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앞서지 않아야 앞선다
[칼럼] 앞서지 않아야 앞선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5.23 13: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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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만물의 법칙에 따릅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앞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천하의 앞에 서지 않으면 일마다 이루어지고 공을 세우게 되어서 그의 견해는 반드시 세상을 뒤덮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높은 벼슬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비자(韓非子, ?-BC233)>

잘 지내면 되지 이기긴 뭘 이겨

현재 대학에 다니는 딸아이 가진이가 고등학교 1학년에 다닐 때의 일이다. 1학기 초에 학급회장이 되었다면서 임명장을 받아왔다. 이때 뿐만 아니라 얘는 내 기억에 고등학교 3학년 때를 제외하고 늘 회장이 되었던 것 같다. 이래서 주변의 학부모들한테 “나가라고 시킨 거 아니냐.”, “옆에서 부추기지 않았느냐.”, “엄마나 아빠가 인사말을 대신 써 준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이 꽤 있다.

저렇게 축하를 해주고 나서 대부분 이런 말이 이어졌다. “우리 아이는 내성적이라서 꿈도 못 꿔요.”, “한번 해보라고 해도 자신 없어 해요.”, “떨어지고 너무 속상해해요.”, “인사말을 열심히 준비해서 갔는데도 떨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 분들은 가진이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임원 한 번 안 해 본 아이가 누가 있겠냐’는 말도 있지만, 안 하거나 못했으면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가진이가 회장 선거에 나서는 족족 당선되는 이유도 궁금했다. 가진이가 말했다.

“아빠, 이번엔 좀 떨리더라고.”

“왜? 너 반장 선거 많이 해 봤잖아?”

“애들이 다 말을 잘 하더라고. 원고 준비를 한 애도 있었어.”

“너는 말 못했냐? 원고 준비를 안 했고?”

“뭐 열심히 하긴 했지.”

“너는 무슨 말을 했는데?”

“중학교 때 이야기를 해 줬어. 예전에 선거 나가서 졌던 이야기.”

“그게 뭔데?”

“날 이긴 애가 ‘쇼트트랙 선수들처럼 협동해서 이길 수 있는 반을 만들겠다.’고 하고, 춤도 추고했거든.”

“말 잘했네. 내용도 괜찮고.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거야?”

“서로 잘 지내면 되지 이기긴 뭘 이겨. 하여튼 저 이야기를 해 준 다음, 내가 그랬어. ‘말만 잘하고 일은 못 하는 회장이 되지는 않겠다.’, ‘진심으로 친구들과 만나겠다.’고 했지.”

“듣고 보니 그러네? 하하. 어쨌든 뽑혔으니 잘 해봐. 축하한다.”

천하의 앞이 되지 않는다

가진이도 그러했겠지만, 떨어진 다른 친구들도 당선되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했을 것이다. 가진이 말로는 떨어진 친구들이 자신보다 나았다고 하는데, 유권자(?)들은 왜 가진이를 리더로 선택했을까? 범범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다 유세 내용도 특별한 게 없었는데….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사상가 한비자(韓非子, ?-BC233)의 말에서 해답을 찾아보려 한다.

성인은 만물의 법칙에 따릅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앞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천하의 앞에 서지 않으면 일마다 이루어지고 공을 세우게 되어서 그의 견해는 반드시 세상을 뒤덮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높은 벼슬을 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 있겠습니까?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일을 성취하는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의 앞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성취하는 우두머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한비자(韓非子)』, 권18, 「해로(偕老)」>

한비자에 따르면 리더는 앞에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선 뒤로 물러나서 여러 사람의 말을 듣고 종합하여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자연스럽게 이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섣불리 앞서 나가지 않으면서 열린 자세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이라면 남들이 믿고 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말로 이해된다.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은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수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번번이 사양하고 평생 학문의 길만 걸었던 조선의 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이렇게 말했다.

처세하는 방법에 이르러 보면, 알려지기를 바라는 자는 끝내 알려지지 못하고, 숨는 자는 끝내 반드시 알려지고 만다. 알려지기를 바랄 경우 조금이라도 작은 선(善)이 있으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겨우 한 재주에 능하면 세상에 자랑하려고 힘쓰는데, 이처럼 알려지기를 바라고 자랑하기를 힘쓰는 사사로운 마음은 천리(天理)의 올바름을 해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선, 한 가지 재주는 단지 남을 기쁘게 하고 세상에 팔아먹는 자료가 될 뿐이니, 어찌 다시 길게 전진할 희망이 있겠는가. 이것이 재주를 자랑하고 선을 드러내며 이름을 구하고 명예를 바라는 자가 일시적으로 반짝하더라도 날로 없어지는 이유이다. <장현광(張顯光), 『여헌선생문집(旅軒先生文集)』, 권9, 「부지암정사기(不知巖精舍記)」>

실제 저들의 말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기도 한다. 자신의 한두 가지 재주와 장점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어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가 그 재주를 다 소진해 버리거나, 기고만장하다가 몰락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그럴듯한 말을 던져 놓고 관심을 끈 뒤에 수습을 못 해서 비난을 받거나 망신을 당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이런 모습을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옛날에 비해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지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서 무언가를 진득하게 앉아서 하기 어려워진 사회 분위기 탓도 분명히 있다. 늘 시간에 쫓기면서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를 하거나 당하며 살아야 하는 게 현대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이 시대와 지역을 넘어 정설이 된 것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요즘에도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주는 많지만 덕이 부족하다)’이라는 말을 통해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좋지 않게 보는 경향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걸 보면 현재까지도 옛 사람의 생각이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잘난 척 하면 아이들이 싫어해

가진이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잘난 척을 하면 아이들이 싫어해. 아이들은 자기가 잘난 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회장은 그렇지 않은 아이를 뽑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더라고. 말을 잘해서 한 번 뽑힐 수는 있겠지. 그런데 제대로 못하면 걔는 다시는 안 뽑혀. 공부만 잘 한다고 반장이 되는 거 도 아냐. 선생님은 좋아하겠지만 애들은 싫어해.”

“그러면 너는 잘난 척을 안 하고 이기적이지도 않다는 거냐?”

“나도 이기적인 면이 있겠지. 왜 없겠어. 아이들이 남들이 나를 덜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나보지. 다만 나는 잘난 척은 안 하고……. 일부러 잘 보이려고 하잖아? 그럼 처음엔 모르지만 얼마 안 가서 눈치채거든. 애들이 모르는 거 같아도 다 알아.”

내가 보기에 가진이가 몇 년 동안 계속 회장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친구들 위에 군림하려는 마음이 없었고, 회장이 하는 일은 친구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뭔가 특별한 것은 없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잘 섞이려 하는 태도에 친구들이 높은 점수를 준 것으로 짐작한다.

▲ 김재욱 칼럼니스트
▲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왜곡된 기억 >외 6권

대체로 리더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앞장서서 남을 이끄는 데 능해야 하며, 다른 조직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예전의 한국 사람에게 환영받는 리더의 상이었지만, 이제는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부드러운 리더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앞에 서서 따라오라고만 하기 보다는 함께 가자고하는 리더, 카리스마를 뽐내기 보다는 무던하게 자기 할 일을 하는 리더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모르는 것 같은 애들도 아는 것을 경험 많은 어른들이 모를 리 없다. 한비자의 말처럼 ‘천하의 앞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역설적으로 천하의 앞이 되며, 장현광의 말처럼 알려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알려지지 못하고, 숨는 사람은 끝내 알려지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숙이며 꾸준히 노력을 하는 사람이 끝내 무슨 일이든 성취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람이 환영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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