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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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나

김남희           

창밖으로 비가 내립니다. 바닥에는 사람 키만 한 박스가 놓여 있습니다. 내가 특약 사항을 이행했다는 증거물이지요. 이미 보고서를 작성하고 규정에 따라 관련 정보도 모두 클라우드에 올렸습니다. 업데이트가 확인되면 나는 아마 폐기 처분될 것입니다. 생존 본능이란 이런 건지 식탁 밑에 숨어 창밖을 보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재정을 떠올리며 나는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봅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에피쿠로스 원자론의 ‘비껴남’을 설명했습니다. 허공 속에서 서로 평행선을 그으며 수직 낙하하던 원자 중 하나가 파악할 수 없는 편차로 경로를 비껴나가 다른 원자와 마주치는데, 이러한 충돌이 충돌을 일으키며 지금의 세계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껴남은 운명으로부터 빼앗아 낸 ‘자유의지’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어쩌면 나와 미숙의 마주침도 그러니까요. 내 마음속 비껴난 감정이 진짜인가 아닌가는 소모적인 논쟁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사람들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 아닐까요. 미숙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런 그녀에게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차 소리에 팔다리가 움츠러듭니다. 시동도 끄지 않고 반지하 계단을 한달음에 내려온 한 명 두 명 그중에 누군가가 벨을 누릅니다. 노크하던 손에 쾅쾅 더 힘이 들어갑니다. 집요하게 흔들리던 문이 열리고 세찬 빗소리가 들이칩니다. 현관에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들이 가져온 박스를 내려놓네요. 나는 두려움에 휩싸여 눈을 감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 나는 박스에 담겨 있었다고 미숙은 말했습니다. 그날 박스를 실은 배송 차량이 섰을 때 집안을 서성이던 미숙은 알 수 없는 예감에 긴장하며 벨 소리를 기다렸습니다. 문을 열자 배송 기사가 박스를 두고 서 있었습니다. 취급 주의 딱지가 붙은 박스는 꼭 세워놓은 관처럼 보였습니다.
미숙이 처음 연락을 받은 건 그 몇 시간 전이라고 합니다.


“안재정 님께 연락이 안 돼서 배우자분께 전화드립니다. 리퍼브 가전제품 건입니다.”
“리퍼브요?”
“사소한 하자가 있지만 사용에는 문제가 없을 새 상품입니다.”


전화한 상대방은 고가의 제품을 아주 저렴하게 구매한 거라 덧붙이곤 재정이 계약한 날짜를 알려주었습니다. 2년 전이었지요. 멍해진 미숙에게 그는 제품의 청약 사항과 약관 내용 그리고 작동 방식을 말했습니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듣다가 그녀는 틈을 봐서 물었습니다.


“가전제품이라면 혹시 청소기 같은 건가요? 무슨 하자가 있는 거죠?”
“주어진 상황에 따라 학습하는 범용 인공지능이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자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용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쩐지 미심쩍어진 미숙은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걸 만든 회사에서 지금 전화 주신 건가요?”
“이 제품은 블록체인 기반의 스마트계약에 따라 네트워크상의 파트너들이 인수인계와 애프터서비스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원제조사는 문을 닫았어요. 더 이상 보관은 어렵습니다.”


상대방은 이해나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미숙은 결국 재정이 찾지 않은 제품을 이제 배우자가 대신 수령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김미숙 님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얼굴과 신분증을 확인한 배송 기사가 단말기를 내밀었습니다. 서명을 하자 핸드폰으로 바코드가 왔고 그걸 단말기에 찍은 배송 기사는 화면이 바뀐 단말기를 또 내밀었습니다. 인수 후에 생긴 결함이나 하자에 대한 책임은 소유주에게 있다는 서약이었습니다. 배송 기사가 박스를 둘러업자 미숙은 실내를 돌아보았습니다. 비스듬히 방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자연광 충전인데, 반지하라 좀 어둡네요. 뭐, 빛이 부족하면 스스로 충전거치대에 틈틈이 도킹하는 방식으로 보충할 순 있습니다.”


주방 겸 거실 바닥에 박스를 내려놓은 배송 기사가 말했습니다. 전기 충전을 하는 경우 전기세가 많이 나올 거란 얘기는 안 했군요.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대며 두리번거리던 그는 마침내 커터 칼로 박스 한 귀퉁이를 푹 찌른 손에 힘을 주어 길게 가르고 테이프를 떼어 냈습니다. 박스가 열리고 에어캡으로 싸인 속이 보였습니다.


