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원석 작가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띄우는 위험한 욕망으로의 초대-자기계발서②”

   
 

【투데이신문 이광명 기자】인문학이란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찰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지혜를 얻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문학이 요즘 수많은 자기계발서의 홍수 속에 단순히 자신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원석 작가는 “당신들이 아무리 열심히 자기계발을 해봤자 돼지가 될 뿐이야! 차라리 다 같이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고 외친다. 지난 호에 이어 이원석 작가와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라는 책을 중심으로 이 시대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책에 보니 자기계발서의 변천사가 윤리적 계보에서 신비적 계보로, 이제는 감정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왔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자기계발서가 허구이며 허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할 때마다 더 교묘한 수법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 그 가장 좋은 사례가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이라는 것은 시대와의 불화를 조장한다. 위대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불운한 삶을 살았다. 유명한 철학자들은 주로 독신이거나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크산티페가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그렇게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겠는가. 그녀의 바가지가 인류의 정신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혹은 비트겐슈타인처럼 ‘결혼은 개뿔’ 이런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문학을 통해 자기계발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인문학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놀랍고 교묘한 진화인지 모른다. 물론 거짓이다. 예전에는 CEO와 학자가 분리돼 있었지만 이제는 합치겠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너럴 모터스를 경영한다면’ 이런 책이 나오고 있다. 공병호씨가 고전을 강독한다. 놀라운 이야기다. 그러나 인간의 조건에 대한 심층적 탐구가 결여된 자기계발의 가르침은 결국 근본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 좋은 자기계발서는 있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전을 제시하는 등의 큰 목적이 아닌 소소한 테크닉을 알려주는 정도에서 그쳐야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시간관리를 위한 팁이라든지 몇 가지 생활의 기술에 대한 업그레이드를 제공해주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좀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자기계발이 아닌 서로계발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를 같이 돌보겠다는 그런 식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좀 어색하긴 하지만 일부러 ‘서로계발’이라는 어색한 조어를 해봤다. 물론 그것은 더 이상 자기계발서가 아닐 테지만.

▲ 그런 교묘한 방식의 자기계발서에 대한 예시로 보보스를 언급했다.

- 보보스는 철저하게 자기계발을 자기 삶의 기본 원리로 잘 구현하고 있는 엘리트들을 보여주는 관찰지다. 굉장히 해학적으로 쓴 코믹소셜로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하나의 롤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책을 보는 사람들이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책에 나온 대로 당신들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책 서론에 보면 보보스들이란 뉴욕타임즈의 결혼섹션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전제 조건은 부모님들이 전문직종 종사자들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에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 보보스들이 추구하는 가치의 밑바탕에는 천박한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있으나, 마치 정신적으로 고결함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 보보스는 데이비드 브룩스가 책에서 말한 것처럼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다. 즉 부르주아의 재력과 보헤미안의 감성을 아우르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처럼 돈 밖에 모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존의 부유층과는 달리 정말 세련된 감성을 가진 상류층의 출현인 것이다. 와인을 한 병 따더라도 “이 와인은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혹은 “아프리카의 통제 되지 않은 그들의 불타오르는 어떤 것을...” 등의 서사를 가지고 포장하는 거다. 그들은 어차피 바다 속 깊이 가지도 않을 거면서 심해 100미터 아래서도 버틸 수 있는 시계를 차고, 결코 히말라야를 등반하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신고, 알래스카를 가지 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입을 수 있는 방한복을 입는다. 즉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력으로 자기를 구성하고 꾸미고 치장하는데 소비한다. 예전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썼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내가 입고 먹으며 살아가는 모든 것이 나를 증명한다. 나를 우아하고 격조 있는 존재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거다. 보보스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고. 나머지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태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이른바 ‘일분 백’이 등장한 것 아니겠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발견되는 샤넬가방 말이다. 사실 짝퉁가방이 더 많을 거다. 왜 그렇겠나? 샤넬을 통해서 나도 격조 있고 우아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거다. 사실 진짜 상류층은 샤넬을 잘 안 쓴다지만. (웃음) 비슷한 맥락에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마치 내가 뉴요커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식인 거다.

