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웃, 서태실 씨의 이야기

강사·봉사자·보험설계사…끝없이 도전하는 ‘팔방미인’
지난 2004년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행…자녀 둘 낳아
‘위장 결혼’ 꼬리표도…편견 극복을 위해 한국어 공부 매진
이주여성 48%, 경제활동 인구이나 대부분 단순노무 종사자
“언어교육이 아닌 실제적·구체적인 인재 양성 과정 필요”

‘이주민’의 사전적 정의는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사람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옮겨 와서 사는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이주민은 지난 2021년 12월 기준으로 약 213만 명이다. 현재 외국인 인구가 총인구의 5%를 넘기면 ‘다문화 사회’로 규정하고 있는데,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 수는 이미 지난 2019년 국내 인구의 4%를 넘어섰다.

이처럼 이주민들은 이제 더 이상 낯선 이들이 아닌 전국 곳곳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웃이 됐다. 많은 이주민들 중 다문화가 대한민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하게 노력해 온 사람들이 있다. 

<투데이신문>은 연재 기획 [내 이웃, 이주민]을 통해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매김한 이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물론 삶의 숨겨진 그늘을 직접 들었다. 더 나아가 그들이 더욱 우리나라에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의 제언들을 담았다.

서태실 씨. ⓒ투데이신문
서태실 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박효령 기자】 “위장 결혼해서 한국에 온 거 아냐?”

중국의 신양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왔던 서태실(48)씨에게 한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의 땅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한국에 왔을 때는, 희망찬 미래가 아닌 비수처럼 자신의 가슴 한가운데 내리 꽂히는 편견과 먼저 마주해야만 했다.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줄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외지에서 온 자신을 토닥여주고 따듯하게 맞아줄 한국을 꿈꾸며 부푼 마음으로 도착한 낯선 나라, 남편 하나 믿고 따라온 대한민국. 그 기회의 땅은 입국한 달 2월보다 더 춥게 느껴졌다.

당시 태실씨는 조금의 한국어를 구사할 수는 있었지만, 낯선 곳에서 사용은 다소 어색했다. 그런 자신에게 살갑게 말 한마디 걸어주는 정다운 이웃은 한국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지만, 그의 시간만은 멈춰있었다. 집 안에서 몸을 숨긴 채 자신을 꽁꽁 숨어 감췄다.

그러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다. ‘나의 정체성’, 꿈꿔왔던 정반대의 삶. 이에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에 온지 3개월 만에 비로소 자신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 때부터 태실씨의 인생은 180도 변화했다. 언어를 배우고, 더 나아가 가르쳤고, 다문화에 대해서 알렸다. 자신의 천성을 마주한 듯 교육자의 길은 마치 하늘에서 미리 정해준 운명 같았다.

거침없이 스스로를 찾아 나가자, 놀랍게도 모든 시선은 그의 인생처럼 뒤바뀌었다. 더 이상 차디찬 겨울이 아닌 봄을 닮은 따듯한 시선, 포근한 미소가 그를 향해 먼저 찾아왔다. 그렇게 그는 우리의 이웃으로 스며들었고, 19년 동안 한국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밝게 웃고 있는 서태실 씨. ⓒ투데이신문
밝게 웃고 있는 서태실 씨. [사진제공=본인] 

시리고 아팠던 2004년 2월의 한국

매일 한국 방송과 음악을 틀어놓고 사는 할아버지 덕에 태실씨는 어렸을 적부터 ‘한국’이 친숙한 나라였다. 특히 어머니의 가족들이 전부 한국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자신에게 더욱 가까운 존재였다.

마음속 한편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애정을 담아둔 채 태실씨는 자신의 길을 갈고닦았다. 중국소재 모 전문대학교에 입학해 무사히 졸업했고, 이후 한 회사에 취업해 비서로 근무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워낙 꼼꼼한 성격 덕에 일도 수월하게 해 나갔지만 왠지 삶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회사 집 출·퇴근이 일상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새롭지 않은 삶,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롭지만 재미가 없는 삶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실씨는 2003년 한 남자를 만나게 됐다. 이모의 지인인 그와의 첫만남은 소개로 이뤄졌다. 운명적인 만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모가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라 입이 마르게 칭찬을 한 덕에 그는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만난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한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1년 뒤 남편이 된 남자의 고향인 한국행을 결심했다.

