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직접 권유 거절 못해···초선 불구 불출마 결심
가까워지며 변화하기 출간···대사 귀임 ‘출장보고서’
평화공존 모색할 때···통일부폐지 주장은 포퓰리즘
청년재단 이사장, 새로운 도전···청년목소리 허브로

【투데이신문 윤철순 기자】 15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7년은 역대 최초로 대선후보 간 방송 3사 합동토론회가 열린 해였다. 첫 TV 토론이라 그래서였는지 당시 시청률 50%에 육박하던 드라마 ‘용의 눈물’에 버금갈 정도로 방송은 세간의 주목을 끌었었다.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의 날 선 신경전이 재미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론 멀끔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토론을 이끌던 사회자가 눈에 들어왔다. 안정감 있는 진행으로 당대 거물들을 요리하던 그의 모습에 시선이 꽂힌 거였다.

후보들의 공약보다 그의 이름 석 자가 더 기억에 남았던 건 순전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그를 다시 만난 곳은 ‘새천년민주당’ 여의도 당사였다. 정확히는 만났다기보다 당사를 출입하며 한두 번 스친 거였다.

2000년 총선 전후 그렇게 ‘스쳤던’ 그는 그해 4월 경기도 고양시 일산 갑(현 일산동구) 지역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현역이었던 3선의 자유민주연합 이택석과 한나라당 전국구(비례) 오양순 후보를 한 방에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그렇게 잊히듯, 시간이 무심히 흐른 지난 2018년. 새해 벽두에 올라온 기사 한 꼭지가 그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文정부 첫 재외공관장 인사, 주독일대사...” ‘특임공관장’에 발탁됐다는 그 이름은 또 그렇게 기억 속에 묻혔다.

스무 해 이상 개인적 기억 한편에 머물러 있던 그를 이렇게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며칠 전 그의 출판기념회 소식을 건네 접했을 때만 해도 지금까지처럼 그러려니 했으니까.

3년의 대사 임직을 마친 후 귀임하자마자 ‘청년재단’ 이사장으로 변신한 정범구(67) 전 독일대사를 청계천 옆 청년재단 이사장실에서 23일 만났다.

정범구 전 독일대사 ⓒ투데이신문 

◇대사 귀임 출장보고서 출간

-최근 독일(대사) 생활을 정리한 책을 내셨어요.

“책머리에도 언급했지만, 특임공관장 발령 당시 두 가지 평이 있었어요. 독일 전문가라는 것과 낙하산 인사라는. 그런 부담을 안고 현지로 갔지요. 사실 독일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외교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두렵기도 했거든요. 반면, 부임하면서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많았어요.”

-어떤 게 궁금했나요?

“대사(외교관)들은 어떤 일과 역할들을 하는지, 해외에서 사건이 생기면 외교관들이 욕을 많이 먹는데 왜 그런 건지. 또 영화 같은 걸 보면 외교관이 멋있게 나오잖아요. 그런 것들이 실제론 어떤지 그런 여러 가지가 궁금했죠.”

-대사직을 직접 수행해보니 어떻던가요?

“대사관에선 매주 월요일 아침 전체회의를 해요. 첫 보고사항이 주말 당직근무 때 접수된 사건들인데, 토요일 밤 10시쯤 베를린으로 유학 온 딸이 몇 시간째 연락이 안 된다며 확인 좀 해달라는 부모가 한국에서 전화했어요. 그 전화를 받은 당직자가 할 수 없이 방문을 위해 택시를 불렀는데, 조금 지나서 딸과 통화가 됐다고 연락해 왔답니다. 이외에도 옆집에 사는 외국인이 자기가 오갈 때마다 째려봐서 위협을 느끼니 신변 보호를 해달라는 민원부터 여행 가방을 분실했다는 하소연까지 재외공관 민원업무는 실로 엄청 늘었어요. 연간 3천만 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해외 관광을 나오니까요.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연회장을 유영하는 화려한 외교관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있을법한 장면일 뿐이더라고요. 막상 해보니 영업직 종사자들의 고충을 절절히 느끼겠더라고요. 하하.”

