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독일 대문호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 현대적으로 해석
진정한 삶의 의미는 방황 속에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려는 노력
<수리남>으로 눈도장 찍은 박해수 배우의 신들린 악마 연기
무대 뒤 거대 LED 패널로 컨템포러리 연극 가능성 선보여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신에게 내기를 제안하는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와 그를 쳐다보는 천사들. [사진제공=샘컴퍼니]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신에게 내기를 제안하는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와 그를 쳐다보는 천사들. [사진제공=샘컴퍼니]

【투데이신문 이주영 기자】 고전의 힘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다. 1831년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완성한 희곡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에 통달하고도 인생을 비관하던 노년의 현자 파우스트를 두고 신과 악마 메피스토가 내기를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젊음과 권력 모두를 얻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 매 순간 성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런 그가 마침내 깨달은 진리는 바로 ‘노력하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방황의 가치’다. 현재의 부족함을 인정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인간의 노력,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삶의 의미라는 것이다.

인류는 지대한 노력의 산물로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나 인간 본질은 괴테가 살았던 200년 전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여전히 허상을 좇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을 제대로 운용하는 방식은 목표가 아닌 과정에 있다. 현재에 대한 집중이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는 메시지는 오늘날의 우리조차 감화시킨다.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와 처음 대면한 파우스트(유인촌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와 처음 대면한 파우스트(유인촌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LED 패널과 화려한 무대연출이 돋보이는 연극 <파우스트>

괴테의 역작을 연극으로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양정웅 연출의 <파우스트>는 고전에 대한 선입견을 깨트릴 좋은 기회다. <오징어 게임>, <수리남>으로 눈도장을 찍은 박해수 배우가 ‘메피스토’ 역으로 등장해 극장을 종횡무진하고, 무대 뒤 거대 LED 패널은 광대한 <파우스트> 세계의 시공간적 몰입을 돕는다. 생경하게 들릴 수 있는 희곡 특유의 어투는 배우들의 또렷한 발성 안에 자연스레 스며들고 변화무쌍한 무대 연출과 객석까지 확장된 동선은 관객의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파우스트(박은석 분)’와 ‘그레첸(원진아 분)’의 첫 만남 장소를 놀이공원으로 연출해 그들의 러브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원작에서 파우스트와 그레첸은 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쳤지만, 연극 <파우스트>에서는 솜사탕, 회전목마, 알록달록한 옷과 동물 탈을 쓴 군중 속에서 마주친다. 환상적인 놀이동산과 불꽃놀이 속에서 두 남녀의 눈빛은 멜로적 개연성을 얻고, 관객은 둘만이 공유하는 작은 세계에 풋풋한 사랑이 움트는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를 떠도는 젊은 파우스트(박은석 분)와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발푸르기스의 밤 축제를 떠도는 젊은 파우스트(박은석 분)와 악마 메피스토(박해수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원작에서 연극으로 구현하기 가장 까다로운 장은 ‘발푸르기스의 밤’이다. 다양한 신화, 설화, 민간신앙이 레퍼런스로 쓰여 등장인물 자체가 많고, 악마와 마녀의 축제가 이뤄지는 밤이어서 공간은 몽환적이고 분위기는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현하기 위해 연극 <파우스트>는 축제가 벌어지는 브로켄 산을 높낮이가 다른 바위로 연출했고, 공중에서 조명을 받으며 돌아가는 12개의 팬으로 음습한 향락의 시간을 꾸몄다. 깃털, 망사, 스팽글로 잔뜩 치장한 마녀들이 뱀처럼 교활하게 혀를 놀리고, 음탕한 손짓으로 파우스트를 유혹하고, 서로를 약 올리며 세상의 선한 가치들을 조롱한다. 이 웅장한 혼돈의 주역 메피스토로 분한 박해수 배우의 신들린 연기는 정점을 찍으며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레첸으로 분한 원진아의 폭발적 연기, 결말부 난해함은 그대로

인터미션 이후 그레첸의 방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전부 무대 뒤 LED 패널로 실시간 상영된다. 장치로써 패널이 사용되는 것이 아닌 같은 장을 영상으로 대체하기 때문에 연극을 보러 온 관객들이 화면 속 배우를 마주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고전과 연극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도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에서 관객의 성향에 따라 극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은 한계로 남는다.

감옥에 갇힌 그레첸(원진아 분)을 구출하려는 젊은 파우스트(박은석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감옥에 갇힌 그레첸(원진아 분)을 구출하려는 젊은 파우스트(박은석 분). [사진제공=샘컴퍼니]

극의 마지막 장으로 치달아 감옥에 갇힌 그레첸이 파우스트와 재회할 때 원진아 배우의 연기는 빛을 발한다. 정인을 만난 달뜬 얼굴에서 괴로움에 일그러지는 얼굴로,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는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토해내는 발성으로 시시각각 전환하며 그레첸이 겪어야 했을 정신적 고통과 윤리적 딜레마를 표현한다. 연극 무대에 처음 도전한다는 원진아 배우가 온몸으로 감정을 분출하며 실성하는 모습에 관객은 숨죽일 수밖에 없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양정웅 연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파우스트’ 2개 비극 중 제1부만을 다루었기에 연극 <파우스트>의 결말은 다소 난해할 수 있다. 하지만 가엾은 그레첸이 자신의 과오를 처절하게 뉘우친 끝에 구원받는 광경과, 어리석은 파우스트가 악마의 손에 이끌려 객석, 즉 또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통해 삶에 관한 고뇌로 배회하는 여행자의 사명이 관객의 삶으로 침투하는 서늘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고뇌하고, 쾌락에 젖어들고, 극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거둘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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