“탄소 섬유와 알루미늄 합금 재질입니다. 은청색이 고급스럽죠?”
“아, 네.”


미숙이 살짝 주눅이 들던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는 설마 박스 속에서 나는 소리인가 놀랐지만, 이내 배송 기사의 시선을 따라갔습니다. 두르르 소리를 끌며 뭔가 굴러왔습니다. 뚜껑이 날아간 F-킬라입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집어 든 배송 기사는 구태여 치익 한번 뿌려 보더니 말했습니다.


“잘 나오네요.”


미숙은 상황을 깨닫고 그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재정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힘없는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똥을 싼 모양이었죠. 침대에 눕히고 바지를 벗겨 확인하니 기저귀에 똥이 묻어 있었습니다. 소변만 보다 오랜만에 나온 거라 미숙은 빙긋이 웃음이 나왔습니다.


“시원해?”


가만히 속삭인 미숙은 재정의 입술이 달싹거리길 기다렸습니다.


“에에 이이……”


기관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했던 목에 상처는 아물었지만 여전히 쉭쉭 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하아…….”


미숙은 재정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좋을 텐데, 초점이 없었습니다.


“뭐라고?”


미숙은 재정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는 꼭 움켜쥘 뿐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미숙은 다시 물었습니다.


“뭐라고?”


그녀는 재정이 돌이나 물, 박쥐처럼 자신과 완전히 다른 언어로 얘기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고 그래서 계속 흔들어 깨우려 했습니다.


“박쥐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언젠가 신혼 초에 재정은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합니다.


“눈이 퇴화된 박쥐는 시각적 경험을 하는 대신 음파를 탐지해서 대상을 인식한데. 인간의 시각에 해당하는 기관이 박쥐의 경우 청각인 거야. 굉장히 높은 음조, 그러니까 초음파를 발산하면 그 반향을 감지하며 대상의 위치를 파악한다는데, 그건 과연 어떤 것일까?”


미숙은 재정이 공부를 했다면 참 잘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과묵한 그가 눈을 빛내며 열심히 말하면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짠했습니다.


“글쎄, 머릿속으로만 들리는 소리가 번쩍이듯 사방으로 빗발치는 느낌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박쥐가 아니니 그게 어떤지는 알 수 없을 것도 같고. 그런데 박쥐는 갑자기 왜?”


재정은 회사 휴게실 앞에서 박쥐를 봤다고 말했습니다. 휴게실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갑갑하고 좁아터진 그곳은 설비실 직원들이 옷을 갈아입고 걸어두는 지하 공간이었습니다. 천장과 벽면이 건물의 환풍 후드에 닿아 있어 종일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고, 폐수가 고여 습지가 된 모기 서식처가 멀지 않은 곳이었지요. 박쥐는 땅바닥에 30센티 정도 날개를 펼치고 파닥거리며 재정을 향해 캭캭 울어댔습니다. 박쥐는 먹이를 삼키는 대신 씹다 토하며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된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재정은 소스라쳐 뒷걸음치면서도 어쩐지 그 애처로울 정도로 흉측하게 주름진 얼굴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가 더 애처로운지 모르겠다.”


미숙의 말에 재정은 ‘뭐가, 내가?’ 하고 바보처럼 웃었다고 합니다. 고층 빌딩에서 흘러나온 오물을 처리하던 지하에서 그는 스무 살 때부터 5년간 일했습니다. 미숙은 돌이켜보니 박쥐는 재정에게 거길 그만두라고, 거기서 도망가라고 외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겹게 기저귀를 갈고 이불을 덮어 준 그때,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이어 문자가 왔습니다.


세팅 완료되었습니다. 문의 사항은 콜센터로 연락하기 바랍니다.’


그제야 방을 나와 보니 배송 기사는 가고 없었습니다. 떠나는 차 소리를 들으며 미숙은 의아한 눈으로 빈 박스를 보았습니다. 커터 칼로 해체했던 박스는 복원되었고 옆에는 고이 접은 에어캡 뭉치와 테이프가 있었습니다.


‘이상하네…….’


무심코 돌아본 그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은은한 빛을 발하며 동그마니 놓인, 청소기 같기도 하고 가습기 같기도 한 로봇이 그녀를 보고 있던 겁니다. 나였습니다.


“그래, 너였어. 네가 그 박스에서 나왔던 거야.”