-대사관의 여러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거네요.

“그런 생각도 없지 않았어요. 그런데, 그것보다는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교무대나 직업의 세계 같은 것에 대해 전해드릴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외교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처럼 인식되고 있는데, 이걸 국민들과 공유해야겠다 이런 생각이요. 그것도 외교공무원으로서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외교활동도 공유재산이니까요. 일부 보안이나 국가기밀 같은 건 안 되겠지만요. 또 대사업무가 바쁘니까 그때마다 메모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정리하려고 해도 안될 테니 기록의 의미로도 쓴 거죠. 특히 특임공관장이란 부담 때문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있었고요. 타국의 대사로 가서 3년씩 있다 오면 그 나라의 내밀한 정보를 최대한 파악해오는 게 외교관이고 정보원 역할이거든요. 책도 출장보고서라 생각하고 그런 차원에서 내게 됐어요.”

그는 2018년 1월부터 3년간의 대사활동 중 벌어진 일상을 페이스북에 꼼꼼히 올렸다. 지난 12일 그렇게 기록한 이야기 100여 편을 수정, 보완해 <가까워지며 변화하기>란 도서로 출간했다. 책엔 독일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는 물론 전 세계 외교관들과의 교류를 통해 나눴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져 있다. 일반인들이 알기 어려운 외교 공관과 일선의 이야기들을 경쾌하게 풀어내 흥미를 유발한다. 책 제목인 ‘가까워지며 변화하기’는 동방정책으로 동서독 화해를 이끌어 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전 총리의 핵심 구호다. 독일의 대표적 보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는 지난 2018년 9월 19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무개차에 올라 활짝 웃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진을 1면 톱에 배치하며 ‘가까워지며 변화하기(Wandel durch Annäherung)’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다.

정범구 전 독일대사의 저서 <가까워지며 변화하기> ⓒ투데이신문 

-책에 ‘벤츠 탈 줄 알았는데 관용차가 국산...’이라는 내용이 있어요.

“한국에서 벤츠를 못 타봐서 거기 가면 당연히 ‘벤츠 타겠지’란 생각을 했지요. 하하. 독일이니까. 대사관 차량이 다섯 대 있는데, 중형버스 한 대만 벤츠고 나머진 전부 국산 차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중요한 게 베를린 주요국 대사들 중 자국 브랜드 차량을 갖고 있는 나라 대사들은 자기들 나라에서 만드는 차를 탑니다. 프랑스 대사는 푸조를 타고, 일본은 렉서스, 이탈리아도 그렇고. 우리는 에쿠스를 관용차로 쓰는 거죠. 반면에 중국이나 러시아 대사는 벤츠를 이용하더라고요. 그만큼 자국 브랜드를 생산하는 나라가 얼마 안 됩니다. 에쿠스를 타고 베를린에 일 보러 다니면 지나가는 독일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그만큼 세일즈도 충분히 됩니다. 하하.”

-유학 갔던 나라 대사로 갔으니 고향 다녀온 기분 같았겠어요.

“그런 기분으로 갔던 건 맞아요. 유학 마치고 돌아온 후 28년 만에 갔으니까요. 근 30년 만에 간 건데, 독일도 정말 많이 변했더라고요. 독일 쪽에서 생각하는 한국에 대한 위상도 과거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요. 개인적으론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었죠. 말씀처럼 고향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고요.”

◇새로운 도전, 청년재단 이사장

-그렇게 3년의 대사 생활 마치자마자 또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어요.

“귀국해서도 여러 대외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다양한 관계와 관련 있는 채널을 통해 지금 맡게 된 재단이 표류하고 있다는 얘길 듣게 됐고, 이걸 좀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그런 데다 청년 문제가 상당한 이슈로 떠오르기도 해서 고민을 했죠. 사실 첨엔 약간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사회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해 왔는데, ‘만년’에 정말 의미 있는 분야에서 봉사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정범구와 청년’, 매칭이 잘 안 되네요.

