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 이소희씨의 이야기

호치민서 한국인 아버지·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2살에 한국행…약 9년간 다문화가정 인식 개선 활동 전념
현재 안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4학년 재학중…승무원 꿈꿔
“다문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차이가 나쁜 건 아냐”

‘이주민’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사람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옮겨 와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이주민은 지난 2021년 12월 기준으로 약 213만 명이다. 현재 외국인 인구가 총인구의 5%를 넘기면 ‘다문화 사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이미 지난 2019년 국내 인구의 4%를 넘어섰다.

이처럼 이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닌 전국 곳곳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웃’이 됐다. 많은 이주민들 중 다문화가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다. 

<투데이신문>은 연재 기획 [내 이웃, 이주민]을 통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이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물론 삶의 숨겨진 그늘을 직접 들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더욱 우리나라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제언들을 담았다.

안양대학교 캠퍼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이소희씨가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안양대학교 캠퍼스에서 인터뷰를 마친 뒤 이소희씨가 사진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황투윗니간(Hoàng Tuyết Ngân)’. 지난 12년 동안 불린 이소희(25)씨의 다른 이름이다.

베트남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소희씨는 12년 동안 이 이름으로 베트남 호치민에서 살다가, 열두살이 되던 해인 지난 2010년 6월 아버지의 고향으로 왔다.

그리고 한국식이자, 아버지의 성을 딴 새로운 이름 ‘이소희’로 한국에서 새출발했다. 이 이름으로 지난 12년간 살아왔고, 앞으로 남은 시간도 한국에서 살아갈 예정이다.

따뜻한 날씨만 경험해봤던 소희씨에게 한국의 사계절은 낯설었고, 자신과 다른 언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말이 안 통한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다. 그의 눈에는 여유롭게 유유자적 지내던 베트남 사람들과 달리 한국 사람들은 몹시도 바빠보였고 치열해보였다.

그 무리에 바로 섞이기엔 쉽지 않았다. 당장 언어는 기본이겠거니와 한국인의 문화, 생활습관까지 적응해야 할 것이 투성이었다.

그럴 때일수록 소희씨는 좌절하기는커녕 과감히 이중국적을 가진 자신을, 그리고 어머니의 국적을 인정하기로 했다. 상황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시도했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소통하며 극복했다. 더 나아가 ‘다문화’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다양성을 알리기 위한 여러 활동에 뛰어들었다.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 다문화 학생 혹은 이주민의 자녀로 살았던 경험을 솔직하게 세상에 드러내자, 비로소 새롭게 받은 ‘이소희’라는 이름이 딱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한국의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됐다.

베트남에서의 소희씨 어린시절 모습. [사진제공=본인]
베트남에서의 소희씨 어린시절 모습. [사진제공=본인]

베트남에서 온 까만 아이

일 때문에 베트남에 온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희씨는 베트남에서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아버지가 퇴직을 앞두게 돼 더 이상은 베트남에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 한국으로 이주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소희씨의 가족은 12년 동안 뿌리내렸던 베트남을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은 앞으로 살아가야할 새 터전이었지만 당시 한국말을 전혀 알지 못했던 그에게는 그저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학업을 이어가기 위해 찾은 성북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그는 큰 고비를 마주했다. 학교 측에서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소희씨가 고학년의 수업 수준을 따라갈 수 없다며 ‘6학년’이 아닌 ‘1학년’부터 다시 다녀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무려 5살이나 어린 친구들과 처음부터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청천벽력같았다.  성장 상태부터 다른 어린 친구들과 같이 지내야 하는 것은 물론 또래 친구들보다 5년이나 밀리는 것을 감수해야 하는 일은 당장 받아들이기 쉬운 게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 측의 제안으로 영어, 수학 등 시험을 봤고, 높은 점수를 받게 돼 6학년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게 됐다. 다만 6학년 개학 전까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모든 수업을 이해하고,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한국어 공부는 필수였지만 언어의 장벽은 너무나도 높고 단단해, 영어와 수학을 잘한다고 쉽게 깰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새학기인 지난 2011년 3월까지 남은 약 8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어머니와 함께 동네에 있는 다문화 센터 곳곳을 돌며 한국어 공부에 매진했다. 눈뜨고 감을 때까지 밥 먹는 시간만 제외하고 언어를 학습해 나갔고, 곧이어 그는 낯선 언어로 진행되는 학교 수업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언어만 해결되면 끝날 줄 알았건만, 고비는 또 있었다.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소희씨는 10여년이 지났음에도 처음 교실에 들어선 자신을 보는 동급생들의 눈동자를 정확히 기억했다. 낯설음 반, 호기심 반으로 가득 찬 친구들의 눈빛이 아직도 눈 앞에 있듯 생생하다고 했다. 

특히 한국에서 낯선 이름인 ‘황투윗니간’으로 반 친구들을 처음 만나게 된 소희씨는 자신을 향한 경계의 시선과 함께 “왜 이름에 ‘아랫니’는 없고 ‘윗니’만 있냐” 식의 유치한 농담과 장난은 물론 차별, 선입견 등에 수없이 마주했다.

