. 내가 처음 카드를 이용정지 시킨 것도 카드를 줍게 될 누군가를 믿을 수 없어서였다. 나의 잃어버린 신분증이 혹여 도용될까 걱정한 것도 남을 믿지 못해서다. 타인에 대한 이러한 의심을 극단적으로 확장할수록 사회는 불특정한 악의에 견고하게 대비할 수 있다.

서로를 향한 불신이 사회를 향한 신뢰를 높이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씁쓸하다. 하지만 빡빡하고 절묘한 게 딴에는 안심도 되어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민센터에 들어섰다. 주민등록증 분실신고와 재발급 신청은 빠르고 순조로웠다. 수수료 5천원을 내려던 순간까지는.

주민센터는 현금과 카드만 받는 모양이었다. 오프라인 민원 수수료를 모바일 뱅킹으로 이체 받는 건 규정에 없는 듯했다. (온라인 민원은 계좌이체가 가능하다.) 나는 평소에 카드만 썼기 때문에 수중에 현금이 없었다. 카드를 잃어버렸으므로 은행에서 현금을 뽑을 수도 없었다. 창구엔 카드 수납기가 있지만 없는 카드를 긁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마트폰 카드앱 역시 카드를 정지시켰으므로 쓸모가 없었다.

카드를 만들려면 임시 신분증이 필요하고, 임시 신분증을 받으려면 카드가 필요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 마스크 위로 눈만 꿈뻑거렸다. 물론 몇가지 대안은 있었지만 쓸데없이 복잡하고 귀찮을 게 분명한 장면들이 머리 속에 어수선하게 그려졌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담당 공무원의 눈동자도 마스크 위에서 갈피를 잃고 흔들린다고 느끼던 찰나, 그이가 명랑하게 말했다.

“그럼, 그냥 내일 가져오세요.”

'네?'하며 되묻는 내게 그는 임시 신분증을 건네 주면서 대신 꼭 내일 수수료 가져오시라 재차 당부했다. 가끔 돈도 안 내고 연락도 안 받는 분들이 계시다면서. 나는 걱정 마시라 약속하고 기분 좋게 주민센터를 나섰다. 그리고 이튿날 은행에서 카드를 발급받자 마자 곧바로 주민센터에 찾아가 수수료를 냈다. 그리고 물었다. 끝까지 돈을 안내는 사람이 있는 경우엔 어떻게 하느냐고. 역시나 예상대로 본인이 충당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떤 감각이 슬며시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주민센터에 들어서기 직전까지 나는 불신에 기반한 우리사회의 신뢰 시스템이 조금 까칠하기는 해도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부정적 사례를 바탕으로 의심을 최대한 확장시켜 만든 역설계가 개인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데에 치밀하고 탁월하다고 여겼다. 믿지 않을수록 안전하게 믿을 수 있는 제도가 생기니까.

그런데 그 공무원은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 그는 약속을 어기는 민원인들로 인해 생기는 피해를 자신의 이익 일부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오곤 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간 쌓였을 경험 데이터를 생각한다면 그가 내게 배려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짧은 판단의 순간 다시 한번 타인의 선의를 믿는 쪽을 택했다.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그의 몫이 될 터였다.

그가 보인 행동은 앞으로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을 거라는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합리적인 알고리듬이라면 배반의 사례들을 학습하여 손해를 예상할 수 있는 확률 데이터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이익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손해를 예상하면서도 상대방의 선의를 믿는 비합리성은 분명 인간만이 가진 상상의 영역이다. 불확실한 정보안개 속에서 현재까지 알고 있는 데이터를 거스르려면 정반대의 결과를 뚜렷한 근거 없이 떠올리고 확신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에 대한 믿음이라는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은 거친 대양을 건넜고, 신의 이름으로 고난을 버텼으며, 신념을 갖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다.

믿음의 대가를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상상을 믿는 것은 자신을 믿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을 믿는 것도 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이다. 즉 그 공무원은 나를 믿었다기 보다는 결과를 감당할 미래의 자신을 믿은 셈이다. 스스로를 믿는 것은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불신만큼이나 인류를 번성시킨 동력의 한 축이다. 그런데 우리는 점점 그 사실을 잊어간다.

최근에 서해에서 공무를 수행하던 한 공무원이 바다 위를 표류하다 북한군에게 사살됐다. 나의 눈에 그의 죽음을 다루는 모든 장면을 이끄는 것은 의심과 불신이다.

남과 북의 적대적 대치는 서로의 경계면 바깥에 있는 무엇도 쉽게 믿을 수 없게 만든다. 남북간의 통신선이 단절된 환경은 신뢰가 어려운 정보들의 사실확인을 더디게 만든다. 이 때문에 지체되는 정부의 엄중하고 조심스러운 상황판단을 야당은 대정부 불신의 지렛대로 삼는다.

현재까지 밝혀진 정황은 고인의 월북가능성을 높이지만, 파편적인 정보와 정황증거가 반드시 월북의 근거가 될 수는 없기에 이견이 생긴다. 이 이견 또한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월북으로 몰려고 한다는 의심의 심지가 되어 불꽃을 틔운다. 일부 언론은 분명히 이례적이랄 수 있는 북한의 사과 통지문을 정치적 불신의 불쏘시개로 활용한다. 결국 굳이 세상에 알려질 필요 없는 고인의 개인적인 허물이 공개되고, 국가 안위를 위해 비밀 누설이 금지된 자리의 정보마저 진위가 불확실한 상태로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익을 얻기 위해선 무엇이든 끝없이 의심하고 믿지 않아야만 하는 세태가 어느새 우리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부가 된 것이 아닌가. 고인이 된 공무원이 생전에 살았었고 자의든 타의든 끝내 결별하게 된 우리사회는 그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허물의 데이터는 꼼짝없이 높은 확률로 신뢰하지 말라고 지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의를 최후의 5천원만큼이라도 믿어주는 세상을 그는 살고 있었을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 이상으로 의심과 불신이 팽배한 북쪽해역에서 명령계통의 누구 한 사람이라도 경험을 거스르고 표류자의 선의를 믿었다면, 아니 적대적인 남북관계 속에서도 자신을 굳건히 믿는 누군가가 단 한명이라도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지 모른다.

칠흑 같이 어둡고 찬 바다 위에서 표류하다 비극적으로 생을 달리한 고인을 애도한다. 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모습 같다.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믿지 못하는 방식으로 신뢰를 강렬히 염원하는 칠천 오백만명의 표류에 안타까운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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