▲ 그러면 그런 사치를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계층과 동경하며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데, 자신에게 여유가 있으니까 향유하며 사는 사람들 보다는 그것을 따라하려고 급급해 하는 현상에만 부정적인 입장인건가?

- 보보스를 옹호 한 적은 없다. 당연히 그런 소비가 얼마나 위선적인가? 마찬가지로 소비를 중심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저급한가? 그것은 잘못이라고 보고 있다. 소비를 중심으로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재력이 삶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 작가님의 경우는 어떤가. 그런 자각을 하고는 있지만, 지금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 하에 살아가고 있다. 부에의 동경을 향한 비판적 시각과 동시에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내적 갈등이 있을 것 같다.

-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다.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성찰의 대상은 부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기 위해서 왜곡된 노력을 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부자에 대한 열망이 애초에 당연히 생기는 욕망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좀 더 나은 삶을 위한 욕망은 있지만 이정도로 욕망을 팽창 시키는 건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사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정도는 기본적인 노력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얻을 수도 있는, 적당한 노력에 적당한 보상이 기대 되지만 일부만 더 큰 노력을 하는 사회다. 특히 저는 그 사이에서 엄청난 큰 노력을 하고 싶지는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 인생 모토가 ‘케세라세라(될 일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이기 때문에 엄청난 노력을 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려는 욕망은 없다. 적당한 노력으로 적당한 성공이 있으면 기쁠 것 같다. 그런데 운 좋게 내가 책을 냈는데 초대박이 났다, 그럼 뭐 감사하겠지. (웃음) 그것까지 부인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건 나의 노력 이외의 범위고 돈 때문에 비참해 지지 않을 정도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저 그렇게 비참해지지 않으려고 적당한 마음으로 살면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나. 어쩔 수 없이 보편적인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아니다. 아까도 계속 말했듯이 갇혀있는 자기 계발의 관점이 문제다. 저는 ‘나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이 땅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든다면 이 땅에 태어난 보람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산다. 그렇다고 내가 언제나 착하고 거룩히 산 것은 아니다. 제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으며 이중적인 모습도 있다. 진실을 말하다가도 어떤 때는 자신을 변명하고 무언가를 가리고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이니까. 그러나 그 모든 총합을 따져볼 때 내가 좀 더 합당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과 나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을 같이 하지만 그 안에 선과 악, 빛과 그림자를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한편 잘되더라도 저의 노력만으로 잘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 부모님이 보여준 교육적 환경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됐다. 남들과 달리 특히 아버님은 제 앞에서 책 읽는 모습을 항상 보여주셨다. 제가 며칠 전 11시가 넘어 집에 갔는데, 그때도 아버지께서 서재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더라. 은퇴한지가 5년이 넘으신 분이 여전히 공부를 하신다. 내가 남들보다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아버지가 보여준 모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이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난 이렇게 노력했으니 너희들도 할 수 있어.” 이런 말을 못하겠다. 제게 주어진 것이다. 절대로 공평한 출발점이 아니란 걸 안다. 만약 이 인식을 지워버리고 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문제이고 잘못이고 타락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생각한다. 단지 ‘나는 그 부분에서 운이 좋은 사람이야.’라고.

▲ 이야기를 듣다보니 인문학이란 본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분열과 시대와의 불화 및 싸움이 일어난다고 했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그런 관점에서 조금 더 인문학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굉장히 오해를 하고 있지 않나.

