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집단주의 간 갈등으로 풀어본 꼰대 신드롬

▲ ⓒ투데이신문-김종현 일러스트레이터

한국 개인주의-집단주의에 기생해 왜곡시킨 ‘이기주의’
꼰대 논란, 이기적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 간 문제

‘개인주의=이기주의, 집단주의=이타주의’ 등호 성립 안 돼
이기주의-이타주의, 개인주의-집단주의와 각각 어울려

이타적 개인주의-공동체주의, 서로 대립하지 않아
공공선 유지하는 건 소속된 개개인의 견제와 노력

개개인과 타자 대한 존중과 이해 필요해
이기심 제거하고 잃어버린 공동체 되찾아야

【투데이신문 남정호 기자】 최근 꼰대 논란과 더불어 <코리아 엑스포제(KOREA EXPOSÉ)> 구세웅 편집장의 ‘개저씨는 죽어야 한다(Gaejeossi must die)’라는 제목의 글이 한동안 폭발적인 인기였다.

그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부모의 지나친 사랑을 받으며 방임된, 그렇게 자신을 신으로 여기며 우주의 중심에 두기 위해 이상하고 잘못된 질서를 남에게 강요하는 ‘개저씨’는 사회악으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간의 다툼으로 바라본 꼰대 논란에서 죽어야 하는 건 바로 ‘이기주의’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라는 두 관념에 기생해 이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그 개념을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이기심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이 지금의 꼰대 논란에 대한 방점이다.

전통적인 농경 공동체가 무너지고 틀만 남은 한국의 집단주의는 급격한 산업화가 몰고 온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 등의 부작용으로 인해 이기심으로 그득해져 갔다. 그렇게 집단주의는 ‘집단이기주의’가 됐다.

반면 급격한 산업화와 함께 한국으로 유입된 서양의 개인주의는 그 기반인 자유주의의 미성숙으로 전통 없이 무차별 유입됐고 천민자본주의와 더불어 폭발한 이기심에 그대로 덧씌워졌다. 그렇게 한국의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됐다.

‘내’가 없고 ‘우리’만 있는 한국 사회. 이 한국사회에 녹아있는 집단주의적 성향과 이기심이 어우러진 집단이기주의. 급격히 유입돼 이기심에 사로잡힌 한국의 개인주의. 결국 지금의 꼰대 논란은 이기심으로 덧칠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즉, ‘나’의 이기심과 ‘우리’의 이기심 사이의 다툼으로 볼 수 있다.

<투데이신문>이 기획한 개인주의-집단주의 간 갈등으로 풀어본 꼰대 신드롬, 그 세 번째로 한국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의 다툼에서 이기주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또 개인주의-집단주의는 양립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꼰대 논란은 해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다.

개인주의=이기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가장 큰 오해를 꼽는다면 ‘개인주의=이기주의’라는 등식일 것이다. 이 두 관념 사이의 등호(=)는 한국의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의 다툼에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그 어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individual)을 중시한다. 그에 반해 이기주의(egoism)는 자아(ego)를 중시한다.

더 자세히 보면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는 ‘in(부정형 어근)+divid(나누다)+ual(형용사 어미)’로 나뉠 수 있다. 말 그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어떤 전체, 사회의 최소 구성단위를 뜻한다. 즉, 개인이라는 단어는 사회의 가장 작은 구성원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면, 자아(ego)는 라틴어로 ‘나’를 어원으로 하며, 지금에 이르러선 ‘나’를 넘어선 ‘자아’로 의미가 확장돼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아라는 단어는 ‘나’라는 주체와 함께 자기 자신의 생각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한마디로 개인주의는 사회 최소 구성단위로써의 모든 개인을 존중하지만, 이기주의는 나, 그리고 나의 자아만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성, 타자 수용성에 대한 두 관념의 차이가 극명히 갈린다.

