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아포칼립스》 도서출판b

[사진제공=책짓는 아재]<br>
[사진제공=책짓는 아재]

영국의 문인 D. H. 로렌스의 계시록 주해서인 《아포칼립스》를 읽다.

한 동안 학계를 주름잡던 묵시와 파국 서사 열풍이 어느 때부턴가 사라졌다. 그것도 매우 신속하게. 원래 이 열풍은 헬조선이라는 자학적 용어가 횡행하던 현실과 궤를 같이 하는 동시에 서구의 지적 상품을 발빠르게 들여온 것이기도 하다.

서구의 지적 트렌드에 민감한 탓에 학계의 유행은 몇 년 만에 사라졌으나 대중이 직면한 고통스런 현실은 여전하다. 따라서 대중문화에서 이를 재현하는 양태도 마찬가지로 지속되고 있다. 당장 얼마 전(2023년 5월)에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던 드라마 <택배기사>가 바로 아포칼립스 장르에 속한다.

아포칼립스, 묵시인가 묵시록인가

학계와 출판계를 보니 아포칼립스에 대한 혼동이 적지 않아 심기가 불편했다. 특히 우리 시대를 수식하는 형용으로 사용할 때, 대부분 묵시록적이라거나 계시록적이라고들 번역했는데 전혀 맞지 않다. 그냥 묵시적이라고 해야 옳다.

묵시(默示)는 제국의 정치적, 종교적 압제로 신음하던 고대 근동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연원한 것으로, 어두운 세상 속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신의 계시를 가리킨다. 신구약 중간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버티게 해준 믿음의 토대가 바로 묵시였다.

묵시 혹은 계시가 기록된 작품을 묵시문서 혹은 묵시문학이라고 한다. 존 콜린스의 글을 인용해보자. “묵시란 일종의 계시문학이다. 그것은 어떤 초현실적인 존재가 특정 인간을 수령자로 하여 전하는 계시를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는 글이다.”

물론 묵시문서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다. 묵시문서는 시대적 고난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만 엄혹한 시대를 살아갔던 것이 아니다. 가령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은 조선시대의 묵시문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SF, 호러 등 장르문학 안에 아포칼립스가 주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물론 대중이 소비하는 아포칼립스물은 어떤 초자연적 존재의 계시가 아니라 시장(대중)의 요구에 맞춘 문화 상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중의 불안에 말을 건네는 것은 진짜 묵시 또한 마찬가지다.

「(요한)계시록」과 《아포칼립스》

문제가 되는 묵시록 혹은 계시록은 통상 (고대 근동의 묵시문서 가운데 하나인) 「요한의 묵시록」(가톨릭-공동번역 기준) 혹은 「요한계시록」(개신교-개역개정판 기준)을 가리킨다. 물론 고대 근동의 묵시문서는 여러 종이 있다(「에녹서」, 「제4에스라서」, 「바룩서」 등). 그 중 성경에 수록된 작품은 구약의 「다니엘서」와 「이사야서」 24-27장, 그리고 신약의 「요한계시록」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묵시문서가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의 《아포칼립스》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석이다. 기독교계의 일반적인 주석과는 류를 달리하는, 이단적(反기독교적)인 포지션에 서 있는 작품이다. 보통의 기독교인에게 권할 만한 책은 아니지만, 아포칼립스 담론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다르다.

“「계시록」에 대한 학술적 주해서가 대부분 기독교적 시각에서 종말 서사의 의미를 해석하는 ‘신학’ 저술이라면, 로렌스의 『아포칼립스』는 「계시록」을 읽는 척하면서 오히려 고대 이교도들의 상징과 세계관에 경도되는 책일 뿐 아니라 유대-기독교 전통이 가진 정신적 병리성에 주목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전면에 드러나 있는 책이다. 어디에서 바라본다 해도 『아포칼립스』는 분명히 ‘반-기독교적’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문형준, 「옮긴이 해제 – 너의 집을 버려라: ‘종말의 계시록’에 맞서는 ‘재생의 아포칼립스’」, 『아포칼립스』, 309쪽, 이하 「옮긴이 해제」)

《아포칼립스》의 번역자는 문형준 박사로, 파국 서사를 국내 인문학계에 처음으로 소개한 연구자다. 이 번역본은 꼼꼼하고 친절하게 작성된 많은 각주와 깊고 넓게 구성된 역자 해제가 돋보인다. 예전 나남출판사에서 번역된 《로렌스의 묵시록》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로렌스의 묵시가 우리에게 주는 것

역자의 친절한 도움에 기대어 이 번역을 읽고 나면 로렌스의 독특한 사유와 세계관에 대해 눈이 열릴 것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요한계시록」이나 묵시사상에 대해 지식 제공을 의도하지 않는다. 즉 지식으로 머리를 터치하기보다 상상으로 가슴을 자극하는 데 목적이 있다.

“로렌스가 문학적 상상력으로 설명하는 고대의 이교적 상징들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상상력으로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우리의 답답한 현실을 자각하는 이미지로서 느낄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문형준, 「옮긴이 해제」, 316-317쪽)

여전히 우리 시대는 암울하다.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용어는 사라졌어도 그것이 지시하는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탈조선하는 것을 택하기도 어렵다. 한국 바깥이 천국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때 북유럽이 관심을 끌었지만, 북유럽 이민자들 상당수가 역이민했다고 한다.

바벨 도서관의 사서
인간은 세우고 신은 허문다.
인간의 지식 탐구는 끝이 없는 수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앎에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소박한 지적 탐구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불안과 불만, 그리고 분노를 표현할 이미지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갈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킬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로렌스가 강조하는 것도 사실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역자 문형준의 글을 인용함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계시록」의 종말 비전은 세상의 집을 버리고 하늘의 집을 구하라고 비장하게 말한다. 반면 로렌스의 재생 비전은 네가 자란 집을 버리고 온 세상을 집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로렌스는 ‘아무나’에게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려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아무나’가 아니라 ‘누군가’가 되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신이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로렌스가 건네는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다. 『아포칼립스』를 읽을 필요가 있다.”(문형준, 「옮긴이 해제」, 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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