당찬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도착한 한국에서의 생활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당장 태실씨가 마주한 문제는 아직 부족한 한국어 실력이였는데, 낯선 곳에서의 의사소통은 매번 어려웠다. 단어 몇개를 공부해도 천차만별인 억양, 외래어, 사투리 등 난관은 계속됐다. 이에 그는 한동안 전화만 걸려와도 몸이 떨릴 정도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극심하게 두려웠다.

그다음은 한국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중국에서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있었는데, 한국말이 익숙치 않은 외국인이 타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평소 활동하는 것을 좋아하던 태실씨는 지독한 무기력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경기도 부천의 한 마을에 정착한 태실씨를 반기는 것은 바로 ‘위장 결혼’이라는 꼬리표였다. 심지어 몇몇 주민은 그를 향해 “몇 년 뒤에 도망가는 거 아니냐”고 뒷담화를 하곤 했다. 2004년 당시 한국은 다문화 가정에 보수적이었고, 낯설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억울하고 서글픈 마음은 쉽게 다독여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이주여성하면 ‘위장 결혼’ 등 편견이 심할 때였어요. 제일 많이 상처가 된 말이었어요. 한국어를 배워도 문제는 있더라고요.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빠른 말, 사투리 등으로 인해 못 알아 들으면 상대가 뭐라고 하니까 한동안은 전화받기가 무서운 거예요. 울렁증이 생길 정도였어요. 그때 한국은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도 없어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라고 많이 고민했어요.”

서태실 씨가 무료 언어 수업을 했던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의 모습.&nbsp;ⓒ투데이신문
서태실 씨가 무료 언어 수업을 했던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의 모습. ⓒ투데이신문

살아남기 위해 배운 ‘한국어’

건조한 일상이 반복되자, 그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번뜩 생각이 든 것은 바로 ‘언어’였다. 소통이 돼야 자신에 대한 편견도, 오해도 다 깨부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태실씨는 부평에 있는 여성문화회관에서 한국어를 가르쳐준다는 정보를 알아낸 뒤 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부천에서부터 인천까지 평일마다 몇 시간씩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한국어를 배웠다.

“솔직히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우울했어요.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다 왔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3개월 정도 있는데 너무 미치겠는 거예요. ‘한국에 이런 생활을 하려고 왔나’라는 생각도 들고. 저는 항상 뭔가 일을 안 하면 좀 무기력해지는데, 더 심해지다 보니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한국어를 배우러 다녔죠.”

그의 한국어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태실씨는 제주도행 신혼여행을 포기하고 남편 고향인 해남으로 떠나길 결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낀 경비로 남편에게 컴퓨터를 사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컴퓨터는 200만원이 훌쩍 넘어갈 정도로 비쌌지만, 그에게 컴퓨터는 굉장히 필요한 공부 준비물이었다.

결국 컴퓨터를 선물로 받은 태실씨는 혼자서 한국어 타자를 치며 언어를 점차 익혀갔다. 이렇게 8개월간 노력하자, 비로소 한국어를 보고, 듣고, 말하고, 쓸 수 있게 됐다.

컴퓨터의 장점은 언어 학습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그러다 운이 좋게도 한국에 온지 6개월 뒤 2004년 9월에 한 중국어 학원에 취직을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졸업이 어렵다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입학해 무사히 졸업했다. 

그때부터 태실씨의 삶이 달라졌다. 우울하고 쳐졌던 일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찾아왔다. 하루하루가 활기찼고, 삶의 원동력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교육자’라는 길이 신기하게도 자신과 적성과 딱 맞자, 너무 경이로웠다. 중국어 강사로 근무하는 5년 동안 겹경사로 두 자녀를 품에 안게 되는 기쁨까지 누렸다.

