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  고등학교 친구에겐 아파트가 두 채 있다. 한 곳에선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세를 주었다. 

두 채를 합해 25억원 정도 된다. 그러나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재에 밝다거나, 세상 돌아가는 일에 남다른 촉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둔한 거 너도 잘 알지 않냐. 그런데 변두리에 아파트 하나 마련했더니 가만히 있어도 집값이 오르더라. 시세차익 노리며 찾아다닌 것도 아닌데 이사 갈 때마다 올랐다. 부동산만이 유일하게 큰돈을 벌게 해주더라. 내가 그걸 20대 때부터 알았더라면 진작에 부동산에 투자했을 것 같다.”

회사일 말고는 달리할 줄 아는 게 없다며 퇴직 이후를 걱정하는 친구는 아파트를 팔아 건물을 사야 하나 불안해한다. 그는 딱히 탐욕스럽거나 악당이 아니다. 과도한 욕망에 절은 부동산 투기꾼도 아니다. 하지만 건물주가 돼서 월세를 받아 생활하는 삶을 고려한다.

사람의 욕망은 따지고 보면 단순하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위기를 막아줄 만한 것들을 미리 충전해 두려 한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서로의 욕망을 침범하며 마찰할 수밖에 없다.

일상에서 그 마찰면의 온도를 낮추는 윤활유가 관습과 예절 같은 규범들이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남에게 피해를 주지말아라. 우리가 도덕이라 부르는 이러한 규범들은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와 ‘피해 보기 싫다’ 사이의 충돌을 미리 막아준다. 도덕은 갈등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공동체의 이익을 늘린다. 이를 위해 각자가 원하는 바를 조금씩 규제하는 데에 합의한다.  

그리고 사회가 비대해지면 도덕 이상의 강한 구속력을 가진 법과 제도가 필요해진다. 이를 통해 복잡한 사회의 다양한 감정충돌은 균형지점을 찾는다. 즉 법과 제도는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이익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 최고 수위로 강제하는 장치다. 모두가 반드시 따르겠다며 합의한 경계선이다. 

이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게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공공의 도구다. 어떤 정치가나 정치집단도 대중의 감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 정책을 펴는 이유도 주거와 관련해 사람들의 감정충돌이 위험수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당연히 부동산 시장에는 내 친구처럼 노후를 걱정하는 넉넉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나의 부모님은 십 수년 전에 무리해서 대출을 끼고 아파트를 샀다가 그야말로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 내몰렸었다. 요령 없는 아버지를 갑갑해 하시던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과감하게 결정 내렸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자식인 나의 미래도 함께 생각한 결정이었겠지만, 내 인생에도 파편이 날아들었다. 

나의 부모님은 손해라도 볼 게 있었지, 손해를 보고 말 것도 없는 청년들은 부동산 앱에 떠 있는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방 한 칸을 찾아 지문이 닳도록 화면을 스크롤 한다. 그러나 수요자를 끌어들이려 과장한 허위매물이 적지 않아서, 사진과 다른 열악한 방들만 소개받다가 발길을 돌리는 청년들의 가슴엔 절망의 발자국이 찍힌다. 그들 눈에 아파트 두 채를 가진 내 친구는 어떻게 보일까.

모두가 불안해한다. 오늘의 불안은 내일의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의 욕망을 비난한다.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사는 이상 사람들의 갈등은 어떻게든 관리되어야 한다. 그걸 하는 게 정치의 몫이며 정부의 의무다. 시민들은 투표로써 그 의무를 잘 이행할 정권을 뽑아 보다 나은 사회적 합의를 도모한다.

따라서 현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큰일 나겠어요. 우리 다같이 잠깐만 멈춥시다.’를 사회적으로 합의한 것이다. 이때 시민들이 위임한 권력은 제도를 통해 모두의 참여를 강제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일부 제한한다. 그 결과 내 친구 같은 다주택자뿐 아니라, 새로 집을 사려던 청년층에게도 길이 좁아졌다. 각자 조금씩 손해를 감수하고서야 우리는 집값 안정화라는 어떤 균형점을 찾게 됐다. 집값의 안정화란 부동산을 둘러싼 감정충돌의 안정화다. 즉 정부 정책이란 당대의 요구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규범이다. 

이러한 새로운 규범, 특히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서 기존의 욕망실현을 제한하는 규범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진영이다. 반면에 보수진영은 개인의 욕망을 정글의 법칙 수준으로까지 보장하던 관성을 유지하려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법칙을 사회생활의 기본기로 여기며 살아왔다. 따라서 보수진영 인사가 문제적 행위를 하더라도 다같이 암묵적으로 합의한 정글의 법칙을 따르다 일어난 일이므로 그다지 비난받지 않는다. 

인간은 욕망은 속도 무제한의 도로를 원한다. 약간의 틈만 생기면 기꺼이 욕망을 꿈틀거리는 게 사람이다. 게다가 익숙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 그래서 진보진영이 주장하는 변화는 모두에게 매우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모험이다. 이 모험의 유무가 진보진영을 향한 도덕적 잣대를 엄격하게 만든다. 

불확실하고 낯선 주장을 사람들이 따르게 만들려면 손해를 보고서라도 항상 주장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것은 엄연히 대중의 감정 문제이며 그만큼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도덕을 좁게 적용하는 법의 허용치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해진다. 위험한 모험을 주장하는 이들에겐 신뢰의 기준이 되는 도덕적 잣대가 엄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새로운 부동산 정책을 내놓은 청와대의 공직자 중 일부가 부동산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이를 실천한 것이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상가 취득 문제가 민심을 자극한 것은 이 때문이다. 부동산 취득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더라도 그의 행위는 정부의 국민감정 관리 의무에 반한다. 또한 강력한 규제책에 합의하여 다소의 부자유를 감내키로 한 시민이 정치적 신뢰를 이유로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에도 맞지 않는다. 

물론 나는 그가 기자들에게 보낸 사퇴 메시지의 억울한 뉘앙스에서 금액도 비슷한 데다 노후를 걱정하는 내 친구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결단을 끝까지 제지하지 못한 아버지도 동시에 본다. 그럴 수 있다. 김 전 대변인뿐 아니라 부동산 시장에 참가한 이들의 욕망은 대부분 잘못이 없다. 서로를 조금씩 자극하며 이끌다가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낯선 모험을 하는 정부의 녹을 먹으며 정책의 철학을 말해야 하는 대변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사퇴메시지에 다음의 문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의 보도를 보니 25억을 주고 산 제집이 35억, 40억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사고자 하는 사람을 소개해주시기 바랍니다. 시세차익을 보면 크게 쏘겠습니다. 농담이었습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부동산 시세차익은 누군가에겐 인생의 문제이고, 누군가에겐 절망적인 분노의 대상이며, 우리사회의 모두에겐 위험수위에 이른 사안이다. 자신의 정당한 의도를 강변하기 위해 이를 농담의 지렛대로 삼을 수 있는 가벼운 인식. 그러면서 아내의 결정이었노라며 자신의 행위가 가진 겸연쩍음을 알고 있었던 걸 보여준 실마리. 

그의 태도는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욕망의 관성과,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의 두 지대가 불분명하게 겹쳐진 결과다. 그는 부동산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엄중한 고뇌와 정치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한 발 빗겨 서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틈만 생기면 무제한의 욕망은 꿈틀거린다. 

이번 논란은 김 전 대변인 개인에 국한시키고 잊을 일이 아니다. 사회적 갈등의 정치적 해법을 위해 두고두고 의식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변화를 바라는 모두가 늘 곱씹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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