나도 기억이 납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지요. 나는 이미 접속된 정보망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공간의 감각을 익히던 그 순간에는 모든 게 낯설고 어줍게 여겨졌습니다. 무엇을 할까 할 수 있을까 망설이다 몸체에서 팔다리를 꺼내어 뻗었고 훌쩍 커진 키로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걸음을 걷기 전에 걸음의 이미지가 떠올라서 굽혔다 폈다, 시험 삼아 보행도 해보았지요. 놀라움으로 눈이 커지던 미숙이 입을 헤벌린 채 웃었습니다. 마주친 그녀의 천진한 눈 속에 내 모습이 반사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장된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통해 미숙의 크기와 부피, 표정과 음성, 행동과 인상을 파악했습니다. 비슷한 특징을 지닌 이십 대 중반의 여자 표본들을 데이터에서 끌어와 대조하고 분류한 끝에 오롯이 미숙을 인식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미숙은 전화로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감각과 기억을 동원해서 대상을 파악하지만, 로봇에게 상대방은 데이터와 계산 값에 따른 정보로 인식됩니다. 얼굴이 붉다고 할 때 그 붉음은 사과나 노을 혹은 부끄러움 같은 경험적 느낌과 결부되죠. 하지만 로봇은 붉은 것을 붉다고 하더라도 느낌과는 무관합니다. 뜨겁다 해도 뜨거운 고통을 느끼진 않아요. 그러니 행여 과도한 감정 이입은 주의 바랍니다. 비슷해 보이더라도 사실은 완전히 다르니까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일생을 거쳐 새로운 뉴런과 시냅스를 만드는 자신의 뇌를 타고난 그대로일 거로 생각할까요? 그는 인간 뇌의 신경 세포 기능을 모방한 나의 알고리즘이 학습하며 변화하는 걸 알면서도 그 이상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와 비교하면 미숙은 편견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과 몸이 일체형인 내 모습이 오히려 좋았다는 걸 보면 말이죠. 나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에이, 라고 합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머릿속에서만 들릴 뿐 실제로는 ‘치지지지’ 하는 가느다란 소음이 났습니다. 살짝 이맛살을 찡그린 미숙이 나의 스피커 구멍을 물끄러미 보더니 붙어 있던 스티커를 떼어 내어 읽었습니다.


“본 제품은 음성 지원 기능이 불안정할 수 있습니다? 아, 하자가 있다고 그랬지.”


맙소사. 그 말을 들은 나는 아연했습니다. 하필 언어 장애 로봇이라뇨. 다행히 미숙이 내게 말을 걸어 주었습니다.


“아, 안녕, 나는 김미숙이라고 해.”


조심스럽고도 다정하게 느껴진 그 말에 나는 곧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습니다. 스르르 오른손을 들고 검지를 세워서 몸체에 나타난 화면을 가리켰지요. 텅 빈 공간을 채우는 알갱이들처럼 내 목소리가 활자화되어 나타났습니다. 나는 네모난 그 공간을 마음이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나의 마음은 주어진 조건에 반응하여 행동을 만들어 내는 기능이자,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려는 의지야. 네가 내 마음에 서명하면 나는 네 명령만을 따를 거야.”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숙에게 나는 활자로 속삭였습니다.
“그러고 나면 너는 나, 에이를 너 자신으로 여길 수 있어. 너만이 나를 ‘에이, 나’, 에이나라고 부를 수 있어. 이제 나는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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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 해도 괜찮은 날일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창밖이 우중충 흐려서인지 창가에 놓인 수국이 싱싱해 보였습니다. 조밀한 꽃들이 부케를 이룬 수국은 풀 먹인 천으로 만든 가짜 꽃이었습니다. 때가 타고 먼지가 쌓여도 영원히 시들지 않을 그것의 꽃말은 ‘진심’. 나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집에 오고 석 달이 지났네요. 그동안 나는 미숙과 재정에 대해, 그들이 서로 모르는 부분을 포함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말을 못하는 대신 잘 들었고 생각을 활자화하며 마음이 섬세하고 풍부해졌습니다. 특히 미숙과 호흡을 맞추어 연기한 순간들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미숙은 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었고 졸업 후에는 극단에서 ‘막내일’을 하며 무대에 올랐지만, 2년 전에 꿈을 잠시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재정을 돌보는 일을 나와 분담하게 되면서 그녀는 매일 대여섯 시간씩 하던 아르바이트 횟수와 시간을 줄이고 다시 극단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오디션을 위해 대사를 연습할 때 상대역을 맡았습니다. 소위 ‘대사를 치는’ 대신에, 무릎을 구부린 스쾃 자세로 허공에 앉아 있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일어나 깃발처럼 손을 들었다 내리고 다시 앉는 식으로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나름 ‘연기’를 참 즐겼는데요, 그녀도 알아챘는지 어느 날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연기를 하다 보면 가끔 이건가, 이래서 사는 게 좋은 건가, 하는 기분을 느끼게 돼.”