출산 후 1년 뒤인 2011년 태실씨가 좋은 기회로 이직하게 된 곳은 인천에 있는 중국어마을문화체험관이다. 이곳은 중구청에서 주관해 운영하는 곳으로, 청소년들에게 중국어, 문화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태실씨는 학생들에게 중국의 언어, 문화 등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직접 중국의 전통 등을 체험하는 것까지 지도했다. 그러면서 많은 학생들과 만나고 소통하며 누군가에게 교육으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뿌듯함이 가득 차 올랐다. 낯선 곳이라고만 느껴졌던 한국 땅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그를 이끌어줄 수 있는 교육자의 길은 마치 하늘에서 미리 정해둔 운명처럼 느껴졌다.

서태실 씨가 과거 제자들에게 받은 편지. [사진제공=본인]
서태실 씨가 과거 제자들에게 받은 편지. [사진제공=본인]

또 다른 도전, ‘다문화 강사’

중국어 강사 생활을 이어가던 도중 점점 욕심이 생겼다. 보다 성장하고 싶었고 달려 나가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주는 제자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약 2년을 다니던 중국어마을에서 휴직을 한 뒤, 2012년 경인교대 ‘이중언어 양성과정’에 입학해 석사 졸업했다. 해당 교육과정은 평일내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는 형식으로 약 1년 동안 진행됐다. 특히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국에서 대학을 졸업해야 하며 한국어뿐만이 아니라 상담, 문화 수업, 모국어 수업이 가능해야 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태실씨를 즐겁게 했지만, 달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수입이 한 번에 사라지는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자신에게는 늘 응원해 주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원에 힘입어 태실씨는 무사히 1년 간의 이중언어 양성과정을 수료했고, 이 길로 학교에서 채용하는 다문화 강사 자리에 지원할 수 있었다.

수료하자 마자, 강사활동을 시작하면서, 그는 부천이주노동복지센터에서 무료로 중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병행했다. 당초 길게 할 생각이 없던 봉사활동은 센터에 자녀들을 보내는 엄마들의 열띤 반응 덕에 점차 규모, 시간을 늘려가다 보니,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중국어를 강의하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강의가 취소되기 전까지 그는 성실하게 강사와 봉사활동을 병행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2011년 이주민 여성 봉사단체인 ‘행복나눔열매’를 창단해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법무부 장관상도 받았으며, 부천 외국인주민 대표자 회의에서 위원장으로 약 2년간 역임하며 표창장까지 손에 쥐었다.

그 사이에 2015년 경인교대 교육전문대학원 다문화교육 석사 졸업했으며, 현재는 사회복지학과 4학년 재학중에 있다. 

몸이 족히 10개는 필요한 바쁜 일정이었지만 태실씨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편견 가득한 시선과 차별에 혼자 아파하고 괴로워했지만, 점차 교육자의 길에 도전하고 적응해나가다 보니 과거에 초라했던 자신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당하게 사니, 자신을 차별했던 사람들 마저 그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다른 이유로는 두 아이의 엄마라서도 있었다. 과거 어른인 자신도 차별과 편견으로 힘들어했는데 ‘나로 인해 아이는 사회에서 어떤 차별을 받고 사람들은 어떤 편견을 갖고 아이를 대할까’ 걱정됐다. 그래서 꾸준히 공부와 봉사활동을 했고, 이후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확 바뀌었다. 또 아이들 교육을 하면서 계속 부모와 접하게 되고 소통하자, 보이지 않던 벽들이 하나둘씩 허물어졌다. 태실씨는 이방인이 아닌 우리의 이웃임을 확인하는 순간이 오게 됐다.

“제가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면서 주변 시선들이 확 바뀌었어요. 아이들로 인해 그 어머님들과 자주 접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하다 보니 ‘육아’라는 공통점 때문에 금세 친해졌어요. 나중에는 이웃분들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칭찬해 줄 정도였죠. 일부 엄마들은 ‘우리보다 더 낫다’라고 치켜세워 주시고요. 이런 덕인지 저희 아이들은 제가 중국 출신인 것도, 또한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반감이 없어요.”

또한 태실씨는 자신이 정체성을 감추려고 하면 아이들도 똑같이 그럴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집안일, 육아로 이미 가득 차버린 하루를 쪼개 공부하고 또 공부하며 꿈을 펼쳐갔다. 그 덕에 그의 자녀들은 엄마의 고향이 중국인 것에 대해 반감이 없어졌고, 교육자로 여기며 자존감도 높아졌다. 이제는 먼저 아이들이 “엄마는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먼저 이야기할 정도다.