“하하. 맞는 얘깁니다. 개인적으론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되돌아보면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가봤던 사례가 많아요. 예를 들면 시사평론가란 직업도 요즘은 일반명사처럼 돼 있는데, 그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 접니다. 90년대 초에 시사평론지에 글을 쓰면서 사용했는데, 그땐 보통 자신을 표현할 때 강사라든가 그런 식으로 직업적 명칭을 사용하곤 했어요. 그런 시대에 시사평론가라는 직업명을 처음 썼죠. 그리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국회의원도 했고요. 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광스러운 대사직도 처음 해봤습니다. 그만큼 그동안 새롭게 도전해 본 일들이 많았어요. 해서 청년 문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새롭게 시작하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 이사장을 맡기로 한 겁니다.”

정범구 전 독일대사 ⓒ투데이신문 

정 이사장은 텔레비전 토론의 효시다. 그는 44세 때인 1997년 15대 대선 당시 대선 토론위원 11명이 추천한 55명 중 최종 사회자로 낙점돼 방송 3사 최초의 대선후보 합동토론회를 진행했었다. 충북 음성 출신으로 경희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독일 마부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던 그는 1990년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시사평론가로 활동했다. 당시 CBS와 KBS에서 시사프로 진행자로 활약했다. 이후 16·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초선 때인 2002년엔 당 대변인을 맡았었다. 2003년 11월엔 17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본업인 정치평론가로 돌아갔다. 이후 정계 복귀와 재선 국회의원 당선 및 3선 도전 실패 등 2012년 정계 은퇴까지 부침을 거듭했다. 2018년 1월부터 문재인 정부 주독일대사로 봉직, 지난해 11월 귀임했다. 지난 4월 1일 청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청년재단은 어떤 곳인가요.

“청년들의 일자리를 돕기 위해 지난 2015년 박근혜 정부 때 만들었다고 해요. 삼성, 현대 등 재벌 회장들의 출연금 1400억원 정도를 모아 공익법인으로 출발했는데, 이후 정치적 파동이 일면서 흐트러졌어요. 박근혜 대통령으로선 청년 일자리 지원에 꽤 관심을 갖고 퇴임 후에도 재단 이사장을 맡아 하고 싶었던 것 아니냐 이런 얘기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치변화와 맞물리면서...”

-청년 일자리 지원은 정부에서도 하고 있잖아요.

“그렇지요. 애초 취지대로 청년 일자리를 돕자 그런 거였는데, 이게 참 막연한 얘기죠. 그래서 초기에는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을 지원하는 사업들을 많이 했더라고요.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심리치료 지원이나 멘토링 사업 이런 것도 했어요. 이사장을 맡고 전반적 상황을 들여다보니 연간 100억원 가까이 그런 비용으로 써왔더라고요. 그런데 지난해 청년기본법도 제정되고, 또 정부가 그린뉴딜정책 청년부문에 7조원가량 예산을 투입해서 작은 민간재단이 정부와 똑같이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용도 적고...”

-방향 전환이 필요하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재단 사업을 청년 정책의 종합적 허브 기능으로 전환하자 그렇게 정리를 했어요. 청년기본법 대상 청년이 천만명이 넘어요. 만 19~34세가 대상인데 인구의 20%가량이나 되거든요. 청년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집약해서 말 할 수 있는 창구가 아직 없는데 그걸 정치권, 정부가 하겠다 그러는 건데요. 이걸 우리가 하자. 청년 정책 전반에 대해 민간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중심이 되자 그런 거죠. 지금 청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게 뭐고 어떤 정책적 지원을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묶어내는 정책 허브로 나가야 되겠다 그런 겁니다. 그래서 현재 조직도 거기에 맞추고 사업도 전면 개편하고 있어요.”

정범구 전 독일대사 유튜브 인터뷰 캡처 ⓒ소셜미디어태희

-독일 전문가이시니 독일 등 해외 청년 일자리 지원도 해볼 수 있겠네요.