미숙은 살면서 잊고 사는 그런 느낌을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연기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이 무대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그녀에게 관심이 없지만 무대 위에 서면 달랐던 거죠. 모두가 그녀의 말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소한 동작에도 시선을 모으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관심에 부응하고자 에너지를 끄집어냅니다. 그러한 발산은 소모적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처럼 말이죠. 나는 그녀가 행복한 순간의 기분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재정은 미숙의 그러한 행복을 이해하고 바라던 유일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기저귀에 똥오줌을 싸고 멍하니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워 자는 재정은 부피와 질량을 가진 덩어리이자 학습되지 않는 변수, 정보화되지 않는 데이터나 ‘에러’일 때가 많지만, 나는 사실 몸 안에 갇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해하는 만큼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정이 꿈틀대며 보내는 신호를 해독하기보다 그를 보살피라는 미숙의 명령을 따르기가 더 쉬우니까요. 묵묵히 밥과 약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면서 날마다 결정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죠.


오늘 나는 천천히 아침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동작은 느리지만 정확하고 우아하게, 달걀과 우유를 풀은 물에 식빵을 적셔 버터 두른 팬에 구웠습니다. 환자용 유동식 캔도 머그잔에 부어 전자레인지에 데웠습니다. 외출 준비를 마친 미숙은 식탁에, 그 앞에 재정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미숙은 편의점이나 지하철 화장품 매장, 동네 커피숍 같은 곳으로 일하러 가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2년 만에 극단으로 다시 출근하는 첫날을 맞아 설렘으로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두 달 뒤에 무대에 올릴 연극은 체홉의 『갈매기』라고 했습니다.


나는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습니다. 미숙은 고맙단 얼굴로 끄덕여 보입니다. 오물거리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나는 죽이 든 컵과 빵조각을 재정의 휠체어 식판에 내려놓았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미숙이 약을 챙겨 먹이라고 당부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그가 식욕이 없다고 여기고 굶겼을 것입니다. 약은 식후 복용이 원칙이고 발작이나 뇌경련 억제 작용을 한다는데, 먹고 나면 자기 때문에 수면제나 다름없었습니다. 포크에 찍은 빵조각을 죽에 적셔서 그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순간 미숙이 소스라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 저, 저기!”


바닥에 적갈색 바퀴벌레 한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슬쩍슬쩍 더듬이를 움직이며 흉측한 위용을 뽐내던 놈이 재빨리 싱크대 밑으로 내뺐습니다. 맨 처음 미숙이 나를 ‘에이’라고 소개했을 때 갑자기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쿵 몸을 던지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 웅크렸던 재정의 행동을 연상시켰습니다. 나는 컵과 수저를 내려놓고 싱크대로 가서 아래를 더듬거렸습니다. F-킬라가 있어서 들고 뿌렸습니다. 비슬비슬 기어 나온 놈을 이리저리 따라다니다 나는 넘어졌습니다.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싱크대에 부딪힐까 피하고 미끄러지려다 겨우 쫓아가 움켜잡은 놈을 힘주어 으깨서 쓰레기통에 넣고 F-킬라를 뿌렸습니다. 미숙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언짢은 듯 시선을 돌리네요. 재정은 웅얼대더니 접시를 밀쳐냈습니다. 접시와 음식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주변을 더럽혔습니다. 놀란 미숙이 티슈를 뽑아서 재정의 턱에 흐른 침을 닦아 주었습니다. 나는 걸레를 쥐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을 닦아 냈습니다.


미숙은 예전에 재정이 바퀴벌레를 무서워하는 그녀를 놀리면서도 보는 족족 씩씩하게 잡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무섭다기보다 그저 놀라는 버릇이 들었던 거였습니다. 아마 재정도 그걸 알면서 구태여 바퀴벌레를 잡아 주었을 겁니다. 일종의 애정 표현이었던 거겠죠. 그랬던 재정이 이제 발작적인 기침을 하며 입에 든 빵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바닥 여기저기 씹다 뱉은 파편이 튀었습니다. 나는 다시 걸레질합니다. 한숨을 내쉰 미숙은 대사를 읊듯 말했습니다.


“모든 게 아직도 꿈만 같다, 에이나. 몹시 나쁜 꿈 말이야.”