지난해 4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1회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시상식에서 태실 씨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제공=본인]
지난해 4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1회 ‘LG와 함께하는 동아 다문화상’ 시상식에서 태실 씨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제공=본인]

가시밭길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

그러나 되돌아보면 태실씨에게 학교는 만만치 않은 곳이었다. 학교에 처음 임용돼 활동할 때, 자신에게 중국어 욕을 하거나 차별을 두는 학생과도 맞닥뜨렸다. 자신은 한국에 온 지 10여년이 지났고, 국적을 취득한 상태라고 말을 해줘도, 학생들은 모두 그를 ‘중국사람’이라고 칭하며 선을 그었다.

이외에도 고용문제가 그를 찾아왔다. 당초 정규직으로 시작한 자리가 점차 계약직으로 바뀌어가는 것은 물론 연차가 쌓여도 임금은 오를 기미를 안보였다. 이로 인해 교사들이 모여 파업을 하고, 목소리를 내도 변화가 없었다. 그나마 계약직으로 유지하고 임금을 협상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다.

하지만 태실씨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 교육자로서의 삶은 마치 하늘이 정해준 길인 것만 같아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을 책상에 앉아 바라보는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고, 그들이 자신으로 인해 변화됐을 때 너무나도 큰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사일을 시작한 당시 맞부딪힌 차별에도 특유의 긍정적인 힘으로, 진심으로 학생들을 대하며 10년 동안 가르쳤다. 그러자 그들은 점차 다문화에 대한 벽을 깨부수고 이제 다 함께 모여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태실씨는 아직 자신보다 한국말이 서툴고 어려운 가족들을 위해 최근에는 보험설계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한국에는 어머니와 이모들, 형제들과 함께 들어왔는데 그만 언어가 가능하다 보니 일자리 구하는 것부터, 각종 서류처리 등을 도맡을 수 밖에 없었다. 공식 서류상에 기재된 단어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 자칫하면 가족들이 큰 금전적 손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전하게 된 자격증이었다. 그는 장녀로서 가족들을 챙기고 다독이는 큰 역할을 했다.

“일부 한국 사람들이 이주여성들을 볼 때, 다 저학력이고 허드렛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런 편견들을 깨고, 앞으로도 이주여성에 대한 시선이 나아지는데 보태고자 더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 외에도 봉사활동, 보험설계 일을 하면서 이주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4월 발표된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결혼이주여성 노동실태와 현황’에 따르면 결혼이주여성 중 48%는 수입을 위해 일을 하거나, 구직활동 중인 경제활동인구였다. 이주여성 10명 중 4명(40.3%)은 단순노무 종사자인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정부는 언어교육에만 초점을 둔 것 같아요. 하지만 이주여성에게는 일자리를 찾아서 수입을 나게 해 준 뒤, 정착하게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취업을 할 수 있는 인재로 양성시킬 수 있는, 꾸준하고 지속적인 과정이 절실해요. 또한 ‘이주 배경 청소년’의 정착을 위한 제도가 부족한 실정인데, 이를 보강하고 이주민들의 목소리에 더 많이 귀 기울여줘서 실제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하기 전, 들어온 대한민국 사회는 이주여성에 대한 척박한 불모지였다. 일자리가 있다고 한들 돌봄 노동이나, 청소 등 비정규직이 대다수였고 색안경 낀 시선들로 가득해 그들의 인생을 마음대로 ‘위장 결혼’으로 결말짓곤 했다. 그들도 남들처럼 배울 수 있고,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음에도 억제당하고 억압당한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오롯이 태실씨 혼자 겪어왔고, 헤쳐나갔다.

비록 걸어온 길이 어렵고 척박했다지만,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자신의 뜻을 지켜온 태실씨에게 현재 삶은 ‘클 태(太), 열매 실(實)’인 그의 이름과 같다. 앞으로도 더 큰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그의 인생 속 시련은 그저 열매를 맺기 전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자신의 인생을 밝지만 침착하게 기자에게 풀어낸 태실씨는 마지막에 당당하게 되물었다.

“저 정말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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