“사실 독일 대사로 있을 때 청년 일자리 지원을 시도해본 적이 있어요. 한국의 마이스터고 졸업생을 독일 현장에 취업시키고자 했거든요. 그런데 몇 가지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양국의 직업교육 시스템 문제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론 우리나라의 임금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겁니다. 즉 해외까지 가서 고생을 감수하며 돈을 벌기엔 효용성이 크지 않은 거죠. 우리나라가 이미 그 단계는 지났어요. 독일도 돌봄 노동이 많이 부족해 문제인데 우리나라 근로자 임금이 맞지 않아요. 임금 감당이 안 되니까 동남아 인력을 데려다 쓰거든요.”

-유학 생활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졌겠어요.

“그렇습니다. 1979년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 한국의 1인당 GDP가 1천불 조금 넘었어요. 독일은 1만2천불가량 됐고요. 열 배 이상 차이가 났었는데, 귀국 땐 우리가 6천5백불, 독일이 2만2천불이었어요. 경제 격차를 11년 만에 세배로 좁힌 겁니다. 그리고 대사 부임 때인 2018년엔 3만2천불 대 4만2천불로 3대2까지 따라붙었죠. 우리 추격속도가 엄청 빨랐던 겁니다. 요즘은 GDP 말고 실질소득지수(PPP)란 개념을 쓰는데, 그걸 적용하면 격차는 더 줄어요.”

-청년 해외 취업은 메리트가 없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과거 파독 광부나 간호사 인력공급 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한국 청년들에겐 메리트가 없게 된 거죠. 워킹홀리데이 등 과거보다 직업 경험 여건이 확장돼 해외에서의 취업 기회 역시 넓어졌는데, 그런 업종은 보통 서비스 등의 분야이기 때문에 국내 상황과 크게 차이가 없어요.”

‘파독근로자(광부·간호사)’는 1960~1970년대 서독(독일)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 위해 파견된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를 일컫는 표현이다. 당시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실업 문제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해 해외인력수출 정책을 수립하고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통해 약 15년에 걸쳐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서독)로 보냈다.

-결국, 청년 일자리도 한국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거네요.

“맞아요.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청년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합니다. 과거 유학 때나 대사로 있을 때 늘 세계의 문제를 항상 우리 문제와 비교해 생각했어요.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과연 우리만의 문제인가? 세계 보편적 문제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결국 우리 청년 문제는 우리 고유의 문제로 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청년재단의 구체적 방향은 뭔가요.

“우린 민간재단입니다. 정부와의 거버넌스(governance)를 하겠다는 거죠. 작년에 청년기본법이 처음 제정됐어요. 국가정책에 청년 분야가 공식적 장르로 들어가게 된 거죠. 이후 전국 236개 지방자치단체 중 220개 이상에서 청년 조례가 만들어졌어요. 즉, 인력과 예산이 확보됐다는 겁니다. 거기엔 필요한 게 있어요. 바로 프로그램입니다. 그 예산을 가지고 어떤 일들을 할 것인가 하는 거죠. 알다시피, 정부조직이라는 게 창의적인 부분에선 한계가 있죠. 실제 정부 부처와 청년이 직접 접촉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청년재단 이사장으로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청년 정책에서의 당사자성이에요. 당사자들의 목소리,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끌어내야 하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정부나 지자체가 예산과 인력 조직을 갖고 있다면 청년재단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는 겁니다. 이걸 통해서 정부와 지자체의 청년 정책에 영향을 주겠다는 계획인 거죠. 청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본보와 인터뷰 중인 정범구 전 독일대사 ⓒ투데이신문

-‘지원’이란 표현은 복지를 연상시키는데, ‘청년을 지원한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계층도 있을 것 같아요.

“그건 꼰대 생각입니다. 나 역시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요. 청년들이 제일 억울하게 생각하는 게 아버지 세대와 출발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부모 세대 역시 힘들었겠지만, 그땐 나름대로 기업에 들어가서 평생 퇴직할 때까지 정년 보장과 연공서열을 인정받던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지금 젊은이들은 출발부터 그런 조건이 안 돼 있다는 거죠. 취업도 어려울 뿐 아니라 예전처럼 몇천, 몇만 명을 뽑는 대기업의 입사시험을 볼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요. 스펙도 엄청 요구하잖아요. 그들이 처해 있는 출발점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요. 그러면 또 어른들은 이렇게 얘기할 겁니다. ‘빠져가지고 말이야, 우리 때는 이보다 더 어려운 것도 주먹 하나로 돌파했는데..’ 그런데 그때는 1인당 GDP가 60~70달러일 때고, 지금 청년들은 우리가 웬만큼 살기 시작한 후에 태어난 세대이기 때문에 출발조건이 다른 거죠. 그런 걸 거버넌스를 통해 녹여내는 고민을 하겠다는 겁니다.”