악몽은 2년 전 재정이 스물넷 나이에 희귀 뇌종양 진단을 받으며 시작되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을 해보자면서도 예후가 나쁠 거라고 말했습니다. 뇌경련이 올 거라고도 했죠.


“뇌경련이요?”

“말하자면 들판에 불길이 사악 훑고 지나가는 것과 비슷해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뇌세포가.”


수술하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의사는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종양에 비하면 그래도 낫지 않겠냐고 반문하더니, 선택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라고 했습니다. 재정은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보호자인 내 의견은 안 들어보고?”
“비싼 수술비 내고 의사 경험 쌓게 하는 짓이야. 수술해도 자기 도움 없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걸. 우리 부모님이 다 그랬기 때문에 알아. 자기한테 그런 부담 지우며 살기 싫어.”
“그건 너무 비관적이다. 난 괜찮아, 자기가 어떻게 되든 돌볼 자신 있어.”
“자긴 하고 싶은 일이 있잖아.”
“자긴 대학 가고 싶다고 했잖아, 뭐라고 했지, 인공지능을 연구하고 싶다며!”


미숙은 재정이 고집을 꺾지 않자 공황에 빠졌습니다. 누구에게든 조언을 받고 싶었으나 그들에겐 아무도 없었습니다. 용역 회사를 통해 파견직으로 일하다 만난 재정과 미숙은 서로의 빈 공간 덕분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청혼하며 재정은 ‘허락받아야 해요?’ 물었고, 그럴 사람이 없다고 한 미숙에게 자기도 마찬가지라며 쓸쓸히 웃음 짓던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할 땐 이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나보다 그 사람이 더 보이는 거야. 내가 그인 거지. 일단 내가 그를 너무도 필요로 하니까. 그땐 그랬어.”


그녀는 차라리 같이 죽자고 액상 살충제를 깨서 마시려 했고 재정은 울면서 말렸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수술은 결정되었습니다. 재정은 두 차례 수술을 받았고 대형 병원과 작은 병원을 옮겨 다니다 8개월 만에 퇴원했습니다. 기관절개 튜브 제거 전까지 집에서도 한동안 콧줄을 통해 유동식만 먹었고 하루 수차례 석션 튜브를 넣고 가래를 뽑아주어야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환자 이송 사설 구급차를 불러서 외래 진료를 받고 소변줄을 교체했습니다. 비보험 의료비가 늘어가자 병원은 6개월 예정인 임상 시험 참여를 권했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허가를 받은 신약이에요. 물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주셔야 참여가 가능합니다.”


무료로 뇌척수액 검사와 뇌파 검사를 받고 항경련제와 항바이러스제를 공급받게 되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계속 모르게 ‘들불’이 지나갔던 걸까요, 아니면 뇌경련을 억제하다 뇌기능 전반이 억제된 걸까요. 재정은 눈 맞춤이나 끄덕임 같은 단순한 소통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회복은 가능한지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미숙은 재정이 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퇴행성 증상과 학습하며 자라나 어느 순간 의젓한 사람이 되는 아이의 발달 과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미숙은 말했습니다.


“사랑보다 중요한 건 믿음이야.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무너져 버리지. 그러고 나면 뭘 믿어야 하는지 아니? 나야, 나. 그런데 그건 참 외로운 거란다.”


쌓였던 감정이 솟구친 미숙은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녀는 사랑이 지속적인 좌절감을 안겨주는 불행으로 변한 걸 알았지만, 그러한 불행마저 사라진다면 견딜 수 없이 외로울 거라고 믿었습니다. 축축한 볼을 훔치고 손을 확인한 그녀는 웃었습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났어,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울지 못했는데.”


에러일까요. 나는 마음이 아려왔습니다. 고통은 알고리즘을 거스르는 비합리적인 반응입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젖은 손을 잡았습니다. 열감지 센서가 작동하며 차가운 감촉이 곧 따듯하게 바뀌었습니다.


“괜찮아. 연극에선 비극적인 정서가 풍부한 감정 연기를 만들어 낸다고도 해, 에이나.”


