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수 작가<br>글 써서 먹고삽니다.<br>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 임승수 작가
글 써서 먹고삽니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 중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분단국가다. 자본주의 미국과 사회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 체제의 대립,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한 친일파와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이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뒤섞여 갈등이 증폭된 결과인데, 현재 남한은 자본주의 체제이며 북한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해방공간에서 북한은 독립운동을 했던 좌파 세력이 정부를 수립하고 소련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했으며, 남한은 친일파인 우파 세력이 친미파로 전환해 미국의 지원 속에서 정부를 수립하고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친소/친미, 사회주의/자본주의, 독립운동/친일이라는 대립구조에서 이미 예측할 수 있듯이 남한과 북한은 전쟁까지 벌일 정도로 상대에 대해 극도의 대립각을 세웠다.

처음에는 체제경쟁에서 북한이 앞서나갔다. 독립운동 세력이 주축이 된 정권의 정통성도 그렇고 경제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내며 남한을 압도했다. 하지만 냉전에서 미국이 소련을 누르고 승리한 이후 북한은 기존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무역 거래가 대폭 축소되고 미국이 군사적 위협과 경제 제재 등으로 압박하고 있는 데다가 자연재해까지 겹쳐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반면 남한은 과거에 가난한 나라였던가 싶을 정도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고 문화적으로도 세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도약했다.

이렇게만 보면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 같다. 하지만 21세기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수준의 빈부격차에, 이윤 지상주의로 인한 무분별한 환경파괴와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다.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위기감이 고조되고, 사회경제적인 양극화는 정치적 양극화라는 형식으로 변용된다. 한쪽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이민자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성을 드러내는 극우파가 힘을 키워가는 가운데, 반대편에서는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좌파적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으며 일례로 미국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이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을 표할 정도가 되었다.

나 역시 인류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라는 틀로서는 한계가 있으며 사회주의적 대안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말과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사회주의의 대중화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분단국가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한다는 건 유독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사회주의 얘기를 꺼내면 대뜸 돌아오는 반응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면 북한처럼 되자는 거예요?”

김대중 정부 시절 남과 북이 6.15 공동선언을 하고 잠시 화해와 교류 협력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를 반기지 않는 미국과 국내 수구 세력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분위기가 금세 역전되어 여전히 남한과 북한 정권 사이에는 냉전 시절 못지않은 한랭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여전히 북한에 대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할뿐더러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분석과 해석이 천양지차다.

북한이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건 사실이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도 미국이 북한의 무역과 외환 거래를 철저하게 막고 있는 제재 상황이 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주장부터, 북한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 자체의 문제라는 주장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북한의 핵과 대륙간탄도탄 개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확연하게 갈린다. 미치광이 전쟁광 세력의 정신 나간 모험적 행보라는 주장부터, 미국의 침공 가능성을 차단하고 협상을 통해 경제 제재를 풀어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는 정치적 군사적 카드라는 분석이 동시에 존재한다.

심지어 좌파 운동권 진영 안에서도 북한의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가 크게 갈린다. 겉으로는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김정은을 중심으로 조선노동당의 고위 간부가 권력을 독점하며 인민을 착취하는 관료주의 국가라는 평가에서부터, 미국의 제국주의적 압박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구체적 현실에 맞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걸고 남과 북의 통일 및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평가하는 쪽도 있다.

이렇게 사회 곳곳에서 북한에 대해 상반되는 주장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병존한다. 정치적인 입장이 서로 다르면 한쪽에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주장을 펼쳐도 상대가 아예 귀를 막아버리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며, 무엇보다도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 있다 보니 북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는 게 여전히 난망한 일이다.

그래서 나보고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일단 나는 양극단의 편향을 경계하는 편이라고 답하련다. 내가 보기에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북한에 대한 과도한 환상을 지닌 사람들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위대한 수령이 이끄는 조선노동당의 모든 행보는 옳고 정당하며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종교 수준의 열광인데, 나는 일단 이것이 그동안 자행되었던 북한에 대한 과도한 악마화의 반작용이라고 본다.

한번은 SNS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맹목적인 시각의 글을 만났는데, 평소에는 그냥 넘어가는 편이지만 그날은 뭐가 불편했는지 대략 다음과 같은 취지의 댓글을 남긴 일이 있다. 조선노동당의 핵심 간부이자 김정일의 매제였던 장성택이 반당 반혁명 종파 행위로 처형당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모든 일에 완벽한 조선노동당이라면 오래전부터 전복을 꾀했다는 장성택은 진작 걸러냈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장성택은 오랫동안 북한 최고위층 간부였으니, 그 자체로 상당히 문제 아닌가?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조선노동당이, 북한이 하는 일에, 오류가 없을 수 있을까?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일 뿐이다.

솔직히 말해 이런 종교 신도 수준의 편향을 가진 사람은 그 수가 많지도 않고 사회적 영향력도 미약해서 나로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쪽 편향은 심각하다. 왜냐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은 데다가, 국가 기구와 제도권 언론이 나서서 조장하기 때문이다. 바로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악마화이다.

무슨 정치범에게 쇳물을 부어서 죽였다는 둥, 누가 숙청되어 총살당했다는 둥 출처도 불확실한 가짜 뉴스들이 버젓이 공중파를 타고 뉴스로 전달되는데, 총살됐다는 사람이 얼마 후 버젓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반복된다. 이미 남한이 북한보다 경제력도 훨씬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북한을 보는 시각에 한해서는 여전히 수십 년 전 냉전 시대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자니 대략 이십 년 전쯤 경험했던 일이 연관되어 떠오른다. 마르크스 <자본론> 학습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하는데, 참가자 중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여학생이 있었다. 원래 한양대학교 의대를 다니다가 뒤늦게 사회학에 관심이 생겨 학교를 옮긴 친구인데, 하루는 <자본론> 모임에 관심을 보이는 학교 친구를 데려오고 싶다는 게다. 대환영이라고 답하면서 어떤 친구냐고 물어봤더니 탈북자란다.