-실질적인 지원보다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사실 처음엔 돈을 펑펑 쓴 경우도 많더라고요. 3천명을 선발해서 현금을 얼마씩 준다든가, 뭐 이런. 그런데 이런 방식은 민간재단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청년들이 당면한 제일 큰 문제가 일자리, 주거, 교육인데요. 따지고 보면 사실 이건 대한민국 전체 문제죠. 그러니 청년만 뚝 떼서 다른 정책을 하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출발 선상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이나 불평등 같은 건 적어도 평평하게 만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무엇을 지원한다기보다 조건을 만들어주는 거죠. 청년기본법 목적도 청년들이 공정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공정한 기회를 보장한다는 게 기본법의 틀이거든요. 돈과 인력을 정부가 갖고 있는데, 이걸 어떤 방향으로 추진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 재단이 영향을 주겠다는 겁니다.”

-그럼 재단에서는 금전적 지원이 아예 없는 건가요.

“그렇진 않아요. 공정한 기회의 틀도 제공해야 하지만, 일정 부분 금전적 지원도 필요하죠. 청년재단 사업 중에 ‘고립청년 지원 사업’이라는 게 있어요. 일본의 ‘히키코모리’ 문제와 유사한 건데, 고립청년 문제를 들여다보면 심각해요. 개인적으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단순히 내성적이거나 숫기가 없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취업이나 직장 내 경쟁에서 견디지 못하고 밀려난 젊은이들이 고립청년으로 들어가거든요. 사업을 진행하다 보면 신청자 대부분이 부모들입니다. 멀쩡한 아들딸이 집구석에 앉아 꼼짝 안 하니까요. 이런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지원이 필요하거든요. 사회로 끌어내오기 위해서요. 이재명 지사 같은 경우도 기본소득으로 청년에게 얼마를 주겠다고 하잖아요. 과거 경기도에선 청년들에게 지역화폐로 얼마씩 지원한 적도 있고요. 청년재단에서도 과거 비슷한 사업을 한 적이 있어요. 끼니도 제대로 해결 못 하면서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식사쿠폰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청년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청년재단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1호 기부자로 참여하며 출범 당시 많은 관심을 받았다. 2015년 10월 청년희망펀드 모금을 통해 초기엔 ‘청년희망재단’이란 공익법인명으로 출범했다. 현재 청년재단 이사진은 총 8명이다. 청년유니온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김영경씨가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청년재단은 청년지원 특화기관으로 시급하고 절박한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해 국민 기부금을 활용, 다양한 공익사업을 펼치고 있다. 취업 지원은 물론 정부 지원 사각지대 청년들을 발굴해 맞춤형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4월 1일 청년재단은 정범구 전 독일대사를 신임 이사장으로 선임하고 재단을 청년 정책의 종합적 정책허브 기능으로 전환하기 위해 조직과 사업의 전면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영입 제안 1년 거절했지만, DJ ‘도와달라’ 한마디에..

지난 2018년 1월 정범구 신임 독일대사가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비롯한 각국 대사들과 함께 신임장 수여식 후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br>
지난 2018년 1월 정범구 신임 독일대사가 문재인 대통령과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비롯한 각국 대사들과 함께 신임장 수여식 후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유학 생활은 어땠나요?