베트남이라는 ‘외국’에서 온 까무잡잡한 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반 친구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됐다. 오히려 자신을 보는 시선이 말보다 더 비수로 꽂혀 기가 죽어 있거나 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친 날도 많았다. 더욱이 언어가 능숙하지 않다보니, 그들의 놀림에 제대로 반박할 수도 없어서 더 서럽고 답답했다.

“처음엔 정말 놀리면 놀리는대로 삐져 있고, 뒤로 숨은 적도 많았죠. 그런데 당시 한국어를 잘 모르다 보니까 놀리는 게 놀리는 건 줄 몰랐던 적도 있어서 한편으로 다행이었어요. 미숙한 한국어 실력이 오히려 빨리 극복할 수 있었던 방법이 되기도 했죠.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어차피 같이 한 반에서 1년 동안 보낼 친구들이니까 멀리 한다고 해서 좋을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체육시간 등 팀별로 하는 활동이 있으면 같이 하자고 먼저 다가갔어요. 그때부터 친구들이 저를 다르게 본 것 같아요.”

소희씨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투데이신문
소희씨가 캠퍼스를 걷고 있다. ⓒ투데이신문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기에

점차 한국에 마음의 문을 열어가고 있던 자신과 달리 어머니는 한국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사용한 베트남어 뿐만이 아니라 고국의 습관, 문화 등을 모두 멈추고 새로운 것을 배워야 했다. 외모 또한 한국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에 낯설어하는 사람들의 시선도 견뎌내야 했다.

그럴 때 마다 소희씨는 어머니의 유일한 소통 창구가 됐다. 그는 어머니의 귀가 돼 한국어를 통역해주고 입이 돼 대신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가 외출이라도 할 때면 꼭 붙어 서툰 한국어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어머니를 따뜻하게 살폈다. 

어머니의 또 다른 고비는 바로 ‘외로움’이었다. 한국에 온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아파트 관리직을 하며 취업전선에 다시 뛰어 들었고, 소희씨는 학교를 다니며 학업에 매진했다. 그러나 가족들을 모두 베트남에 두고 한국으로 온 어머니는 매일 낯선 타지, 텅 빈 집에 홀로 남겨 졌다. 그는 그런 어머니의 외로움을 알아챘고 마음 속 깊이 공감했다.

어머니가 힘들어 할 때면, 먼저 다가가 단단한 버팀목을 자처했다. 슬픔에 젖어 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그는 “내가 있잖아, 내가 도와주면 돼”라고 말하며 누구보다 밝게 웃어보였다.

지금까지도 소희씨는 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어머니와 베트남어로 대화하고 어렵고 까다로운 서류 작업 처리 등을 도와주며 누구보다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고 있다.

“한국에 왔을 때 어머니는 언어를 배우는 것을 엄청 힘들어하셨어요. 아직도 언어 문제로 부딪히는 경우가 많고요. 예전에 어머니랑 같이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택시 기사님이 저희를 보시더니 목적지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를 먼저 물어보더라고요. 이런 시선들 때문에 어머니가 더욱 위축되신 거 같아요. ”

가족들의 성원에 힘 입어, 어머니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 갔다. 유창하진 않지만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됐고, 지금은 손재주를 살려 의류 재단일을 하며 한국이라는 곳에 자연스럽게 섞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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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문화장학재단에서 진행하는 다문화자녀 글로벌 문화체험 활동 당시 소희씨의 모습. 

앞장서서 알린 ‘다문화’

소희씨는 자신이 ‘이주민’이라는 것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한국에 오자마자 곧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직은 외국인이 낯선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소희씨는 다소 다른 빛을 뿜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이해해주고 마음껏 섞일 수 있게 해주고, 한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도와줄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성북구 소재 모 사회복지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다른 다문화 가정 여성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등 문화 수업을 들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만나며 힘듦을 공유하고 서로 보듬어 주자, 소희씨는 저절로 용기가 샘솟았다. 받은 상처로 인해 기죽었던 어깨가 절로 펴지고,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중학생이 된 소희씨는 지난 2014년 담임 선생님의 추천으로 우리 다문화장학재단을 알게 됐다. 재단은 다문화 학생들 위한 학업 및 장학금을 지원하거나 각종 교육 프로그램 등을 제공하는 공익 프로그램이다.

그는 재단에서 장학생으로 선정돼 문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그는 멘티로 참여해 해외 국가의 경제, 역사, 문화 등이 담긴 주요 장소에 방문하거나 어려운 친구들을 위해 봉사활동했다. 약 6년 동안 이러한 활동을 이어오며 소희씨는 멘티에서 어엿한 멘토로 성장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다문화 가정의 중, 고등학생 친구들에게 베트남과 한국에 대해 가르쳐주는 것은 물론 때로는 인생 선배가, 때로는 친구가 됐다. 자신이 먼저 겪어왔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그들의 슬픔을 보듬어주며 힘을 불어넣어줬다.