- 인문학이라는 게 별게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 근원적인 성찰을 한 결과물이다. 그런 근원적인 성찰 중에서도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 그게 바로 인문학이다. 각 시대 사람들은 그 시대의 룰을 따라 살아간다.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인문학적인 통찰과 텍스트들은 각 시대의 룰에 대한 옳고 그름을 탐구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이른바 시간의 테스트로부터 살아남은 것들로 시대적 한계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다. 최근에 어떤 책에서 “고전에 너무 속지 마라. 고전도 그 시대 책이다.”라는 글귀를 봤다. 참 맞다 하면서도, 고전이란 해석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룰을 넘어서는 안목을 정해줄 수 있는 측면이 반드시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시대의 룰과는 다른 자기만의 룰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고,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락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건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추락할 수도 있는 자유다. 다만 그 자유는 적어도 우리 시대의 닫힌 새장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준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주인공이 약을 먹고 깨어나 보니 배터리를 벗어나 있었고 그 결과는 황폐한 곳이었다. 그 황폐한 진실을 볼 수 있는 자유를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어쩌면 거기에 등장했던 사이퍼처럼 매트릭스 안에서 뇌의 전기 신호를 받으며 거짓 스테이크를 써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문학은 말한다. 그게 안 좋은 거라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게 인문학의 통찰이다. 물론 배가 찬 소크라테스 혹은 굶주리지 않는 소크라테스가 되면 그게 제일 좋다. 그러나 인문학은 어쨌든 돼지는 되지 말라고 한다. 배부르든 가난하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는 최악이다. 배고픈 돼지를 양산하고 있다. 자기 계발서 천권을 읽어도 대부분 배고픈 돼지가 된다. 반면 인문학을 통해 배부를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소크라테스는 될 수 있다.

▲ 그럼 인문학 공부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가.

- 근원적인 얘기부터 한마디 하겠다. 원래 고대의 공부는 머리에 지식을 담는 게 아니고 몸을 바꾸는 것이었다. 공부는 ‘쿵후(工夫)’하고 어원을 같이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집안이 어떤 무술 고수 놈한테 풍비박산이 났다. 그래서 원수를 갚고 싶은 나는 무술의 고수를 찾아간다. 배울 돈이 없어 삼일간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하니 그제야 고작 물을 길으라고 시킨다. 그래서 물을 긷고 나무를 떼면서 삼년을 일만 하며 보낸다. 드디어 삼년이 지나 스승이 나에게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랍게 이미 몸이 만들어져 있다. 실은 물을 긷고 나무를 떼면서 내 몸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이란 이미 만들어진 몸에 기술을 얹어주는 것에 불과 했다. 1980대년 대 나왔던 영화 ‘베스트 키드’에서도 역시 세차하고 페인트 칠만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가라데 동작을 배우는 기본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와 같이 참된 공부는 서서히 내 몸을 바꾸는 것이고 습관과 욕망을 바꾸는 것이다. 심신상관이라는 말처럼 몸이 바뀐다는 것은 마음이 바뀐다는 것과 같다. 그것이 공부다. 몸과 마음이 바뀌기 때문에 나의 행동거지와 자세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 읽고 듣고 접한 뒤에 내 삶이 바뀌는 것까지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공부가 아니다.