다음 모임에 탈북 여성 두 명(편의상 A와 B로 부르겠다)이 참가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흘렀지만, 마르크스 <자본론>을 공부하는 모임이다 보니 대체로 사회주의나 북한에 대해 오해와 편견이 적은 사람들이라 어느덧 서로 편안하게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A와 B는 성격, 말투, 상대에게 주는 이미지에서 확연히 달랐다. 북한에서 운동선수였다는 A는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었지만, 가끔 털어놓는 얘기가 꾸밈이 없고 진심을 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본론> 모임 사람들을 편하게 느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함께 남한으로 넘어온 가족 얘기를 덤덤하게 들려주는 모습에서도 친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북한에서 전통무용을 했다는 B는 얼핏 쾌활하고 시원시원한 스타일로 보이지만 개인적인 얘기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며, 자신의 출신지임에도 북한에 대한 비판이 불필요할 정도로 과도해 뭔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고 싶은 말을 한다기보다는, 해야 할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진짜 속마음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항상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A와 좀 더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자본론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A와 지하철을 같이 타게 되어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북한에서 살다가 이제는 남한에 와서 살고 있는데,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음, 병원에 갔을 때 사람들이 돈 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아! 그럴 수 있겠네요.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 무상의료니까.”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건데,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무상의료가 실시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살다가 온 사람한테 직접 얘기를 들으니 뭔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병원에 가서 돈 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이상한 장면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땅에 보이지 않는 금을 그어 네 것 내 것 나누는 게 이해가 안 됐어요. 토지는 누가 만든 게 아니고 자연의 선물인데, 공공재를 그렇게 개인이 소유하다니요.”

우리에게는 공기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생소하고 어색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은 사고의 지평을 한층 넓혀주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역시 익숙해진 것을 낯설게 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속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가 물이 없는 공간을 상상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겠지. 아무래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이다 보니 남한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에 적응하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저는 아직 학생이라서 괜찮은데 오빠가 회사생활 적응을 어려워해요.”

“어떤 점이 적응하기 어렵다고 하나요?”

“회사를 여러 군데 옮겼는데 계속 상사와 충돌하는 것 같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자기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직언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인데, 남한에 와서 북한처럼 하다가 회사에서 계속 잘린 모양이더라고요.”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 기업이 대부분 공기업인 데다가 남한의 상명하복식 기업 문화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생활총화’라는 독특한 비판문화가 있어서 말 그대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계급장 떼고’ 공적 및 사적 생활에 대해 자아비판 및 상호비판을 수행한다. 비판이라는 단어의 어감 때문에 뭔가 헐뜯는 걸로 여기기 쉬운데, 그런 건 아니고 일종의 정기적으로 열리는 ‘반성회’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요컨대 생활총화 문화가 체질화된 북한 사람이 남한에 와서도 윗사람한테 대놓고 지적질하다가 속절없이 잘렸다는 얘기다.

나도 이래저래 사회주의 관련 책을 제법 읽은 편이고 북한에서 생활총화를 정기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북한 사람이 남한에 건너와 생활할 때 이런 식의 어려움을 겪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할 수 없었다. 제일 흥미로운 얘기는 영화를 관람한 경험담이었다.

“남한에 와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데, 저는 여느 때처럼 ‘오늘은 어떤 교훈을 얻을까’하는 마음으로 관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사람 죽이고 차량 부수고 건물 폭파하다가 끝나버리더라고요.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어요.”

남한의 영화 산업에서는 제작비를 대는 자본 측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 보니 티켓 판매를 통한 제작비 회수와 추가적 이윤 획득이 중요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면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영화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북한에서는 영화 역시 공공재라서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을 담기보다는 관객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다(오해가 있을까 봐 부연하는데,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영화라고 하면 으레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이라 여겼던 A는, 남한에서 주구장창 때려 부수기만 하는 영화를 접하고는 문화충격을 받은 것이다.

당시 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차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A의 생생한 남북한 비교체험담을 들으며 한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과 이를 토대로 한 운영방식에 따라 구성원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차이가 날 수 있음을 새삼 절감했다. 역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구나.

노동조합이나 진보적 사회단체 같은 곳에서 강의하다가 종종 A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들려주면, 조국 통일을 지향하며 북한에 대해서 열린 시각을 가진 젊은이들조차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서 신기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언론이나 방송 속 탈북자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천편일률적이고 낯 뜨거운 북한 까대기로만 일관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뜻있는 소수 탈북자가 북한의 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알리기 위해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중적인 영향력이 적은 게 솔직한 현실이다. 북한 사람들은 뒷구멍으로 남한 드라마나 영화를 많이들 본다는데, 오히려 우리가 북한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고 폐쇄적인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되는 현실이다.

자본주의 남한이 나름의 장단점이 있듯이 사회주의 북한 또한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 사회다. 남과 북이 평화와 공동 번영 및 점진적인 통일의 길에 들어선다면 군축을 통해 국방비를 줄여 경제발전과 복지 확충에 힘을 더욱 기울일 수 있고, 군 복무 기간을 단축하거나 모병제로 전환할 수 있다. 교류와 협력의 수준을 높여가며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힘을 합쳐 더욱 부강하고 존중받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의식의 전환이 시급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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