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들의 목자’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의 철학과 예술
‘화가들의 목자’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의 철학과 예술
  • 박애경 발행인
  • 승인 2019.03.12 15: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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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화의 거장’ 금보성이 들려주는 보이지 않는 기적

【투데이신문 박애경 발행인】 미술에 문외한이 필자에게 화가를 인터뷰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그저 인터뷰이에게 작품세계와 기획 의도 등 일반적인 질문만 던질 뿐, 창작기법 등 테크니컬한 부분과 장르에 있어서는 입도 떼어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또는 예술인을 인터뷰하는 일은 반드시 그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기자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금보성아트센터 관장이자, 한글회화 작가인 금보성 씨를 만나는 일에 일초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손을 뻔쩍 들고 자청한 것은 ‘금보성’이 가진 묘한 매력 때문이었다. 미술계에 지연이나 학연이 1도 없는 그가 지금은 우리나라 유일무이 한글회화 거장으로서 명망을 받을 뿐 아니라, 조건 없는 미술계 지원으로 ‘전설’이라는 최상의 닉네임이 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2월 끝자락,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마지막 몸부림치듯 겨울색이 짙었다. 서울 평창동 골목길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금보성아트센터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50회 순회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 맑은 유리문을 열자 고소한 커피향이 나를 반긴다. 마치 산중턱에서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털보네 산장’ 주인장처럼, 베네치아 골목길 아주 작은 카페의 주인장처럼 그가 나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이 진한 커피향에 이내 사라져버린다. 갤러리 입구에 마련된 소박한 카페테리아에 앉아 방문객을 맞는 금보성 관장의 모습에서 권위적인 색채는 절대 찾아 볼 수 없었다. 편안했다.

그의 이력 중 가장 큰 호기심을 갖게 된 전공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한글회화 작가로서 명망을 갖춘 그가 미술이 아닌 신학 전공자였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가 신학자의 길이 아닌 화가로서, 그리고 예술경영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Q. 미술이 아닌 신학을 전공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A.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자칫 종교적으로 비춰질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사실 인터뷰하는 지금도 조심스럽다. 나는 할아버지가 100년 전 한국교회를 개척하신 기독교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일명 모태신앙이다. 신학대를 가게 된 이유는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집안 분위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들어선 길이었다.

 

Q. 목회자의 길을 뒤로하고 미술계에 몸담게 된 계기는?

A. 내안에는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에 대한 욕구가 더 크게 자리 잡았다. 15년 동안 선교사로 해외 각지를 돌아다니면서도 철학자, 인문학자들의 사상에 심취하고, 수많은 미술작품을 흠모하고 그것을 보기위해 찾아다녔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나의 가장 우선순위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러한 나의 열망을 감히 드러내지도 못했다. 교단을 비롯한 주변의 편견과 파문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내가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것을 알지 못했을 만큼 철저히 내재된 열망을 숨겼다.

19세에 시문학이라는 잡지를 통해 등단해 총 7권의 시집을 냈지만 한 번도 내 본명으로 출간하지 못했다. 금보성이라는 본명대신 금요비, 금로, 백제인, 기원석, 진종해 등의 필명으로 문학 활동을 했었다. 화가로서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선교사이면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 화가로 활동한다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지탄을 받을까 염려됐기 때문이다. 목회에 집중하지 않고, 세속적인 모임에 휩쓸린다는 비난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목회일을 하면서 신학과 내가 하고자하는 예술을 어떻게 접목시킬까 늘 고민했다. 해답은 초창기 한국 기독교를 설파한 선교사들의 정신에서 찾았다.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들이 개화기 조선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가 아니라 병원과 학교부터 세우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치료해주고 조건 없는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들의 이러한 진심에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고, 감동받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된 것처럼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작품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미술이 건강하게 뿌리내릴 수 있는 예술선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트센터를 마련해 화가들을 위한 복지와 아카데미 공간을 마련하기로 맘을 먹었다.

Q. 이곳 금보성아트센터가 바로 화가들을 위한 병원과 학교와 같은 곳인가?

A. 그렇다. 이곳은 화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공간이다. 마치 전시는 건강검진을 받는 것과 같다. 자신의 그림이 건강한지를 평론가 등 전문가들을 통해 진단받고, 치료가 필요하면 조율을 통해 회복한다. 치료는 교육을 통해 이뤄진다.

전시와 진단, 교육까지 선교사들이 그러했듯 이곳도 무상으로 지원한다. 일반 갤러리와 다른 점은 전시작품 판매수익을 작가와 나누거나 일체의 대관료를 작가에게 받지 않는다. 교육에 필요한 비용 역시 작가들에게 부담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그저 대가(代價)없이 나누고 소통하고자 했던 선교사들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공간에 기독교 정신을 녹여냈다고 하면 비기독교인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줄 수도 있고 선입견을 가질 수 있기에 일부러 드러내고 싶지 않다.

 

Q. 지원규모와 대상이 궁금하다.

A. 연간 40명 정도 지원한다. 지원자들의 학벌 등 외부적인 조건은 절대 보지 않는다. 작가의 역량과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저 위로와 치료가 필요한 작가라면 누구든 그 대상자이다. 내가 보는 것은 작가의 본성과 심성이다. 신학은 내게 사람의 심성을 느낄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쳤다. 이들 중 한사람이라도 피카소처럼 국가를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다면 나의 임무는 그것으로 족하다.

 

Q. 무상지원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운영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운영은 어떻게 하는지?