“10.26사건 한 달쯤 전에 출국했어요. 5·18 광주학살은 광주 외 지역 국민들은 전혀 몰랐지만, 우리는 독일 TV가 24시간 내내 틀어대는 바람에 그 참상을 다 볼 수 있었어요.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 현지서도 민주화 활동을 많이 했고요. 그 바람에 귀국도 늦어졌죠. 결정적으로 늦어진 계기는 광주민주화 투쟁을 보면서였어요. 떠나올 때는 원래 최대 3년 반 이후 귀국하는 계획으로 왔었거든요. 장학기관과도 그렇게 약속하고 갔는데 무한정 길어진 겁니다. 광주 참상 당시엔 학위를 위해 책을 보는 것 자체도 의미 없다고 느꼈고, 공부도 눈에 안 들어오고 그랬죠.”

-미얀마 사태를 TV로 보면 광주참상 장면이 떠오르겠어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으로 보는 지금의 미얀마는 당시 광주에 비하면 아주 양반입니다. 당시엔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처참했거든요. 더구나 해외 ‘안전지대’서 그런 걸 겪으면서 갈등이 엄청 심했어요. ‘내가 지금 뭣 때문에 여기 있나’, ‘개인적 입신양명을 위해서?’ 그런 갈등과 고민은 아마 해외에 나와 있던 사람들 모두가 느꼈을 겁니다.”

-정치권 영입 제안을 오랜 기간 거절한 거로 알려져 있어요.

“그랬지요. 2000년 당시 1년가량 밀고 당기는 영입 제안 과정이 있었어요. 전부 거부했었거든요. 거긴 진흙탕이니까. 그런데 막판쯤에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보자는 겁니다. 해서 만났더니 ‘도와달라’ 그래요. 그게 결정적 계기가 됐죠. 사실 정치학을 전공은 했지만, 현실정치에 들어가는 걸 굉장히 꺼렸었거든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의 직접적인 권유까진 뿌리칠 수 없더라고요. 문 대통령이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정치 입문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계기가 한 번씩은 있는 거 같아요.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하게 됐습니다.”

-진흙탕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셨나요.

“하하. 초선 시절 권노갑 고문이라든가 소위 동교동계가 모든 걸 장악하고 있을 때인데, 그렇게 하는 게 대통령이 하고자 하는 개혁 작업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생각해서 비타협적으로 싸우기도 하고 그랬죠. 당시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했지만 소수 정부로서 아주 여러 가지가 미약했거든요.”

-그런데 초선(16대) 국회의원을 끝내기도 전에 총선 불출마선언을 했어요.

“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나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쪽으로 따라갈 순 없었어요. 나 역시 노무현 후보 당선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잔당들’만 남은 민주당에 남아 뭘 해보겠다 할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접기로 한 거죠. DJ(김대중 대통령)의 개혁을 돕기 위해 들어왔고 민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또 당을 바꿔가면서 할 생각도 없었고요. 그랬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중에 다시...”

지난 2012년 4월, 19대 총선에 출마한 정범구 후보가 충북 괴산군 괴산읍 오일장터에서 상인과 악수하며 지지를 당부하고 있다. ⓒ뉴시스

불출마선언 후 평론가로 돌아갔던 그는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며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창조한국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하며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과의 후보단일화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대선 후 마포 을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 중이던 2008년 2월 "창조한국당의 실험은 실패했다"며 탈당, 통합민주당에 복당했다. 그해 4월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선 서울 중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이듬해 10월 고향인 충북(증평·진천·괴산·음성) 지역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2012년 4월 11일 치러진 제19대 총선에서 그는 2위를 차지하며 연임에 실패, 정계를 완전히 떠났다.

-2012엔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요.

“그땐 정말 완전히 떠났죠. 재선의원이지만 지역구를 세 군데나 옮겨가며 선거를 치러봤어요. 이것도 아마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어요. 시골 지역구 의원도 해보면서 느낀 게 내가 정치판에서 할 일이 별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또 낙선이란 건 부적격 판정을 받은 거니까. 하하. 그래서 4월에 낙선하고 그해 12월 대선 때까지 지역위원장으로 역할을 다하고 떠났습니다. 그 이후엔 낭인생활도 하고. 하하하. 독일 책도 두어 권 번역도 하고, 남미 코스타리카에 초빙교수로도 가서 한 학기 동안 강의도하고 그랬어요.”

-우리는 통일을 얘기할 때 독일 사례를 많이 듭니다.