또한 ‘개인주의=이기주의’와 더불어 성립된다고 오해하고 있는 ‘집단주의=이타주의’ 등식 역시 허상이다. 집단이기주의라는 용어가 이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집단이기주의에서 집단은 이기주의에서의 ‘나의 자아’가 된다. 즉, 이기주의는 이타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일 뿐이지 집단주의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얘기해온 꼰대, 그리고 한국의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의 문제는 바로 이 ‘이기적 개인주의’와 ‘이기적 집단주의(집단이기주의)’ 사이에 존재한다.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오찬호 박사는 “사실상 집단주의는 항상 나쁘게 흐를 수밖에 없는 개념”이라며 “흔히 말하는 공동체주의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집단주의는 뜻 자체가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한다는 게 아니라 개인의 개성을 없애는 개념”이라며 “집단주의는 이미 공동체주의를 넘어선 시대 퇴행, 착오적인, 폭력적인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오지랖을 인정의 한 종류로 여기는 한국의 집단주의와 전통 없이 수용된 개인주의, 그 기반인 자유주의의 미성숙 등은 한국인들이 개인주의를 ‘이기적 개인주의’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급속한 자본주의의 성장에 이른바 천민자본주의가 사회에 자리 잡으면서 개인의 이기심은 폭발했다. 이런 개인의 이기심은 기존 집단에 반하는, 정확히는 ‘집단의 이기심에 반하는 개인주의’로 재정립됐다. 그렇게 한국의 개인주의는 곧 이기적 개인주의가 됐다.

하지만 진정한 개인주의는 나 이외의 개인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다. 이타주의와 잘 어울린다는 환상이 있는 집단주의 역시 이기주의와도 쉽게 결합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주의=이기주의’, ‘집단주의=이타주의’의 등식은 성립되지 않으며 이기심과 이타심이라는 개인의 인성에 따라 개인주의, 집단주의 모두와 어울릴 수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집단주의

앞서 이기심이 개인주의나 집단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확인했다. 그리고 현재의 꼰대 논란과 한국의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의 다툼은 이기적 개인주의-이기적 집단주의 사이의 문제라는 것도 짚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집단주의는 어떻게 일그러진 것일까?

이화여대 한국학과 최준식 교수는 계간 <사회비평>에 기고한 <한국 사회의 배타성-차별과 배제의 사회심리학:한국적 집단주의의 실체>에서 한국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사회문화의 최대 문제는 우리와 남을 지나치게 구별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과거에 대부분 한 마을에서 태어나 그 인근에서 살다가 죽었다. 마을이란 작은 단위에서는 모두가 아는 사람(내집단)이었다. 평생 모르는 사람을 만날 일이 적다보니 모르는 타인(외집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이 필요 없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인들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지나치게 나눠 남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갑자기 지난 50년 동안 전근대적인 농업 사회에서 매일매일 불특정 다수의 타인을 만나야 하는 도시 산업사회로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외적인 하드웨어는 급하게 바뀌었지만, 머리에 장착된 소프트웨어는 바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김용석 교수는 <우리 안의 이기주의, 우리 밖의 개인주의>에서 과거 전통 사회에서의 집단은 집단주의였지 집단이기주의는 아니었으며, 농본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는 그 자체가 결속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평가했다. 때문에 이기주의는 집단공동체의 조직 내에서 겉으로 잘 발현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런 집단적 전통 공동체가 붕괴된 오늘날은 가족 같은 소규모 공동체적 집단이나 학연, 지연 등 각종 연으로 엮인 집단들만 남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의 ‘나’가 천민자본주의와 황금만능주의의 산물인 이기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다 집단적 이득을 취할 때만 그 이득을 위해 결집하면서 집단이기주의가 나타나게 된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에 집단주의나 개인주의는 제대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가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한국 개인주의-집단주의, 양립할 수 있나

그럼 한국의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는 다툼을 멈추고 양립할 수 있을까? 먼저 가장 우선돼야 할 부분은 두 관념에서 이기심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기적 개인주의를 배제한 개인주의를 이타적 개인주의라 정의한다면 이타적 개인주의가 저항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요하는 부분이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 헌신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는다.