▲ 구체적인 방법도 좀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

제게 공부법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게 대답을 하라면 일단 좋은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겠다. 본인에게 뭔가 영감을 주는 고전이 제일 좋은데 그 고전을 어디까지 읽느냐 하면 그 책이 나를 읽어 내리기까지 읽어야 한다. 나의 삶과 나의 내면을 지나 나의 어두운 그 이면까지 읽어 내려갈 때까지 읽는다. 그 순간 나의 삶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독서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고전은 소리 내어 읽기를 권한다. 나의 입을 통해 나와서 음파를 매개로 삼아 다시 내 귀에 들어오는 방법이다. 그 뒤에는 암송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에게 와 닿는 것들을 외워서 읊조리는 것이다. 논어나 도덕경, 금강경, 성경 등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을 소리 내어 읽고 외우면 의미심장한 변화를 줄 수 있다. 그 텍스트가 내 내면을 읽어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고전의 텍스트를 내 삶의 콘텍스트(맥락)에 얹어놓아야 한다. 가능하면 일주일 이상 그 구절을 곱씹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인간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일주일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최소한 일주일 정도 묵히고 삭히고 생각을 해야 한다. 물론 하루만에도 변할 수는 있지만 반응도 굉장히 미미하고, 유의미한 변화를 주지도 못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면 그것으로 남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뇌리에 남는 텍스트들과 암송했던 텍스트로 일주일 넘게 곰삭혔던 문제들을 상대와 이야기하고 주고받으면서 약간의 논쟁과 토론도 하고 비판적인 반응도 얻는 것이다. 그렇게 내 입을 통해서 귀로 들어오고, 암송을 통해서 들어오고, 삶 속의 깊은 성찰을 통해서 들어오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들어올 때 내 삶이 변화될 가능성은 커진다. 물론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누적이 되면 아마도 이번 생애에서 망할지도 모른다. (웃음) 우리 사회가 불우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 그에 앞서 내가 왜 변화하고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다. 배부른 돼지가 되려는 것은 당장에 나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준다는 유인이 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된다면 뭐가 좋은가. 그 이유를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간단히 말해서, 첫째 당신들은 배부를 확률이 낮다. 왜 배부를 확률이 낮은가하면 당신들의 입에 들어갈 빵을 빼앗아 창고에 쌓아놓는 놈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회가 그렇다. 당신들이 배부른 돼지가 되고자 하면 대부분의 당신들은 배고픈 돼지가 될 것이다. 이것을 바꾸려면 함께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나 혼자의 유익이 아니라 나와 너를, 개인과 이 사회를, 내가 살아가는 오늘과 우리 후손이 살아갈 내일을 다 끌어안고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럴 때에 당신의 삶도 지금보다는 덜 배고플 것이고, 덜 가난할 것이고, 더 용이하게 연애와 결혼을 하고, 주거공간을 마련할 수 있고, 더 어렵지 않게 자녀의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당신과 당신 가족의 영달만 추구하는 미시적 합리성을 작동시킨다면 거시적으로 그것은 광기가 된다. 그런 것을 저는 돼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 가족 뿐 아니라 이 사회를, 당신과 당신 가족의 오늘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내일을 생각할 수 있을 때 그것을 소크라테스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바로 그 개념,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 혼자 잘 살겠다는 생각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 책에 보니 작가님은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짱돌을 던지라고 말했고, 투표를 독려했고, 서로계발을 해야 한다며 그에 대한 롤모델까지 제시했다.

- 짱돌을 들으라는 것은 물리적인 짱돌이 아니라 담론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개인의 변혁과 사회의 변혁이 같이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 사회 변혁이라는 것은 물리적 혁명이라기보다 우리 삶을 구성하는 질서와 문법체계의 변혁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짱돌의 의미는 이 사회를 바꾸는 일에 앞장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개인으로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공동체부터 시작하는 것이 용이하다. 성산 마을 공동체를 예로 들자면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힘을 합치다보니 마을 전체가 달라졌다. 그와 같이 우리 지역 공동체의 가시적인 작은 일부터 시작하자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인문학 공부를 해서 담론 변혁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모색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가시적인 지역공동체의 변화에 접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내일 우리사회의 전체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표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우아하고, 격조있고, 쿨하게 “이런다고 바뀌겠어?”하는 마음으로 투표를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가장 파괴적인 선택이라고 생각을 한다.

▲ 끝으로 작가님의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 현재 공부에 대한 책과 우리 사회에 논의되는 음모론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 더불어 우리사회 대중들의 욕망의 변혁을 위해서는 담론의 변혁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교양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양혁명을 위한 책들을 계속 쓰고자 한다. 원래는 우파들이 교양축적을 하고 일부 좌파들이 거기서 혁명을 일으킨다. 교양은 혁명을 전제로 한다. 물론 나 자신은 보수이자 우파라고 생각을 하며 전혀 혁명을 생각하지 않지만, 좌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우파로서라도 우리 사회는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더더욱 필요한 것이 교양의 축적이다. 그런 책들을 더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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