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넷플릭스가 서비스하는 드라마 중에 ‘퀸스 갬빗’이라는 미국 드라마가 있다. 체스 천재인 주인공 베스의 삶을 그린 내용이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심리적으로 위태로운 어머니로 인해 불안정한 양육환경에서 자란 베스. 어린 베스는 교통사고로 어머니마저 잃고 보육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주변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지 못하는 말수 적은 소녀가 된다.

베스는 보육원에서 우연히 체스를 접한다. 세상으로부터 감정적으로 고립돼 있던 그는 체스의 세계에 순식간에 빠져든다. 자신의 높은 지능을 체스에 대한 집착에 쏟으며 어느덧 체스 스타로 성장한 베스는 세계 챔피언에 한 발 한 발 다가선다.

그러나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나눠주던 신경안정제에 중독된 베스는 갈수록 더 강한 상대와 겨루느라 커져가는 압박감 때문에 약을 끊지 못한다. 나날이 잃어가는 평정심은 공허한 갈증을 부르고, 그럴수록 약을 먹어서라도 게임을 이기려 드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대로는 결코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없는 상황. 열패감과 약물중독으로 괴로워하던 베스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지 이야기는 궁금증을 더해간다.

예사롭지 않은 줄거리라서 제목인 ‘퀸스 갬빗’의 뜻을 찾아봤다. 퀸스 갬빗은 체스판 위에서 가장 힘이 약한 졸(pawn)을 희생양으로 내미는 대신 초반 기선을 제압하는 수다. 이 수를 쓰면 상대가 나의 졸을 잡겠다고 나올 때 마다 다른 말들로 압박해 체스판의 중앙을 계속 차지할 수 있다.

장기로 치면 첫 수에서 졸(卒)을 앞으로 내주고 뒤에 있는 마(馬)나 상(象)에게 길을 터줘서 나의 졸을 먹겠다고 나온 상대의 말을 잡는 식이다. 퀸스 갬빗은 졸을 언제든지 희생시킬 생각으로 진행하는 수다. 왜 이 낱말을 제목으로 삼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베스가 계속해서 엉뚱한 것을 희생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존재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에겐 체스만이 존재로서의 감각을 느끼는 유일한 행위였지만, 자신의 전부인 그것에 의미를 새길 줄 모르니 자기 삶의 의미도 갖지 못한 채 성장하고 만다. 결국 이기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 돼 버렸다.

이기는 게 최고 가치인 삶에선 주체인 자신도 승리를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약과 술과 고독이 스스로를 망치더라도 이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한다. 따라서 주체로서의 존엄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졸(pawn)이 되어 버려진다. 승리를 최고 가치로 삼느라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니 삶의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셈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것은 꽤나 하찮았고, 가장 하찮게 대한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문에 베스는 자신의 인생이라는 체스판에서 계속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늘 궁지에 몰리고 초조한 상태로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 줄곧 희생시키던 자신이라는 존재를 왕의 자리에 두고 지켜내야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

드라마 '퀸스 갬빗'은 당신이 지금 희생시키고 있는 게 과연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 체스판이 인생이고 그 위의 말들이 개개의 가치판단이라면, 아쉽더라도 희생할 수 있는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혹시 희생해선 안 될 것을 희생하고 있는 건 아닌가. 달리 보면 인생에서 반드시 지키고 내주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를 보면 지키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체스 게임이나 개인의 인생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변화가 더딘 사회가 개혁을 맞이할 때에도 퀸스 갬빗 프로세스는 작동한다.

개혁이 지켜내야 하는 것은 뭇사람이 더욱 행복해질 수 있는 권리다.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은 변화 때문에 사라지는 기존의 편리함이다. 개혁을 하겠다면서 인간된 권리를 희생하고 기존의 편리함을 지킬 순 없는 법이다. 그러나 실제는 사뭇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라임 사건으로 수사 받던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폭로에는 야권인사 로비 진술이 덮어졌다는 내용과 검사 룸살롱 접대가 들어 있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기꾼의 말을 어찌 믿느냐며 추미애 법무장관의 지휘가 부당하다고 했으나, 수사결과 둘 다 혐의 있음으로 결론 나 각기 구속 기소됐다. 총장의 체면은 구겨졌지만 이에 대한 입장표명이나 사과는 없다.

그 와중에 놀랍게도 검찰은 김 전 회장의 검사 접대 비용을 법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으로 기이하게 계산해 세 명의 검사 중 단 한 명만을 기소했다. 기소하지 않을 권리야말로 검찰의 막강한 권력이란 점을 입증했지만 죄의식이 없는지 사과하는 이가 없다.

검찰이 공소유지를 이유로 작성한 판사문건은 법령에 없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판사들의 법익을 해칠 우려가 있었음에도 윤총장은 이를 사전에 방지하지 않고 오히려 지휘했다. 그리고는 일말의 창피함도 없이 해당 문건을 언론에 공개했는데, 물론 사과는 없다.

조국 전 장관 수사 당시 대대적인 수사력을 발휘했던 검찰의 태도는, 야당 정치인 관련 수사에서도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던 윤 총장의 확언이 무색하리만치 소극적으로 변한다. 조금도 겸연쩍지 않은 듯 입장표명이 없다.

과거 검찰이 온갖 인권침해 사건을 만들어내는 동안 단 한차례도 공동성명서를 낸 적 없는 전직 검찰총장들은 윤 총장에 대한 징계에 대해선 약간의 쑥스러움도 없이 법치를 위협한다며 집단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물론 현직 총장은 징계에까지 이른 현실에 어떠한 도의적 사과도 없이 소송에 전념한다.

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이 되려 경제관련 범죄자와 검찰의 유착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해체한 것을 두고 여권인사의 범죄 관련성을 은폐하려는 시도라며 비난하던 이들은, 합수단 해체로 인해 권력간 견제가 가능하도록 바뀐 게임의 규칙을 눈치 챈 경제사범이 더 이상 기존의 권력 지형으로부터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해 야권인사 관련한 정보를 공개해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합수단 해체가 수사의 공정성을 불러왔을 가능성에는 입을 다문다.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시킨 여당의 공수처법 개정안이 현 정부의 검찰 장악 시나리오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그들의 우려대로라면 정권이 바뀌는 순간 현 여당 정치인들도 같은 법에 의해 언제든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는 미래를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시선을 피한다.

검찰개혁의 과정에서 불거진 윤총장의 혐의나 공수처 설치를 둘러싼 주장들의 목적과 의도는 당사자들 외엔 아무도 진실을 알 수 없다. 가장 최선은 각자의 주장을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모두를 의심하는 것이다. 어느 일방의 주장만이 진실이라고 부를 생각은 없다. 하지만 퀸스 갬빗을 빗대 바라보면 눈에 띄는 게 있다.

검찰과 검찰총장을 두둔하는 세력은 검찰의 위신이 줄곧 희생되는 것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순수해 보일 정도로 일방향적인 침묵이다. 그 대신 검찰조직은 굳건히 지켜지고 있다. 반면 이렇게 편향된 침묵은 개혁을 바라는 시민의 열망을 희생시킨다. 시민이 그 대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검찰은 절차를 앞세워 법치를 지키라는 목소리의 반만큼이라도 민주주의 시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개혁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켜지는 것은 무엇이고 희생되는 것은 무엇인가.

거듭 말하지만, 지금 희생시키고 있는 걸 보면 장차 지키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보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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