조직심리학자 헤르트 홉스테드(Geert Hofstede)의 연구 결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개인주의 지수로 평가된 미국의 경우 극심한 빈부 격차와 기회의 불균등 등 문제점도 많지만, 자발적인 봉사와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 등 공동체에 대한 헌신이나 기부 등이 보편화돼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개인주의는 자신 이외의 모든 개인에 대해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 역시 따라오며 사회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기적 개인주의는 나의 자아만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존재, 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인식이 흐리다. 때문에 사회성이 없다.

그렇기에 이타적 개인주의는 이타적 집단주의인 공동체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타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 공동체의 공공선을 유지하고 엇나가지 않게 바로 잡는 것은 공동체에 속해있는 개개인의 견제와 노력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에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대한 많은 말들이 있지만, 그중에 19세기 영국의 저술가 프레드릭 파라(Frederic William Farra)는 “개인의 자유가 그의 이웃의 재앙이 될 때 그 자유는 끝나며, 또 끝나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파라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인주의에서 ‘나’는 내 자유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웃의 재앙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관계이며 사회성이다. 그렇게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는 보완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 

꼰대, 그 현실적인 해결 방안은

앞서 말한 대로 한국 개인주의-집단주의 간의 양립은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이를 통해 두 관념의 다툼에서 파생된 꼰대 논란 역시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이기심을 제거한다는 필요충분조건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꼰대 논란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방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문화연구학 박사 이원석 작가는 “우선 사회가 바뀌어야 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개인이 이 사회를 바꾸기는 너무 어렵다며 개개인의 자기 변혁을 제안했다.

그는 “이 사회를 못 바꿔도 개인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며, 자기계발식의 바꿈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자기 변혁의 관점에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등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오찬호 박사는 “지금 교육이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며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적 토대를 상식적으로 갖춰 개인이 교육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박사는 “최저임금 같은 분배의 문제 등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허약하다 보니 ‘교육이 바뀌면 된다’는 말을 하면서도 ‘우리가 지금 그런 거 고민할 때야’는 식의 말이 나오는 것”이라며 “이 같은 지표들이 좋아져야 개인이 교육에 보다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윤인진 교수는 뉴스나 SNS 등을 통해 행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게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사람의 의식을 개선해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반칙을 했으면 호루라기를 불고 옐로, 레드카드를 들어야 자기가 잘못한 걸 안다”며 “지금까지 반복돼 온 그런 행위를 했을 때 자기가 언제든 세상에 알려질 수 있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위험성, 경각심을 주는 게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전했다.

위에서 전문가들이 말한 해결방안을 짚어보면 △사회를 바꾸진 못하더라도 이 사회에서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자기 변혁적 관점에서의 공부의 필요성 △분배 문제 등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가 갖춰져 개개인이 교육에 보다 관심을 쏟을 수 있는 환경 조성 △뉴스나 SNS를 통해 과도한 꼰대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것 등이다.

우리는 그동안 익숙한 가족, 친구, 동료 등 다른 이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라고 요구하는 이기심을 부리진 않았나? 또 이를 ‘나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남발한 건 아닐까?

‘내 자유는 타인의 자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는 개인주의의 명언처럼 우리에겐 개인과 타자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보다 필요하다. 지난 고도성장기에서 잃어버렸던 우리의 공동체를 되찾고 천민자본주의, 황금만능주의로 증폭된 개개인의 이기심을 제거해 나가야 한다.

더 이상 성장을 위해 ‘우리가 지금 그런 거 고민할 때야’하는 식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회피해선 안 된다. 더 이상 물질만으로 우리의 삶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동안 지나쳐왔던 것들을 뒤돌아 볼 때다.

참고 자료

<개인>(맑스사전)
<개인, 개인주의, 공동체주의, 이기주의>(나무위키)
<우리 안의 이기주의, 우리 밖의 개인주의>(김용석)
<한국 사회의 배타성-차별과 배제의 사회심리학:한국적 집단주의의 실체>(최준식, 계간사회비평,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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