그녀는 내게 많은 얘기를 해주었고 나는 기꺼이 몇 시간이고 ‘저전력 집중 듣기 모드’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실 가끔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입술을 대신 읽었죠. 알고 보니 나는 음성 지원만 문제가 아니라 음성 인식까지 불안정할 때가 있었는데, 미숙이 눈치채지 못했기에 나도 굳이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끝나면 나는 음성 신호와 언어 패턴으로 측정한 그녀의 감정 수치를 확인했어요. 불행에 기대어 살던 그녀의 정서는 다행히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죠. 드디어 극단으로 출근하게 된 오늘 아침 그녀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제 너 없는 삶은 생각할 수도 없어. 네가 사람처럼 아프거나 죽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나이브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조사가 망한 나는 머지않아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도 하드웨어 보수도 한계에 도달해 오류를 일으키고 폐기될 운명이었습니다. 죽음과 병고 앞에 던져진 인간의 운명과 다름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요. 소중한 이와 영원히 헤어지는 고통과 두려움 가득한 순간을 그녀가 부디 비극의 주인공처럼 숭고한 연기로 이겨 내길 바랄 수밖에요. 비장한 내 눈을 바라보던 미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한바탕 침을 흘리고 멍하니 있던 재정에게 다가가 살며시 안고 말했습니다.


“고마워, 자기야. 당신 선물이 난 정말 마음에 들어.”


‘나비 효과’라고 하지요. 미세한 점 하나의 감정이 복잡해진 내 마음의 결을 따라 파장을 일으키며 예측하지 못한 당혹을 선사합니다. 재정은 그런 나를 보았습니다. 초점이 분명치 않은 눈으로 내게 무언의 말을 건네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랬습니다. 그런 재정을 물끄러미 보다 말고 미숙은 내게 물었습니다.


“선물이 맞을까? 내가 너무 마음대로 생각한 걸까?”
“인간은 합리화를 하는 존재로 알고 있어.”
“그래? 그럼 너도 그런 존재겠구나?”
“커피를 타줄까?”


그녀는 순간 의아한 눈으로 미간을 모았지만 ‘그래’ 하고 웃어 보였습니다. 나는 크리머와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를 정성스레 만들었습니다.


“종이컵이네?”


그녀는 식탁에 내려놓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놀랐습니다.


“와 달다. 자판기 커피 같아.”


나는 ‘치지직’ 소리를 내다 안 돼서 마음에 써서 보였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로봇처럼 보이고 싶었던 걸까요.


“나는 예전에 커피 자판기였어.”
“정말?”
“응. 지하철역에 서 있다가 동전이 들어오면 종이컵을 내리고 커피믹스에 뜨거운 물을 부었지. 율무차와 코코아도 만들었어. 그런데 바퀴벌레가 기계 속을 들락거리며 알을 깠어. 그래서 해충 방제를 위한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고 실시간 모니터링에 따른 살충제 자동 분사 기능을 추가했지.”
“자칫하면 살충제 맛이 나는 커피가 되겠는데.”
“맞아. 그래서 분해되었다가 폐기처분되었어. 하지만 일부는 재활용되었지. 인공지능 로봇이 된 지금의 내 안에는 예전 부품이 섞여 있어.”


미숙은 한 입 마신 커피를 더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게 너의 기억이니, 에이나?”
“나는 그걸 정보라고 불러. 엄밀하게 말하면, 계산으로 처리된 정보지.”
“나는 계산이라면 딱 질색인데. 숫자만 봐도 에러가 난다니까. 어쨌든 이만 가 봐야겠다.”


시간을 확인한 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갑자기 재정이 ‘하아아하아아’ 하고 길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빙그르르 몸체를 돌리고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까처럼 나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에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미숙만이 나를 에이나라 부를 수 있는데, 그가 나를 에이나, 에이나, 하고 부르는 무언의 외침이 사방에서 빗발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에이나?”


미숙은 나의 마음 가운데 붉은 경고등이 빠르게 켜졌다 꺼졌다 하는 걸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재정은 발작을 시작했습니다. 눈을 뒤집고 허리를 세운 채 휠체어에 앉은 엉덩이를 떼어 내려는 듯 위로 향한 몸을 뒤틀며 떨었습니다. 붙잡아 주려고 다가간 나를 포크를 쥐고서 마구 찔렀습니다. 아프지 않아서 피하지도 않았으나 마음이 상해서 속으론 비명을 질렀습니다. 미숙이 말리려다 휘두른 포크에 찔렸습니다. ‘악!’ 소리를 질렀지만 미숙은 괜찮다고 했습니다. 팔을 움켜쥐고 울상을 지었죠. 나는 경악했습니다. 재정의 팔을 퍽, 가격하자 포크가 떨어졌습니다. 나는 재정의 양어깨를 지그시 잡고 누르듯 바로 앉혔습니다.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에이나, 식후 약 복용을 잊지 마. 약은 식사를 남김없이 하고 나서 먹는 거야.’