“독일이 우리보다 먼저 통일을 달성했는데요. 그 중심엔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있죠. 이게 1969년부터 본격화했는데, 기록을 보면 빌리 브란트나 주변 사민당 정치인들 모두 동서독 관계에서 통일을 얘기한 사람이 없어요. 교류 협력 접근 평화공존 같은 얘기만 했죠. 연방제 등 여러 형태의 통일방안이 나왔지만, 그건 선전 구호에 불과한 거죠. 우리 경우도 남이나 북이나 명분용일 뿐입니다. 서로 평화적으로 합의해서 연방 단계를 거쳐 통일을 이루자는 얘기는 할 수 있지만, 그건 그냥 대화를 해보자는 거지 그렇게 해서 통일이 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통일은 결국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 통일하겠다는 말이죠. 우월한 체제가 상대적으로 약한 체제를 흡수하는 방법밖엔 없다는 얘깁니다. 서독은 자기들이 동독보다 우월한 걸 알았기 때문에 통일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면 동독이 다가오지 않을 걸 알았어요. 거부감 가지고. 그걸 우리가 봐야 해요.”

지난 2018년 9월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무개차를 타고 평양시내를 퍼레이드 하며 시민들의 환영에 손 흔들어 답하고 있다. ⓒ뉴시스 

-그래서 나오는 얘긴데요. 통일을 꼭 해야 하나요?

“결론적으로 국가적 목표도 통일이라는 공허함보다 좀 더 구체적인 것. 즉, 평화공존 교류 협력 이런 걸 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나 그렇게 생각해요. 이러면 당장 비판 들어올 겁니다. 반통일주의, 통일을 포기하자는 거냐 뭐 이런. 그런데 감성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녜요. 지금 우리는 두 개의 국가 경험을 하는 거잖아요. 한반도 안에서. 그렇게 따지면 과거 삼국시대도 있었고, 남북국시대도 있었잖아요. 국가라는 건 그때그때 역사적 상황에 따라 가능한 건데 민족이 불변하는 한 말이죠. 그런 현상들을 인정하자 이런 겁니다. 또 우리가 한반도 안에 단 하나의 국가만 고집할 순 없잖아요. 해외 700만 디아스포라, 러시아고려인 중국조선족 재일한인교포 모두 정체성이 다릅니다. 이런 걸 다 인정해줘야지 이걸 전부 하나로 묶으려고 하는 발상은 지금처럼 변화하는 시대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통일 노래를 천만번 부른다고 통일이 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좀 현실적인 목표, 70년 이상 서로의 체제를 일궈 왔으니 현상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거죠.”

-그렇게 보면 ‘통일부 필요 없다’는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 주장도 그럴듯하지 않나요?

“그건 좀 위험하다고 봐요. 명칭이야 어떻든 북한과의 관계를 전담하는 정부부서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일 같은 경우도 내독부라고 독일 내부관계를 다루는 정부조직이 있었어요. 이름이야 어떻든 그게 우리 민족의 생존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잖아요. 이준석 대표가 젊은 에너지로 과거 구보수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 신선한데, 통일부를 해체하자는 주장은 포퓰리스틱한 주장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청년 세대를 대변하는 생각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젊은 세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청년이라는 프리미엄을 부여해서 그 목소리를 과도하게 포장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해요. 청년재단 이사장으로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자고 하지만 말이죠. 어쨌든 통일문제는 우리 민족적 과제인데, 이 문제를 특정 계층의 기호가 다르다고 해서 치우치는 것은 목적 없이 남의 뒤만 따르는 ‘추수주의’라 생각해요. 사회적으로 합의가 필요한 부분은 컨센서스(consensus, 의견일치)를 유지해가야 할 건 가야하고 거기에 다양한 의견을 논의해볼 순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통일부 해체 주장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인으로서는 좀 더 사려 깊게 생각해봤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싶어요.”

돌이켜보면 언제나 새로운 도전의 길 위에 서 있었다는 그.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헤쳐 온 그가 이번엔 ‘청년’을 선택했다. ‘만년’ 봉사의 길에 들어선 그의 행보가 청년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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