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성 심근경색 6년 투병 끝에 향년 78세 타계
반도체·휴대폰 성공, 신경영 내걸고 글로벌 도약
정경유착·비자금 의혹 등 수난, 승계 잡음 지속

ⓒ삼성전자
ⓒ삼성전자

【투데이신문 최병춘 기자】 글로벌 삼성의 신화를 이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5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삼성서울병원에서 6년여간 투병 생활을 이어왔다. 삼성에 따르면 이 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가족 뜻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사위 김재열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등이 있다.

40대 승부사 총수가 일군 글로벌 초일류 기업

이 회장은 지난 1942년 대구에서 이병철 창업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남 의령 친가에 보내져 조모 손에서 커오던 이 회장은 지난 1947년 상경해 학교를 다니다 1953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 다시 유학길에 올라 일본 와세다 대학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에 오르며 경영수업을 시작한 이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지난 1987년 12월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다.

애초 맏형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창업주 눈 밖에 나면서 후계자리에 낙점된 이 회장은 총수 등극 후 약 27년간 삼성을 이끌었다.

이 회장은 삼성이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 등 당시로선 불모지에 가까웠던 차세대 사업 진출, 성공으로 이끌며 지금의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만의 승부사 기질이 돋보이는 공격적이고 과감한 결정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이 회장은 ‘신경영’, ‘창조경영’, ‘마하경영’ 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삼성그룹의 위기 극복을 도모했다.

특히 지난 1993년 이 회장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은 현재 글로벌 삼성으로 변화의 시작점으로 꼽히기도 한다. 신경영은 당시 삼성전자 세탁기 불량 사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시내 전자제품 매장에서 삼성전자 제품이 매장 구석에 먼지 쌓인 채 놓여있던 상황 등이 맞물리면서 제시된 경영 의제다.

이 회장이 지난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현지 주재원과 임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모두 다 바꾸라”는 발표는 그의 신경영 철학을 가장 잘 드러낸 대표적인 일화로 꼽힌다.

또 지난 1995년 임직원 2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 휴대폰 10만대 이상을 동시에 불태운 이른바 ‘애니콜 화형식’도 이 회장이 강조한 ‘품질 경영’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례로 손꼽힌다.

당시 충격적인 사건은 소비자 신뢰도 확보는 물론 내부적으로 삼성 휴대폰 품질 개선과 신기술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다.

화형식이 있던 그해 8월 애니콜 제품군은 당시 전 세계 휴대전화 시장 1위였던 모토로라를 제쳤다. 국내 시장 점유율도 50%를 넘기며 시장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삼성이 급성장 가도를 달리던 지난 2013년 신경영 선포 20주년 행사에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는 발언은 이 회장의 ‘위기경영’ 활용을 잘 드러낸 사례로 손꼽힌다.

삼성은 이 회장이 부임한 1987년 1조원이었던 시가총액은 지난 2012년 390조원의 메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3년 이 회장이 처음으로 신경영을 선포한 이후 삼성은 20년 동안 매출 13배, 수출 규모 15배, 이익 49배가 늘었다. 메모리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20여 개 품목에서 글로벌 1위를 일궈내며 국내를 넘어 명실상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삼성전자
ⓒ삼성전자

한국 재벌 상징, 성과 뒤 어두운 그림자

이에 그동안 이 회장은 한국 재계 대표적인 경영인으로 손꼽히며 주목받아왔다. 이 회장은 삼성 성장에 따른 눈부신 경영 성과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동시에 정경유착 같은 한국 재벌의 어두운 면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지난 1995년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의 조사를 받고 불구속기소 됐다. 1996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며 실형을 면했고 1997년 사면 복권돼 다시 경영 일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을 둘러싼 불법 승계 의혹과 이어진 비자금 사건 등에 주인공이 됐다.

지난 2000년 법학 교수 43명이 이 회장의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로 고발하면서 지난 1996년 이뤄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의혹이 수면 위로 떠 오르게 됐다.

당시 갓 회사에 입사한 20대 후반의 이재용 부회장에게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61억 4000만원을 증여했는데 이 돈으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그룹 내 비상장회사인 에스원과 삼성엔지니어링의 주식을 매입한 뒤 두 회사 상장으로 큰 차익을 남기게 됐다. 다시 그 돈으로 1996년에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매입하면서 지금의 삼성물산이 된 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올라서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이 사실상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한 편법이라는 비판이 줄곧 제기돼왔다. 특히 당시 주주들이 이 회장의 지시로 전환사채 인수를 포기해 이 부회장이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며 이 회장은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고발조치 된다.

이 회장은 당시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과 관련된 재판에서 대법원은 배임죄를 적용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언해 구속을 면하게 됐다.

2005년에는 삼성 임원진이 정치권과 검찰에 금품제공을 논의한 녹음파일 폭로로 이른바 ‘삼성X파일’ 사건이 터졌다. 당시 이 회장의 지시로 홍석현 전 중앙일보 사장이 대선자금을 나눠주는 심부름을 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었지만 이 회장은 서면조사 끝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2007년에는 삼성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삼성그룹 차명계좌를 통한 비자금 조성 의혹이 불거졌다. 김 변호사는 이 회장 일가의 경영권 불법 승계와 비자금 조성, 정관계 로비 의혹 등 각종 폭로를 이어갔고 급기야 조준웅 특검의 강도 높은 수사로 이어졌다.

수사 결과 차명계좌의 실체가 드러났고 1000억원대 세금포탈 등 혐의가 제기되면서 이 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 회장뿐 아니라 당시 불법 승계 의혹을 받았던 아들 이재용 부회장도 최고고객책임자(CCO)자리에서 물러났다.

이 회장은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기소 됐지만 2009년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 집유 4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지만 2009년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받아 2010년 삼성전자 회장으로 다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하지만 지난 2014년 5월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아들 이재용 부회장이 그룹 총수 역할을 이어받아 수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 회장은 삼성의 순환출자 지배 구조와 밀실 경영 등 불투명한 경영에 대한 비판도 받았다. 삼성그룹이 끝내 지주사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서 여전히 삼성생명 등 자회사와 재단 등을 동원에 소수 지분으로 그룹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구조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복잡한 구조로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문제는 여전히 불법 논란에 휘말린 상태다. 이와 함께 비서실,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등으로 계속 이름을 바꿔온 비공식 조직을 통한 밀실 경영과 창업주부터 이어온 ‘무노조 경영’ 철학이 가져온 노조 탄압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