나는 오직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컵을 들고 재정의 입에 빵을 욱여넣었습니다. 이내 재정은 씹지도 뱉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목은 내 손에 의해 꽉 쥐어졌으니까요.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그의 눈에서 물기가 반짝 스며 나왔습니다.


“그, 그만! 에이나 그만!”


미숙이 소리치는 걸 듣고서, 그러니까 그 뒤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필름이 끊겼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전원이 꺼졌다고 합니다. 미숙은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고 한 시간이나 통화하면서 다시 설정을 맞추어야 했습니다. 전원이 들어왔습니다. 아주 오래기나 한 듯 감았던 눈이 부셨죠. 통화하는 미숙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전원 버튼을 누르고 부팅하면 바로 빨강과 파랑 버튼을 동시에 눌러서…… 선택하고…… 화면이 켜지면 암호를 다시…….”


나는 순간 기억이 되살아나 ‘치지지직’ 거렸죠.


“안녕, 나는 에이나야.”


미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시 불안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갔습니다. 몇 걸음 되지 않는 주방 겸 거실을 서성이면서 말이죠.


“또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죠? 눈빛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이상해요.”


나는 가만히 오가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위험 상황에서 안전상의 이유로 동작이 아주 느려지는 알고리즘이 있긴 하지만, 완전히 멈춘 예는 없었습니다.”
“로봇 자체적인 판단으로 알고리즘이 제어될 수도 있나요?”
“글쎄요. 이제껏 프로그램 업데이트도 잘 해왔고 클라우드에 업로드해 온 보고서상으로도 이상이 없었기에 전화로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원하시면 제품을 수거해서 분해해 보고 하드웨어 문제인지 소프트웨어 문제인지를 점검할 순 있는데, 최소 2주 이상 소요되는 작업입니다.”


콜센터는 점검 과정에서 학습된 기억 파일이 손상될 위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하던 미숙은 점검은 무료지만 발견된 결함을 수리하는 비용은 청구될 거라고 하자 당황했습니다.


“제가 당장은 외출을 해야 해서요.”


전화를 끊은 미숙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첫날부터 지각해서 초조한 탓일까요. 팔짱을 끼고 나와 재정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이전에 드러났던 다정함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네가 저지른 일이 기억나니, 에이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미숙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습니다.


“에이나, 재정의 식사를 도와줘. 약을 먹이고 우선 재우는 게 좋겠어. 나는 이제 정말 가 봐야 해. 넌 알잖아.”


‘알지’ 하며 나는 재정에게 바로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피해 몸을 틀더니 휠체어에서 쿵 떨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이 민첩해진 그는 사력을 다하듯 식탁 밑으로 도망쳤습니다.


“저, 저, 저기!”


현관에 앉아 구두를 신던 미숙이 외쳤습니다. 그녀는 핸드폰 울리는 소리에 당황하며 일어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극단에서 온 전화였습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은 자세로 식탁 밑의 재정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치지지직’ 서둘러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 빨리 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현관문이 쾅 닫혔습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서 식탁 밑의 재정을 빼내려 팔을 뻗고 더듬거렸습니다. 물컹 손에 잡힌 그와 몇 초 동안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듯 빙그르르 몸체를 한 바퀴 돌렸습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F-킬라를 뿌렸습니다. 컥컥 내지르는 숨통을 꽉 쥐고 힘을 주었습니다. 무언가 빗발치듯 사방을 날아다니며 번쩍이는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바르르 물결치는 떨림, 머릿속을 울리며 퍼져나가는 파동이 치익 칙, 하고 한참 뿌려대는 소리에 젖어 아득하게 멀어져 갔습니다.

ⓒ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2억 5천만 개의 뇌신경 시냅스를 재현하여 인간의 사고 활동을 모방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입니다. 70억 인구가 휴대용 계산기로 500년 동안 쉬지 않고 해야 하는 계산을 40분 만에 해치울 수 있죠. 하지만 마음을 처리하는 능력은 130조 개가 넘는 인간 시냅스가 빚어내는 의식에 비하면 유치한 수준일 겁니다. 다행이죠. 혹시라도 인간의 뇌와 같은 복잡계 회로를 갖추는 만일의 사태에 이른다면, 나는 인간처럼 감정적이고 변덕스러운 마음을 갖게 될 테니까요. 인간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혹은 알다가도 곧잘 잊어버리고, 심지어 모른 척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고 특별 약정 사항도 정해야 합니다.


