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열린 ‘문민정부 출범 30주년’ 기념식에서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대 정부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난제를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계층 간, 세대 간, 신분 간 갈등이 폭발할 수 있는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해 당사자 간의 이해와 양보를 끌어내야 한다. 언젠가는 풀어야할 우리 모두의 숙제라는 점에서 대통령의 과제 설정은 바람직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한국 정치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통령의 무거운 발언이 자칫 한담객설(閑談客說)로 여겨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1955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에서는 주인공 제임스 딘과 버즈라는 불량배가 절벽을 향해 달리는 ‘치킨 게임’으로 승자를 가리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에서는 제임스 딘의 상대역이 옷소매가 손잡이에 걸려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만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무모하고 극단적인 대결이 있을까 싶지만,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는 여야 정치권의 대치는 ‘치킨 게임’을 연상시키기 충분하다. 실제, 지난 대선이후 여야의 행보는 협치를 통해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한 미래비전을 그리는 데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전면전 양상의 정쟁뿐이었다. 여소야대의 구도는 분명 국민들이 정치권에 주문한 화합과 통합의 메시지였지만 정치권의 응답은 없었다. 되찾은 권력에 도취해 민심을 살피지 못했고, 실권한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몸부림에 민생은 뒷전이었다. 그 사이 두 배 이상 올라버린 은행 이자와 난방비에 서민들의 고통은 무겁게 쌓여만 갔다.
오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등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이 있다. 부결이든 통과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사건 연루 의혹에 대해서는 야당의 특검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장외에서도 연일 진보와 보수 단체들이 편을 나눠 대리전 양상의 집회를 열고 있다. 한동안 대한민국 정치는 시계제로다.
이처럼 꽉 막힌 정국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는 건 대통령의 결단뿐이다. 여야 정치권이 극단적 대결로 치닫고 있는 문제의 핵심은 사법적 영역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제기된 의혹에 대한 당사자들의 결백은 법의 테두리 내에서 다퉈야 한다. 법적인 문제를 정치권으로 또 시민사회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국민적 의혹이 있다면 특검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공정하게 밝히겠다는 대통령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이것은 여야 모두에게 정쟁에서 민생으로 방향키를 돌리는 명분으로 작용할 것이다.
며칠 전 통계청이 작년 기준 출생·사망통계 잠정 결과를 내놨다.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수 있는 평균 자녀수)이 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0.78명으로 조사됐다. 현재 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부동의 꼴찌를 기록 중이다. 윤 대통령의 3대 국정 과제는 인구 소멸을 늦추고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목표와 계획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직무 수행 긍정 평가가 여전히 40%를 오르내리는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3대 개혁과제의 추진에는 야당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이뿐인가. 당장 민생관련 법안 처리마저 악화된 여야관계에 갈피를 못 잡는 것이 현실이다. 코로나로 피폐해진 민생을 보듬고, 개혁과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야당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 거추장스런 법적 문제들이 민생문제 해결에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