A. 지난 30년 동안 화가로, 아트센터 관장으로 일해 오면서 귀한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그 인연들이 나의 그림들을 아낌없이 사줬다. 사실 나는 나의 그림 값으로 이 아트센터를 운영하고 그밖에 문화 활동 지원을 하고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매일매일이 기적과 같다. 기적의 힘이 꼭 필요한 요소요소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쩌면 내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을 지키고 살리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조력자들의 의지에 의해 지탱되는 듯하다. 나는 그저 이 아트센터의 관리인일 뿐이다. 비용절감을 위해 직원을 두지 않고 혼자 일하고 있다.

 

Q. 다양한 문화지원사업을 돕고 있다고 했다. 어떤 일들을 하는가?

A. 아트센터는 미술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내악 4중주 등 음악분야와 전봉건 문학상 등을 지원하고 있다.

 

Q. 1억 원이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상금을 주는 ‘한국작가상’ 공모전을 주최해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A. 한국작가상은 60세 이상의 원로작가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요즘 갤러리와 화랑이 젊은 신진작가들 중심으로 움직이다보니 원로작가들이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들은 깊은 곰삭음과 사뭇 긴 기간의 번뇌와 사색을 통해 우리다움을 표현해내고 지켜오면서 한국 미술을 발전시켜왔다. 이들의 공적을 빗대어 볼 때 1억 원이라는 상금은 결코 많은 돈이 아니다. 또한 한국작가상은 원로작가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매년 두 명의 신인작가를 선정해 3500만원의 창작지원금을 수여한다.

Q. 이제 화가 금보성의 작품세계가 궁금하다. 우리나라 유일무이 한글회화 작가로서 명망이 높다. 특별히 한글을 작품 소재로 삼은 이유는?

A. 시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시어에 색깔을 입히는 일을 시도했었다. 그러다 한글에 색을 입히면 색다른 그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한글을 색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묘한 흥분이 나를 일깨웠다. 애국심 같은 것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고나 할까? 내 그림을 통해 우리 한글의 우수함을 널리 알리고 또한 민족의 자긍심이 새겨지길 기대했다.

스무 살에 첫 전시회를 가진 후 31년이 지나서야 회화를 넘어 조형 등 다양한 장르까지 작품 활동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한글 회화의 거장’이라는 별칭도 얻게 됐다. 한글의 ‘한’은 크고 깊고 우주적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글’은 소통, 치유, 나눔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글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다. 이러한 한글을 현대미술로 변화해내는 작업을 거치면서 ‘우리다움’을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저 나의 그림에서 숨은 그림 찾듯 자음과 모음 등 활자만을 찾으려한다. 하지만 나는 내 그림에서 큰 나라, 큰 백성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하고 머릿속에 정신적 사리를 심길 바란다.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금보성 작품의 출발은 문자, 즉 한글이다. 한글을 모티브로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한 것이 그의 조형세계로서의 콘셉트 즉 문자예술이다. 신조형주의자들이 조화와 질서가 담긴 새로운 이상을 표현할 방법을 찾은 것처럼 금보성은 문자로 어떻게 높은 회화성과 예술성을 가질 언어가 가능한가를 오랫동안 자신의 예술에 절대적 이상향으로 설정했다.

그는 철저하게 문자의 형상을 바탕으로 대칭과 비대칭을 자연스럽고 복합적으로 구성하고 결합한다. 문자는 직선과 정사각형 등 기초적인 기하학 형태를 통해 일정한 법칙성 안에서 질서를 가지며 안정적인 조형미를 이룬다. 특히 조형성에서는 큐비즘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말레비치처럼 순수한 형태에 의한 화면구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시각적인 질서의 배치로 문자의 생김새와 색채로 그 도상(Icon)의 하모니를 연출한다.

승화된 문자의 감동을 따뜻한 사람들의 심장에 들려주겠다는 금보성의 작업은 한글이 단순한 도형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넘어 구체적인 휴매니스트로서의 조형언어가 된다는 점이다. 금보성은 로만 오팔카처럼 자신의 회화에 개념적 접근을 시도하고, 지속적인 실험과 초월적인 작업을 통해 장로와 재료를 초월하여 한글텍스트와 한글의 정신을 작업으로 추출해 내는 최초의 문자리얼리스트일 것이다.

Q. 현재 삶의 모습과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A. 새벽 4시까지 틈만 나면 작업을 한다. 그래서 작업실과 생활공간을 가리지 않고 내가 움직이는 동선마다 화구가 준비되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아트센터는 순전히 나의 그림 값으로 운영되기에 허락되는 시간 모두 작업에 열중한다. 한 작품이라도 더 완성해야 수익이 생기기 때문이다. 매일을 기도로 시작한다. 이곳이 창작의 수고로운 짐을 진 자유로운 영혼의 쉼터가 되길 바라는 게 간절한 기도제목이다. 문득 하나님이 나를 ‘화가들의 목자’로 삼으신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웃음)

향후 계획은 개인적으로는 전 세계인에게 한글화의 매력적 정신과 정서를 보여주고 싶고, 아트센터가 예술인의 나눔과 소통의 장으로 단단히 뿌리내려 대한민국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꿈의 공간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화가 금보성 관장을 만나던 날은 그의 50회 기념순회전 서울전시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50회 기념순회전은 1월에 인천 잇다스페이스를 시작으로 2월 서울 금보성아트센터, 현재는 그의 고향인 여수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춤추는 한글회화’라는 타이틀로 개최되는 여수전시는 3월 28일까지이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필자는 하늘빛, 꽃빛, 물빛 가득한 캔버스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우리글의 춤사위를 마주대하며 한참을 서 있었다. 춤사위는 봄의 선율에 따라 생동감과 박진감을 더하는 듯했다. 그 속에서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찬란함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