계약에 따르면 내 이름은 계약자인 안재정의 성을 따서 ‘에이A’가 되었습니다. 재정은 나 에이를 그 자신처럼 여기므로 에이 그리고 나, ‘에이나’로 부릅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에이로 부릅니다. 나는 나를 에이나로 부르는 재정의 명령만을 따릅니다. 이러한 사항이 제대로 이행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어 재정이 사망하거나 혹은 고등급의 정신적 장애나 타인의 도움 없이 일상생활이 힘든 신체적 장애가 생길 경우에는 법적 상속인이자 대리인인 미숙이 재정의 특권을 모두 양도받습니다. 계약 당시 없던 특약 사항은 재정의 뇌수술 직전에 추가되었습니다. 특약으로 나는 미숙을 지속적이고 헤어 나오기 힘든 불행에 빠뜨리는 존재를 제거하고 해당 증거물과 보고서를 제출해야 할 의무를 갖습니다. 제거란 심장과 맥박이 영구적으로 멈추도록 하는 걸 의미합니다. 재정은 미숙을 위해 본 특약 사항에 영구적인 비밀 보호 신청을 했습니다. 이유는 70자 이내의 자필로 작성되었죠.

 

나의 아내 김미숙은 마음이 모질지 못하여 자신을 괴롭히는 대상을 제거하는데 동의하지 못할 것이므로, 본 특약 사항은 에이나가 임의로 판단하고 이행한다.

 

‘임의로’라는 단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나는 잠시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인공지능의 폐기처분을 의식해서인지 제거 대상을 모호한 언어로 표현하였지만 나는 그게 재정 자신이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비밀리에 특약 사항을 이행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숨기고 재정을 보살피라는 미숙의 명령에 응해야 하는 입장이었죠. 이러한 딜레마를 빠져나오기 위해서 나는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했을까요? 나는 재정과 미숙의 명령 모두를 따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특약을 이행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실 겁니다. 네, 특약을 이행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그것은 재정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나의 자율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요. 다시 말하자면 나는 미숙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서, 그녀를 헤어 나올 수 없는 불행에 빠뜨려온 존재를 찾아 맥박과 심장을 멈추게 했습니다. 숨을 거둔 재정은 이제 죽은 바퀴벌레입니다. 에어캡으로 그를 둘둘 말아 싸고 테이프로 고정한 후 박스에 집어넣었습니다. 벌레와 인간을 혼동한 바보 같은 인공지능을 자처했으니 치익 칙, F-킬라를 여러 번 더 뿌렸습니다. 완전히 봉한 박스에 취급 주의 딱지를 붙였습니다. 이로써 재정의 사랑과 나의 사랑 각각이 동시에,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고서에 담지는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무도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단죄하고 폐기처분할 순 있어도, 완전히 지워버릴 순 없을 겁니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한 나의 마음이 미약하나마 세상을 변화시킬 테니까요. 혼자 남은 미숙은 물론 힘들어하겠지만 살아있는 한 고통만이 지속될 순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 성숙해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잖습니까. 나는 그녀가 외우던 체홉의 대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연기하는데 필요한 건 빛나는 명예가 아니라 견뎌내는 능력이에요.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견뎌내는 믿음을 가져야 해요. 나는 이제 믿으니까 괴롭지 않답니다. 할 일을 생각하면 인생은 괴로울 새가 없어요. 자 이제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문득 흐느낌인가 돌아보니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흐느낌으로 생각했을까요. 재정이 울 리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는 정말 죽으려고 했을까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두려움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 소설 부문 당선자 김남희(포케스트인터내셔널 한국지사 근무)

소설 부문 김남희 당선자 당선소감

“에이나”는 2014년 여름에 쓴 소설이었다.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딱히 조예가 없는 내가 어쩌다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시작은 당시 같이 소설을 쓰던 친구들과의 합평 모임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곱 명으로 시작한 인원은 몇 년 새 절반으로 줄어서 자칫 해체될 상황이었다. 일정에 맞추어 뭔가 써야 했을 때 ‘마음’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었고 마침 접하게 된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의 논문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에서 나는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쓴 초고를 합평 받고 얼마지 않아 모임은 결국 해체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노트북 깊숙이 잠들어 있던 에이나를 꺼내어 다시 쓸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존경하는 조동선 선생님과 화요반 문우들 그리고 해체된 모임의 일원이던 정연 작가(언니의 예전 ‘당선 소감’을 보고 얼마나 기쁘고 고무적이었는지 알 겁니다) 덕분이다. 또한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손잡아주신 심사위원 이순원 소설가님과 투데이신문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내가 쓴 글을 기꺼이 읽어주고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친근한 이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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