특히 대학 진학을 앞둔 학생들이 부족한 정보와 어려운 입시 과정에 골머리를 앓을 때면 자신이 이전에 습득했던 정보를 공유하고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했다. 그럴 때마다 소희씨는 ‘벅차오른다’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막연하게만 느꼈던 감정이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멘토 활동과 함께 지난 2019년까지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인식개선 프로그램에서 서포터즈로도 활동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다문화에 대해 강의하는 것이 아닌 다문화 가정에 관련된 굿즈, 노래 등을 제작해 홍보하며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다문화가 우리 사회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후 올해 2월까지는 재단 장학생과 현재 활동 중인 대학생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봉사, 서포터즈, 멘토 등으로 약 9년 동안 다문화 인식 개선 움직임에 동참했다.

“우연한 기회로 재단과 알게 돼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어요. 처음으로 제가 먼저 ‘다문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섰고 이로 인해 용기도 얻었죠.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참여를 결심한 계기는 먼저 사람들을 돕는 게 좋았고, 또한 거기서 활동하는 친구들이 모두 다문화 가정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서로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서 많은 힘과 위로가 됐기 때문이에요.”

[사진제공=본인]
우리 다문화장학재단 수료증을 들고 있는 소희씨. [사진제공=본인]

누군가를 도와준다는 것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간 소희씨의 바람은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인생의 방향을 정할 시기인 열아홉에 안양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진학을 택했다. 현재 그는 중국언어문화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며, 관광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있다.

베트남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 관련 학과에 진학한다면, 보다 쉽게 학업에 열중할 수 있었음에도 소희씨는 전혀 다른 언어인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택했다. 다문화 재단에서 활동하면서 언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을 자주 접하다보니,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 이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들이 겪었던 힘듦과 외로움은 자신과 그의 가족과 많이 닮아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움직였다.

희망을 갖고 입학한 대학교에서는 지난 시절에 겪지 못한 새로운 문제들이 소희씨를 찾아왔다. 바로 왕복 4시간을 육박하는 통학 시간과 교통비, 식비 등 수많은 지출이었다.

현재 거주 중인 서울 강동구에서 경기도 안양으로 향하는 길은 고되지만 소희씨는 자신의 꿈을 위해 매일 분주하게 움직인다. 무거운 가방 안은 긴 외출 시간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물과 전공책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부모님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 그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 우수한 성적을 유지한 것은 물론 카페, 빵집 등의 아르바이트에 이어 대학교 내 산업협력단에서 2년동안 오래된 서적을 입력하고 분석하는 연구보조 일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다 보니 취업 준비에도 정신이 없지만, 그는 여전히 이주민,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재단에서 중간중간 소희씨를 필요로 할 때마다 적극 나서서 도와주는 것은 물론 중국어를 공부하면서도 그는 베트남 뉴스 홈페이지를 매일 살펴보며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최근에는 영어 공부를 시작해 견문을 보다 넓히고 있다.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활동에 도전한 것은 바로 ‘꿈’ 때문이다. 소희씨는 승무원이 돼 세계 각국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고, 그 동안의 경험을 살려 낯선 언어, 문화에 고생하는 이들에게 밝은 희망이 되는 게 목표다.

“주변에 다문화 가정이 생각보다 굉장히 많거든요. 그만큼 국민들이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벽을 두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웃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요. 또한 이주 여성분들은 어렵게 한국으로 왔고,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많은 이주 여성분들이 너무 힘들어만 하지 말고 자기만의 삶을 개성 있게 사셨음 좋겠어요.”

베트남은 1년 내내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는 곳이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과 습한 공기만 느껴봤던 소희씨는 한국에 와서야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사계절을 접하게 됐다. 그는 사계절 중 겨울이 가장 생소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추위 때문이다. 몸을 덜덜 떨게 하고 뼛속까지 아리게 하는 매서운 바람을 직면했을 때는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희씨는 겨울이 좋아졌다. 바로 추운 날씨를 잊게 할 만큼 세상 가득 하얗게 채워진 눈이 누구나 행복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것을 처음 본 2010년 겨울에는, 한참이나 하늘을 바라보며 추위는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게 내리는 눈에 집중했다.

다문화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마치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날씨처럼 춥고 시렸지만, 눈처럼 희망이 찾아왔다. 희망을 발견한 소희씨는 점차 단단해졌고 강해졌다. 이렇게 그는 더 이상 겨울이 춥지 않았고, 몸을 움츠리지 않게 됐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땐 비하하거나 차별하는 등 상처받는 일이 꽤 있었어요. 물론 지금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예전엔 거리만 나가도 많이 기죽었었죠. 하지만 다문화 관련한 여러 활동을 하다보니 제 스스로 인식이 바뀌었어요. 우선 세상 앞으로 당당하게 나서게 됐고, ‘차이’라는 것이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차이’는 말 그대로 단순하게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지, 틀린 게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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