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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신문 정지훈 기자】인천 부평구 십정동에는 90년대 후반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춘듯한 옛 동네가 있다.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드라마 <응답하라 1988> 등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도심 속의 관광지이자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청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이곳. 바로 십정동 달동네 ‘열우물 마을’이다.

‘열 개의 우물이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옛 정취 가득한 이 마을은 논란을 빚던 재개발이 최근 결정됐다. 내년부터 이곳은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집들 대신 아파트 5600여 세대가 들어설 예정이다.

언제까지고 남아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 추억을 곱씹을 수 있는 장소가 돼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인 것일까. 지난달 31일 기자는 마지막을 준비하는 열우물 마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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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작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층 아파트와 달동네로 나뉘어 대비를 이룬다. 아파트와 달동네 사이의 도로는 어쩌면 ‘도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오전 9시, 전철 1호선 동암역에서 내려 열우물 마을로 향했다. 대로변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100m쯤 들어가며 고개를 들자 빽빽한 지붕의 기왓장들이 열우물 마을을 바르게 찾았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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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진입로에 다다르자 식품과 문구류 등을 함께 판매하는 구멍가게 ‘상정 슈퍼·문구’가 눈에 띈다. 슈퍼 앞 이른바 ‘뽑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동구슈퍼 앞 장면이 떠오른다.

슈퍼 앞에서 동네 재개발에 관해 열띤 대화를 벌이고 있는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김모 할머니(78)는 “동네가 철거되면 어디로 가야할지 걱정”이라며 입을 열었다. 이어 “막내딸이 매일 같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하지만 딸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그냥 동네 사람들 모여 사귀고 웃고 떠드는 것이 좋을 뿐인데 그마저 못하게 되면···”이라며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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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를 지나서 각양각색의 페인트 물감으로 단장한 계단을 올라 좁은 골목길에 닿으니 벽면을 화려하게 수놓은 벽화들이 기자를 반긴다. 화려한 회화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담은 벽면의 그림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오후 1시가 지나고 배고픔이 올 무렵 골목의 작은 포장마차를 찾았다.

접시 가득 쌓인 떡볶이, 순대와 직접 담그셨다는 개복숭아 차를 건네주시는 양모 할머니(69). 열우물 마을의 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양 할머니는 이곳으로 20대 초반 이사와 올해로 48년 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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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달동네라는 단어만으로도 정감이 느껴지고 이웃 간 동고동락하며 사는 장면이 그려진다”며 인사를 건네자 “그건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오히려 삭막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양 할머니는 “이 동네는 정말 서로간의 정이 많았다”며 “젊어서부터 함께 애기들을 키워나가며 아픔이 있으면 함께 아파해주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며 살아왔다”고 정들었던 사람들을 떠나가게 하는 재개발 논란과 관해 속상하다는 심정을 말했다.

이어 “사람들이 떠나고 빈집들이 많아진 지금은 동네가 휑해져 무섭기까지 하다”며 “24시간 문을 열어놓고 살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낮에도 문을 잠가놓고 살아야 한다”는 변해버린 동네의 모습을 전했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동네를 지키는 어르신들에게 재개발 논란은 여간 깊은 상처를 남긴 게 아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이웃들은 해마다 떠나가며 남은 이에게 아픔을 안겼고 마을은 폐허가 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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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도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동네 아래 자락에 위치한 열우물 마을의 노인 회관에는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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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마을의 ‘왕언니’로 통하는 오대성 할머니(87).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던 오 할머니는 열우물 마을에 온지 40여년, 거주하시는 어른들 중 최고참 급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 할머니는 “사람들에 대한 정, 내 집에 대한 정은 어떻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저 세상에 가는 날까지 여기서 살고 싶다”며 재개발에 관한 안타까운 심정을 전했다.

이어 “떠날 사람들은 이미 떠났지만 난 이곳이 ‘내 집’이고 다른 곳에는 더 이상 ‘내 집’이 없기에 떠날 수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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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로 인해 빈집들이 늘어가 삭막해져가는 산동네 이야기는 비단 열우물 마을 뿐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찾은 열우물 마을은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들과 조화를 이루기에는 그 높이가 한 없이 부족했지만 이곳 주민들만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삶의 터전 그 자체였다.

곧 추억 속으로 사라질 열우물 마을은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 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온 삶의 전부다.

이곳에서 수십 년을 지내며 쌓아왔던 추억들과 정을 어느 누가 책임지고 보상할 수 있을까. 이들은 오늘도 내일에 대한 근심으로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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